서양음악사

중세성가와 세속가(2)

미뉴엣♡ 2015. 7. 10. 20:28
♡ 중세의 성가와 세속가(II) ♡    2010/02/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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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가의 후기 발전 ★●

 

  

5세기와 9세기 사이에 서부 및 북부유럽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개종하여 로마교회의 교리와 전례를 따르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9세기 중엽 이전에 프랑크 왕국에서 정립되었다. 그때부터 거의 중세말기까지 유럽 음악에 있어서의 모든 중요한 발전은 알프스의 북쪽에서 행해졌다. 음악의 중심지가 이렇게 이동된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치적조건 때문이다. 회교도는 719년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을 완전 정복하고 남부 그리스도교 지역을 이교도들의 수중에 또는 부단한 공격의 위협속에 남겨두었다. 그러는 동안 여러 문화적인 중심지가 서부와 중부유럽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6.7세기 그리고 8세기가 지나는 동안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수도원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나라와 대륙, 특히 독일과 스위스에 학교를 세웠다. 8세기초 영국에서 라틴문화가 부활함으로써 학자들이 배출되고 그들의 명성은 유럽 대륙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영국의 수사인 알퀸은 프랑크제국 전체에 교육을 부흥시키려는 샤를마뉴 대제의 계획을 도왔다. 8-9세기에 걸친 카롤링거 왕조 부흥의 결과 중 하나는 중요한 음악의 음악의 중심지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것은 스위스의 '성 갈렌'수도원이었다. 성가에 나타난 북부의 영향은 많은 도약 진행, 특히 3도음정 진행이 도입됨으로써 선율선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북부적인 도약진행을 사용했다는 한 예는 10세기 초에 쓰여진〈Christus hunc diem -그리스도 오늘을 허락하시네〉의 선율에서 볼 수 있다. 북부의 선율은 3도로 조직되는 경향이 있다. 마침내 북부의 작곡가들은 새로운 선율뿐 아니라 성가의 새로운 형식까지 만들어 냈다. 이러한 모든 발전들은 세속 단성음악의 유성 및 다성음악에 있어서 최초의 시도와 동시에 일어았다. 그러나 이런것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성가의 역사를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다.

 

 

                                    ■ 트로푸스(TROPES) ■

 

트로푸스 : 트로프(trope)는 원래 미사의 고유문을 노래하는 대창 성가중의 하나에 추가되는 부분으로서(인트로이투스에는 매우 자주 그리고 오페르토리움과 코무니온에는 가끔씩) 대개 시적인 가사를 지니며 네우마적 형식(neumatic style, 역주 : 하나의 음절에 대해 2~4 음표를 사용하는 형식)으로 새롭게 작곡한것이었다. 후에 이러한 삽입부분은 통상문(특히 글로리아)을 가사로 하는 성가에도 추가되었다. 트로푸스는 정규적인 성가에 대한 도입부 혹은 성가의 가사나 음악 사이에 들어가는 삽입절 형식으로 쓰였다 트로푸스를 썼던 주요 중심지는 성 갈렌수도원이었으며 투오틸로(915년 사망) 수사가 이 형식으로 작곡하여 이름을 떨쳤다. 트로푸스는 9세기와 11세기에 수도원들의 성당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Trope와 troping이라는 용어는 성가에 따르는 모든 추가부분과 삽입구를 가리키는 확대된 의미로 종종 쓰이는데 한 예로 시퀀스를 'trope'의 한 종류로 포함하기도 한다. 후기의 다성 미사곡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글로리아의 가사에 삽입된 부분도 트로푸스라고 불렀다. 이렇게 확대해서 사용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세 성가에 따르는 추가 부분의 다양한 형태들을 말할 때는 앞에서 설명한 본래의 의미로 국한시키는것이 더 좋다.

 

 

                                    ■ 시퀀스(SEQUENCE) ■

 

시퀀스 : 초기의 성가 사본들에서는 실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되풀이되는 다소 긴 선율적 악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정규 전례용 성가의 악구로서 혹은 모음집에 포함되어 가사가 있거나 때로는 없는 여러가지 상황에서 종종 발견된다. 이것들은 즉흥적인 연주에 도입되는 짧은 선율형이 아니라 널리 알려지고 쓰여진 멜리스마적인 형식이거나 다른 가사들을 가진 길고 명확히 틀이 잡힌 선율이었다. 이런 선율들과 '반복되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와 비슷한 선율들은 전형적인 프랑크적 산물이었다. 물론 이들 중 가장 오래된 몇몇은 로마적인것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긴 멜리스마는 전례에 사용되는 알렐루야에 부착되었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성가를 연상시킨것이었지만 후에는 보란 뜻의 라틴어 'sequor'에서 온 세쿠엔티아(sequentia), 혹은 시퀀스(sequence)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원래 그 위치가 알렐루야 다음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시퀀스에 산문가사가 붙었을 때' 즉 prosa ad sequentiam(약어로 prosula)일 때 이 연장 부분은 완전한 의미의 '시퀀스'가 되고 실레빅한 선율이 된다. 어떤 알렐루야와도 관계없는 긴 멜리스마와 독자적인 시퀀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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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커 발불루스(긴 멜리스마에 가사붙임) - 미니어쳐 ●

 

                                알렐루야와 같이 성가의 긴 멜리스마 부분을 외우지 못했던 
                                       노커 발불루스는 선율에 가사를붙여 외우기쉽도록만들었다.

                                       11세기 말경 성 갈렌 수도원의 것으로보이는 미니어쳐이다 
                                       ((Z U R I C H, S T A A T S A R C HI V))
                                       

 

성 갈렌 수도원의 수사인 노커 발불루스('말더듬이'라는 뜻, ca. 840-912)가 선율을 잘 기억하기 위해 어떤 긴 멜리스마 밑에 실레빅하게 가사를 붙임으로써 시퀀스를 '창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그는 Jumieges 에서 온 한 수도승을 흉내내었다. 비록 그가 이름붙인 성가에 '알렐루야'의 환성 부분이 있었다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전례적 의미에서의 알렐루야라는 보장은 없다.(프로사의 기원에 관한 '노커 발불루스'의 기록 참조) 확실히 그의 찬미가 책에는 그가 음악이 아니라 가사의 발명자라고 되어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시퀀스의 음악이 언제나 먼저 존재했고 그 다음에 가사가 생겨났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선율과 가사가 동시에 생겨나기도 했을것이다. 실레빅한 양식의 산문가사는 알렐루야뿐만 아니라 다른 성가의 멜리스마적인 악구에도 붙여졌다. 오늘날의 전례집에 어떤 미사의 제목으로서(예를 들어 NAWM 3b의 Kyrie orbis factor 참조) 그 이름이 남아있는 이른바 'Kyrie tropes'는 한때 본래의 성가에 있던 멜리스마에 실래빅 스타일로 붙여진 가사로 이루어진 prosulae, 더 가능성이 높은것은 가사/음악이 동시에 만들어진 창작 성가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시퀀스는 일찌기특정 전례용 성가에서 분리되면서 독립적인 악곡 형식으로 꽃피기 시작했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그리고 그후까지도 서유럽 전역에서 수백개의 시퀀스가 만들어졌다. 인기있는 시퀀스는 세속음악에 의해 모방되어지거나 용도에 맞게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중세 후기에 시퀀스와 동시대의 반(半)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은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았다. 성악곡과 기악곡이 모두 그러했다.
시퀀스의 형식은 다음과 같은 관습을 따른다. 가사의 각 시절(時節) 바로 뒤에, 정확하게 같은 수의 음절과 같은 패턴의 악센트를 가지는 또 하나의 시절이 계속된다.게다가 이러한 두 개의 시절은 같은 선율로 노래불려지므로 두 번째 선율은 천번째 선율의 반복이 된다. 첫번째 시구와 마지막 시구만은 예외로서 대체로 대구(parallels)가 없다. 한 쌍의 시절은 그 길이가 같지만 다음 한 쌍의 길이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이리하여 전형적인 시퀀스의 패턴은 a bb cc dd.......n과 같이 나타날것이다. bb cc dd...는 무한히 많을 수 있는 시절의 쌍들을 나타내고 a와 n은 짝지어지지 않은 시행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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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사의 기원에 관한 노커 발불루스의 기록 ■

 

그 위대한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높은 성직의 영예에 오르신 Vervelli 주교 Eusebius의 적절한 게승자이신 거룩한 Columbanus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자 그 원칙의 옹호자이신, 영광스런 샤를 대제의 제1목사이신 리웃워드에게 성 갈렌의 보잘것 없는 수도승 노카로부터 제가 아직 어려을때 기억에 의존하는 매우 긴 선율을 제 나쁜 머리로는 외울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하면 이 선율들을 제 머리에 꽉잡아 둘수있을지 궁리하였습니다. 그러는동안 Jumiege로부터 한 사제가 도착했는데 그는 안티폰 중 몇 시행을 시퀀스에 붙인 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는 매우 손상되어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곡을 면밀히 검토해보던 저는 처음보았을 때의 기쁨만큼 매우 실망하지 않을수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를 모방하여 「Laudes Deo concinat orbis universus, qui gratis est redemptus와 Coluber adae deceptor」을 쓰기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들을 저의 스승 1so에게 가져가보이자 그는 제 근면함을 칭찬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숙함을 나무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율의 각 진행에 각각의 음절이 붙어야한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ia' 'le' 'lu'밑에 오는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어려웠지만 후에 연습을 통해 쉽게 고칠수있었습니다. 예를들자면 'Dominus in Sina'와 'Mater'들이 있습니다. 이런방식으로 저는 곧 제 두번째 작품인〈Psallat ecclesia mater illibata〉를 작곡했습니다. 제 보잘것 없는 작품들을 스승 마르첼루스에게 보였더니 그는 크게 기꺼워하시며 이를 필사하시고 또 소년들에게 불러보라 하셨습니다. 그는 내게 이들을 책으로 모아 저명 인사들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부끄러워졌고 과연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리차드 크로커 「The Early Medieval Seqoence,(버클리 로스엔젤레스, 런던 :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 1977) p.1 (c):1977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중에서 노커 발불루스의 「Liber hymamonum」(Book of Hymns)번역

 


       ■ NAWM 5 부활절 장엄미시를 위한 시퀀스:Victimaepaschali laudes ■ 


이 유명한 시퀀스〈유월절의 희생에 찬미를 드리세〉는 현대의 표준 성가집에 남아있는 다섯개 중 하나이다. 이곡은 11세기 초반 헨리3세의 목사인 비포(Wipo)의 작품으로추정된다. 이 곡을 살펴보면 하쌍의 절들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시퀀스의 형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또한 유사한 종지를 가진 악절들을 써서 서로 다른 선율부분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기법도 살펴 볼 수가 있다. 11세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퀀스의 시작에는 짝지워지지 않은 가사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끝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괄호로 표시된 6절은 현대 성가집에는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퀀스의 형식은 정규적인 패턴에 들어맞게 된다.

 

12세기 성 빅토르의 아당(Adam of St. Victor)이 작곡한 prosae(이 용어는 운문가사도 포옹하게 되었다)는 그 후의 발전상을 보여주는데 그 가사가 규칙적인 운문으로 지어졌다. 그 후의 각운이 붙은 시퀀스들은 찬미가의 형식에 가까운 것이 몇몇있다.첼라노의 토마스(Thoma of Celano,13세기초)작품으로 잘 알려져있는〈진노의 날-Dies irae〉을 예로 들수있다. 이 작품은 찬미가의선율이 다음 절들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AA BB CC형의 선율을 두 번 (두번째는 끝부분이 달라지긴해도)반복한다. 대부분의 시퀀스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전례개혁으로 인해 카톨릭 예배에서 폐지되었는데 사용이 허용되었던것은 단지 4곡 뿐이다. 부활절의〈Victimae paschali laudes〉와 성령강림 주일의〈오소서 성령이여-Veni Sante Spirtus〉와 성체주일에 부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작곡의〈시온이여 찬양하라-Lauda Sion〉, 그리고〈진노의 날-Dies irae〉이다. 다섯번째 시퀀스인〈Sutabat Mater-십자가 곁에 서계신 성모〉(이것은 13세기 프랑시스코회의 수사인 야코포 다토디가 썼다고 한다)는 1727년 전례에 추가되었다.


전례극 : 가장 오래된 전례극 중 하나는 부활주일 미사의 입당송 앞에 나오는 10세기의 대화 혹은 트로푸스에 기초를 둔다. 몇몇 사본을 보면 이것은 콜렉타 즉 신자들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길때의 행진을 포함하는 미사 앞의 의식중 한 항목으로 나타나있다. 다른 사본들에는 부활절의 입당송 Resurrexi 앞이나 크리스마스의 세 번째 미사인 Puer natus est nobis(NAWM 6)의 입당송 앞에 나오는 서문적 트로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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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y - Yellow Dancers - Unknowned ●

 

 

                        ■ NAWM 6 Quem quaeritis in praesepe ■


이곡은 Quem quaeritis 트로프의 성탄절용 버젼(version)이라할수있다. 산파들은 구유를 뒤지는 양치기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한다. 첫번째 양치기는 천사가 예언한대로 강보에 쌓인 아기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ㄴ노라고 대답한다. 두번째 양치기가, 그는 동정녀에게서 나셨다고 설명한다. 세 번째 양치기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확인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이 대화 중에는 뚜렷한 선율 반복이 상당수 들어있다. 첫번째 응답('Respondent'라고 표시된)은 대사를 지속하기 위해 5도 위에서 끝맺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산파들의 노래와 유사하다. 그 이전의 악구들은 모두 G-A-G-F-G의 똑같은 종지형으로 맺는다. 그렇지만 첫번째 양치기의 대사중 마지막 부분 "Sermonem angelicum"에는 새로운 종지형이 도입되고 이것은 두번째 응창의 끝부분 "Isaias dixerat propheta" 부분과 세번째 응창의 "propheta dicentes"에서도 반복된다. 이 음형의 마지막 네 음은 두 번째 응창의 끝부분 "natus est"에서도 사용된다. 여러명의 등장 인물들이 노래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율 반복이 음악을 통일시켜준다.


부활절 대화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는 세 사람의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다. 천사가 그들에게 "무덤에서 누구를 찾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들이 천사에게 "나자렛 예수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천사는 "그는 여기에 계시지않습니다. 그는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가서 그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하시오" 라고 말한다.(마가복음 16:5-7) 당대의 기록은 이러한 대화가 응창식으로 불렀으며 노래에 적절한 극적 동작이 곁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이 대화 형식은 성탄절 입당송에도 적용되었다. 이 성탄절 입당송에서 그리스도 탄생시의 산파들은 아기를 아기를 경배하러온 양치기에게 질문한다. 부활절과 성탄절의 전례극은 가장 널리 유행하였으며 전 유럽에서 공연되었다. 12세기와그 이후의 몇몇 다른 전례극이 남아있다. 이들은 매우 복잡하고 특히 현대 연주를 위한 재료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있다. 이들 중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13세기 초기의 보배에서 유래한 다니엘 이야기(Play of Daniel)와 순진한 아이들을 무참히 학살한 플뢰리에서 유래한 해롯왕의 이야기(Play of Herod)였다. 이 전례극들은 많은 성가를 행렬과 연기를 곁들여 연결시킨것으로서 연극과 유사한 것이었지만 연극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몇 전례극들의 주서(rubric)를 보면 무대, 장면, 의상, 그리고 성직자 배우들이 쓰였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야말로 의전 가사에 대한 최고의 장식이었고 그를 보완하는 표현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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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u e m q u a r t i s in ptesepe ●

 

                                          남아있는 가장오래된 성탄절 극적트로프인 Quem quaeritis

                                          in ptaesepe. 리모주의 성 마르샬의 트로퍼(troper..역주 :

                                          트로푸스를 모아놓은전례서)에들어있다.(paris, Bibliothe

                                          que nationale, M S 1 1 1 8.f o l.8v) N A W M 6 참조

 


                                   ■ 중세음악의 이론과 실제 ■

 

카롤링거 왕조의 중세 후기의 논문들은 고대와 고대 말기, 그리고 초기 기독교시대의 논문들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물론 보에티우스가 음계형성의 기초, 음전과 협화음에 대한 숙고 등의 음악의 수학적인 기초에 관련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이 저서가 기보 독보 분류, 성가의 노래법, 오르가눔과 다른 초기 다성 음악들은 즉흥연주하고 작곡하는 법 등의 직접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이제 이러한 문제들이 논문의 주요 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예를들어 귀도 다레초(Guido of Arezzo)가 쓴 미크롤로구스(Micrologus. 대략1025-28)는 음정의 수적 비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보에티우스의 설명을 빌어오고있다. 귀도는 대장간의 망치소리에서 음정 관계를 발견하는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고 보에티우스의 방식으로 모노코드를 나누는 데에 이 비율을 적용한다. 모노코드는 긴 나무 울림통의 양끝에 있는 두개의 고정된 브리지 위에 걸쳐진 하나의 현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는 현이 울리는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움직이는 브리지가 있다. 그러나 보에티우스의 체계를 설명한 후 귀도는 똑같은 온음계를 만들 수 있는 더 손쉬운 방법을 소개하고있다. 즉, 옥타브뿐 아니라 완전4도와 5도를 조율하고 9:8 비율의 온음을 조율하는 것이다. 귀도는 그리스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테트라코드에 기초하지 않은 음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고대의 토노이(tonoi)혹은 아르모니아니(harmoniani)와는 관계없는 일련의선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 선법들의 특징과 효력, 그리고 그 틀안에서 선율을 고안하는 법, 두 개 이상의 성부를 동시에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간단히 할 수 있는가를 공들여 가르치고있다. 귀도는 이러한 다이아포니(diaphony)혹은 오르가눔(organum)에 대한 몇 가지 모델을 9세기 익명의 작가가 쓴 무지카 엔키리아디스(Musica enchiriadis)라는 논문에서 발견하였다. 무지카 엔키리아디스와 같은 논문, 혹은 스승과 학생간의 대화인「스콜리카 엔키리아디스-Scolica enchiriadis」등은 성직자가 되려고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책들이었다. 수도원과 성당 교회 부속 학교들은 종교적인 의도뿐 아니라 교육적인 의도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수도원에서의 음악교육은 주로 실제적인 것이었으며 초보적 수준의 비음악적인 주제들이 간간이 들어있었다. 성당 학교들은 사색적인 연구에 더 초점을 두었고 13세기 초부터 대학을 가려는 학생들을 교육했던 것은 주로 이런 학교들이었다.그러나 중세의 대부분의 정규적인 교육은 실제적인 문제를 지향하였고 대부분의 음악 논문들은 이러한 태도를 반영해준다. 그 저자들은 서장이나 2장에서 보에티우스에 대한 상당한 경외심을 보여주고 난 후, 마음놓고 더욱 시급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러한 교육서 몇몇은 시로 되어있으며 다른 책들은 이상하리만치 열성적인 학생과 전지적인 스승간의 대화로 이우어져있기도 하다. 이것은 기억을 강조했던 구전적인 교육방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해나 도표 등으로 된 시각적인 보조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음정을 노래하는 법 성가 암기법 등을 배웠으며 나중에 초견으로 음표를 읽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 요소 중 하나는 중세 이론가들의 용어를 빌자면 8개의 선법 또는 tones의 체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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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 u i d o d'Arezzo et Theobaldus d'Arezzo ● 

 

                                     음계들의 선 길이를 계산하고있는'귀도 다래초(Guido d'Arezzo)와

                                     그의 후원자 테오발두스 다래초(Theobaldus d'Arezzo)주교.귀도는

                                     주교에게 그의 Micrologus를 헌정했는데 이논문에서 보에티우스를

                                     통해 전해내려오는 모노코드 분할법보다 더 간단한 분할법을 제안

                                     하였다.(12세기 독일 사본)

 


교회 선법 : 중세 선법체계는 서서히 발전했기 때문에 모든 단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11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그 완전한 형태를 보면 종지음(finalis) 위에 이루어진 온음계적 옥타브에서 온음과 반음의위치에 따라 구분되는 여덟 가지의 선법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로 종지음은 보통 - 변하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 선율의 마지막이었다. 선법은 숫자로 표시되고 한 쌍씩 분류되었다. 홀수번호의 선법은 정격('본래의'-authentic)이라 불렀고 짝수번호의 선법은 변격('파생된' - plagal)이러고 불렀다. 변격선법은 그것과 쌍을 이루는 정격선법과 동일한 종지음을 갖는다. 정격선법의 음계는 D음(제1선법), E음(제3선법), F음(제5선법), 그리고 G음(제7선법)으로부터 올라가는 흰건반만으로 된 옥타브 음계로 표시되었다. 변격선법은 정격선법의 4도 아래이다.(예2.6) 그러나 이러한 음표가 특정한 '절대적인' 음고 - 그레고리오 성가와 중세에는 낯선 개념 - 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임시표를 최소한도로 쓰면서 음정패턴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선택된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각 선법의 종지음은 (예2.60에 표시되어 있다. 각 선법에는 종지음 말고도 tenor(시편선법에서와 같은 67면참조) 또는 낭송음(repercussion reciting tone 예2.6에 온음표로 표시됨)이라 불려지는 제2의 특징적인 음이있다. 상응하는 변격 선법과 정격 선법의 종지음은 같지만 tenor는 다르다. tenor를 확인하는 쉬운 방법은 다음의 사항들을 기억하는것이다. 1) 정격선법에서 tenor가 종지음의 5도 위에 있다. 2) 변격선법에서는 tenor가 상응하는 정격선법의 tenor보다 3도 아래에 있다. 3) tenor가 B음 위에 있을때는 언제나 C음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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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 세 시 대 의 교 회 선 법 ●

 


종지음과 tenor, 그리고 그 음역은 한 선법을 특징지운다. 변격선법은 연관된 정격선법과는 다른 테너의 음역을 갖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정격선법의 모든 음역은 종지음 위에 있는 반면, 변격선법에서는 종지음이 이 옥타브의 최저음으로부터 네 번째 음이 된다. 따라서 제1선법과 제8선법은 그 음역이 같지만 종지음과 tenor가 다르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격선법의 성가는 종지음보다 한음 아래까지 내려가며 변격선법의 성가는 변격옥타브 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기보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변화음은 Bb뿐이다. 일정한 조건 아래서 B음은 제1선법과 제2선법에서 반음 내리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제5선법과 제6선법에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만일 항상 이렇게 된다면 이 선법들은 각각 근대의 '자연단음계' '장음계'와 완전히 같게 된다. 물론 어떤 선법의 선율이 조옮김 될때는 임시표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서 제1선법의 성가가 G음 위에서 씌어진다면 내림표가 하나 붙을 필요가 있었다. 선법들은 성가를 분류하고 의전적인 용도의 책에서 성가들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선법들의 이론이 나오기 이전에도 많은 성가들은 존재하였다. 성가 중 몇가지는 종지음의 5도 위와 한 음 아래까지의 음역 안에 완전히 포함된다. 다른 성가는 옥타브 전체음역을 사용하여 상하 양쪽 방향으로 한음씩 초과하는 경우도 있다. 또 시퀀스<Victimae Paschalilaudes(NAWM 5)>와 같이 정격선법과 그 상응하는 변격선법을 조합한 음역 전체에 걸쳐있는 것도 있다. 어떤 성가는 각기 다른 종지음을 갖는 두 선법의 특징을 모두 갖고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성가는 어느 한가지 선법에 의한다고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요컨대 이론과 실제는 어느시대 어떤 형태의 실제 음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세선법에 의한 선율의 경우에도 그렇게 꼭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10세기의 몇몇 이론가들은 교회선법의 체계를 고대 그리스의 토노이, 아르모니아와 결부시키려하였다. 보에티우스를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A옥타브를 하이포도리안(Hypodorian), B옥타브를 하이포프리지안(Hypophrigian)등으로 잘못 명명하게 되었다. 사실 이 두 체계는 전혀 닮지도 않은데 말이다. 중세의 이론서나 오늘날의 전례서는 숫자로 분류법을 표시하기에 그리스식 명칭을 쓰지는 않지만 아직도 일반적으로 특히 대위법과 분석에 관한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종족적인 명칭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와같이 제1선법과 제2선법은 오늘날 간혹 도리아(Dorian)와 하이포도리아(Hypodorian) 그리고 제3선법과 제4선법은 프리지아(Pyrigia)와 하이포프리지아(Hypophrigia), 제5선법과 제6선법은 리디아(Lydia)와 하이포리디아(Hypolydia)로, 그리고 제7선법과 제8선법은 믹솔리디아(Mixolydia)와 하이포믹솔리디아(Hypomixolydia)로 불려지고 있다. 중세이론에는 왜 a, b와 c'음 위의 선법이 없었을까? 그 원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일 d, c 그리고 f음 위의 선법에서 b음을 반음 내려(합법적으로 사용가능한)노래한다면 이 세 개의 선법은 각각 a, b, 그리고 c'음 위의 선법과 같게 되며 결과적으러 이 세개의 선법이 필요없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조와 장조에 대응하는 a와 c음 위의 선법은 16세기 중엽 이후에야 이론적으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즉, 1547년 스위스의 이론가인 글라레아누스(Glarean)가 원래의 여덟개 선법에 a음 위의 선법 두개와 c음 위의 선법 두개를 더함으로서 12개의 선법체계를 세운것이다. 이 네 개의 선법은 에올리아(Aeolia)와 히포에올리아(Hypoaeolia), 그리고 이오니아(Ionia)와 히포이오니아(Hypoionia)라고 불렀다. 그 후의 이론가 중에는 b음 위의 '로크리아(Locrian)' 선법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것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1세기의 수사인 귀도 다레초는 시창을 가르치는 방법으로서가수들이 G나 C음 위의 온음과 반음으로 구성된 여섯음의 패턴을 외우는 것을 돕기 위해서 ut, re, mi, fa, sol, la의 음절 체계를 고안해내었다. C-D-E-F-G-A와 같은 이러한 패턴에서 반음은 제3음과 제4음 사이에 놓여지며 다른 모든 음은 온음이다. 귀도 다레초가 이 패턴을 표시하기 위해 음들에 붙인 음절들은 찬미가<당신의 종달이-Ut queant laxis 800년에 이미존재함>에서 빌어온 것이다. 이 찬미가의 여섯개의 악구는 이 패턴의 여섯음으로 - 게다가 하나씩 상행 순서대로 - 시작한다. 즉, 첫번째 악구는 C에서, 두번째 악구는 D에서 등등으로 시작하는 것이다.(예2.7참조) 따라서 각 악구의 시작 부분은 가사의 첫 음절들인 ut, re, mi, fa, sol, la가 이 단계의 이름이 되었다. 이 계명창의 음절들(소위 sol, mi라고불리는)은 여전히 교육에서 사용되고 있다. ut를 do라고하고9프랑스 음악가들은 여전히 ut로 부르지만) la 위에 ti(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si)를 첨가하게 된것은 달라졌다. 이 6음 패턴의 장점은 항상 mi-fa에만 반음이 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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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이후로 이 6음 계명창법은 헥사코드(Hexachord)의 체제로 발전하였다. 이 헥사코드 또는 6음음계는 음계의 여러곳에서 발견될 수 있어었다. 즉, C음과 G음 혹은(B음을 반음 내림으로서) F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그것이다. G음 위의 헥사코드는 B내추럴을 사용했는데, 그 기호는 b즉 '4각의 b(b quadrum)'였다. 그리고 F음의 헥사코드는 Bb을 사용했고 그 기호는 b 즉, '둥근 b(b rotundum)'였다. 이 기호들이 분명히 우리가 쓰는 □내추럴, #, 그리고 b에 해당하는 모델이라 하더라도 그 원래의 목적은 오늘날의 임시표와는 달랐으며 원래부터 mi와 fa음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B음의 사각형은 '딱딱한'이라고 불려졌고 둥근형은 '부드러운'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G음과 F음의 헥사코드는 각기 '딱딱한(durum)' 헥사코드와 '부드러운(molle)'헥사코드라고 했다. C음 위의 것은 '자연스러운' 헥사코드라고 했다. 중세의 작곡가들이 사용했고 또 중세의 이론가들이 관심을 보였던 음역은 G음(그리스 문자로는 I`표시하고 감마-gamma라고 불렀다)에서부터 e'에 이르기까지 넓혀져있었다 이 음역 안에서의 모든 음은 문자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것이 속한 하나 또는 여러개의 헥사코드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서도 이름붙여졌다.(여기서 오늘날의 gamut-음계, 음역-란 말이 나온다) 따라서 헥사코드의 첫음인 감마는 gamma ut이라고 불리웠다. 헥사코드의 최상음인 e"음은 e la였다. 세개의 다른 헥사코드에 속해있는 가운데 c'음은 c sol fa ut(예2.8참조)였다. 그리스의 음이름과 중세의 음이름은 모두 이론가들에 의해 16세기까지 남아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중세의 음이름만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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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사코드(H e x a c h o r d)의 체계 ●

 

 

6음의 음역을 초과하는 어떤 선율을 배우기 위해서는 한 헥사코드에서 다른 헥사코드로의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이것은 즉, 어떤 한 음이 한 헥사코드안에 있는것과 같이 여겨지고, 또 다른 헥사코드에서는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근대 화성에서의 측화음(pivot chord0과 같은 변성(mutation)이라는 과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를들면 키리에<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Cunctipotens Gnitor Deus>(예 2'9)에서 다섯번째 음인 a는 C헥사코드에서 라(la)처럼 취해지고 G헥사코드에서 레(re)로 벗어난다. 반대의 변성(mutation)이 다음 악구의 세번째 a음에서 일어난다. 특별한 교육적 수단으로는 소위 귀도의 손이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오른쪽 집게 손가락으로 펴들은 왼손 손바닥의 각 관절을 지적할 때 음정을 잡아 노래하도록 배웠다. 각각의 관절은 20음을 가진 이 체계의 각 음에 해당된다. 그러나 F#과 Eb같은 다른 음들은 손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음악 교과서에는 반드시 이 '귀도의 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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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 u i d o d'A r e z z o's H a n d ●

 

                                          귀도의 손은 온음계에서 음고를 찾기위한 기억수단인데

                                          특히 네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의 네구석에 있는 
                                          mi-fa반음을 찾는데 유용하였다. 귀도가 발명한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그의 계명창법 적용을위해 후대에고안된듯. 

                                         

 

기보법 : 중세 이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또 하나의 과제는 적당한 기보법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성가가 구전으로 전수되었고 전통적인 선율에 가사를 붙이는데 있어서 어느정도의 자유가 허용되는 한 선율의 일반적인 윤곽을 상기시킬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9세기 중엽 이전부터 쓰기 시작한 기호인 네우마는 상행선율선(/), 하행선율선(\)또는 두가지를 합한것(∧)을 표시하기 위해 가사위에 쓰여졌다. 이러한 네우마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사용되고 있는것 같은 문법적인 악센트 기호에서 나왔을것이다. 결국 선율을 기보하는 더욱 정확한 방법이 요구되었고 10세기경에는 사보가들이 선율의 진행을 더욱 정확하게 가리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다른 높이의 네우마를 가사를 적었다. 이러한 것을 '음높이 네우마 (heighted 혹은 diastematic neumes)'라 부른다. 때로는 네우마 내의 개별적인 음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또 네우마가 표시하고 있는 음정을 더 명확히하기 위하여 선에 점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결정적인 진전은 한 필사가 f음을 나타내는 붉은 선을 수평으로 긋고 이 선의 주위에 네우마를 표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곧 c'음을 표시하기 위해서 보통 노란색으로 두 번째 선을 그려넣었다. 11세기까지 귀도 다레초는 그 당시 사용되던 4선 보표를 그려서 그 위에 f음과 c'음을 그리고 때로는 g'음의 선을 가리키는 문자를 써넣었고 이 문자들은 마침내 우리가 쓰는 오늘날의 음자리표가 되었다.이 보표를 창안해 냄으로써 선율의 상대적인 음높이를 정확하게 기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음악은 지금까지의 구전에 의한 전수에 의존하지않게 되었다. 이것은 글쓰기의 창안이 언어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것처럼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네우마의 보표 기보법은 아직도 불완전하였다. 이것은 음고를 표기할 수는 있어도 그 음들의 상대적 시가를 나타내지는 못했다. 리듬을 나타내는 기호는 많은 중세의 사본에 들어있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동의할 수 없었다. 단지 서로 다른 형태의 음표는 다른 길이의 음을 가리켰으며 9세기초 이후로 성가를 노래할 때 명확히 길고 짧은 음가가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창법은 12세기 이후에는 쓰이지 않은것 같다. 오늘날에는 성가의 모든 음표가 같은 기본적 시가를 갖고있는 듯이 취급한다. 음표는 리드미컬하게 둘이나 세 군으로 나뉘고 이러한 군은 차례로 더 큰 리듬 단위와 유연하게 결합된다. 이러한 해석방법은 솔렘 수도원의 베네딕트와 수사들이 앙드레 모케로의 지도아래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카톨릭 교회는 전례의 정신에 부합된다고 해서 이것을 채용하였다. 오늘날 전례서의 솔렘판은 역사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지닌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사본에는 없는 설명기호가 많이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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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도식(G u i d o d'A r e z z o)의 기보법 ●

 

                                         귀도식의 기보법 색갈보표선을 사용하여(노란선은 'C'를

                                         빨간선은 'F'를 나타내었다) 정확한 음고를 표기하였고

                                         새로운 선율의 시창을 용이하게하였다. 왼쪽 여백에있는

                                         문자 기호로부터 후대의 음자리표가 발전되었다. 

                                         (Munchi, Byerische S t a a t s b i b l i o t h e k)

 


                             ■ 비전례적이고 세속적인 단상음악 ■

 

초기 세속음악 형식들 : 세속음악 중 지금까지 보존되어있는 가장 오래된 예는 라틴어 가사가 붙은 노래이다. 이러한 형식중에서도 가장 오랜 것은 11세기와 12세기의 골리아드 노래(Goliard songs)의 레퍼토리이다. 골리아드 - 신화적인 후원자인 골리아드 주교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는것같다. - 들은 곳곳에 커다란 대학이 세워지기 전,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옮겨다녔던 학생, 또는 소속된 곳이 없는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의 방랑적인 생활방식은 지위높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의 노래에서 찬양되엇고 많은 사본집(manuscript collrction)들이 그것을 그것을 내용으로하여 만들어졌다. 가사의 주제는 주로 젊은 남성들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영원한 삼위일체인 술과 여자와 풍자에서 따왔다. 취급방법은 때로는 섬세하나 때로는 그렇지 않았다. 도 그 정신은 매우 예리하고도 비형식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카를 오르프(Carl Orff)의 현대적으로 작곡된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를 들을 때면 쉽게 느낄 수 있을것이다. 사본에는 골리아드 음악의 원형이 조금밖에 기보되어있지않은, 그것도 보표가 없는 네우마에 의한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정확한 기보법에 의한 어떤 다른 원천안(source)에 선율이 보종되어있지 않는 한, 현대적인 기보법으로 옮겨쓰는것은  추측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11세기부터 13세기에 씌어진 다른 종류의 단성노래는 콘둑투스(conductus)이다. 콘둑투스는 중세의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사이의 한계선이 얼마나 모호했는가를 뚜렷하게 예증하고있다. 이 곡은 원래 전례극에서의 사제 또는 미사나 다른 예배에서의 집전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인도되는(conduct)'때에 부려졌을 것이다. 그 가사는 동시대의 시퀀스 가사처럼 박절적인 시행이다. 그러나 전례와는 거의 관련이 없기때문에 12세기말까지 '콘둑투스'라는 용어는 종교적인 주제이건 간에 박절적가사를가지는 일반적으로 엄숙한 성격의 모든 비전례적 라틴어 노래에 사용되었다. 콘둑투스의 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그 선율이 대체로 그레고리오 성가나 그밖의 다른 곡에서 빌어왔거나 응용한 것이 아니라 새로이 작곡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세속적인 정신의 특징적인 면모는, 물론 자국어 가사에 의한 노래에서 가장 명백히 드러난다. 자국어 가사를 지닌 노래 가운데 가장 일찍 알려진 유형중 하나는 무훈(武勳)의 노래 '샹송 드 제스트(chansong de geste)'로서 민족 영웅들의 행위를 자세히 말하는 서사시적 설화시(epic narrative poem)이다. 이것은 몇 가지의 단순한 선율형으로 불려졌으며 그중 하나의 선율형이 시의 긴 부분을 통틀어 각 행의 변화되지 않은 채 씌어질 수도있었다. 이 시는 구전으로 전수되었고 비교적 후기에까지 성문화되지 못했으며 사실상 음악은 전혀 보존되지 않았다. '샹송 드 제스트' 중 가장 유명한것은 프랑스의 민족 서사시인 <롤랑의 노래-Sons of Roland>로서 관계되는 사건은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 일어났지만 11세기 후반경에 생겨난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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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글뢰르(Jongleurs) ■


종글뢰르 : 중세에 샹송 드 제스트와 그밖의 다른 세속적인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은 10세기경에 처음으로 나타난 직업적인 음악가들의 계급인 종글뢰르(jongleurs)혹은 민스트럴(menestrels)이었다. 그들은 한사람씩 혹은 작은 무리를 지어서 이 마을 저 마을. 이 성 저 성을 방랑하며, 노래나 연주 또는 요술이나 곡예를 하거나 또는 훈련받은 동물들을 전시하면서 불아정한 생활을하던 때때로 법적인 보호와 교회의 성사(역주 : 카톨릭 교회의 일곱가지 성사를 말함)를 거부당한 사회적 봉건적으로 매장당한 사람들이었다. 11.12세기 유럽의 경제적인 회복과 함께 사회가 봉건적인 기초 위에서 더욱 안정적으로 조직되고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여건도 개선되었다. 물론 사람들이 매력과 혐오감이 뒤섞인 기분으로 그들을 보지않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그들에 대해 "제혜롭지는 않지만 놀라운 기억력을 지니고 매우 근면하며 지나치게 뻔뻔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였다. 11세기에 그들은 조합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콘서바토리9conservatory)와 직업적 교육을 시키는 음악가들의 길드(guild)로 발전하였다. 한 부류로서 '민스트럴'은 정확한 의미에서 시인도 작곡가도 아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다른 사람들이 지은 노래나 유행하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노래를 변형시키기도 하고 혹은 자신들의 것으로 새롭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들의 직업인다운 전통과 기술은 서부유럽의 세속음악 - 오늘날 일반적으로 트루바두르와 트르베르의 음악으로 알려져있는 노래들 - 이 발전 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 트루바드루와 트루베르(troubadour - trouvere) ■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는 같은 뜻으로, 발견자들 또는 발명자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트루바두루(troubadour, 여성-trobairitz)는 프랑스 남부에서 사용된 용어이며 트루베르(trouvere)는 북부에서 쓴 용어이다. 중세에 이단어들은 무엇인가를 쓰거나 작곡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적용된것같다. 그러므로 음악가들의 특정한 두 부류에 이 단어를 국한시키는 오늘날의 용법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정확하지 못하다. 트루바두르는 오늘날 프랑스 남부에 해당되는 지역인 프로방스 지방에 많았던 시인겸 작곡가였다. 그들은 랑그 독(langue d'oc), 즉 프로방스어로 작품을 썼다. 그들의 예술은 이웃한 이베리아(역주 : 스페인의 옛이름)반도의 스페인-무어족의 문화로부터 그 창조적인 영감을 받아 빠르게 북쪽, 특히 상파뉴와 아르투아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곳에서 13세기 내내 활동적이었던 트루베르는 오늘날 프랑스어가 된 중세 프랑스의 방언이었던 랑그 도일(langue d'oil)로 작품을 썼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모두 어떤 뚜렷한 사회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그들의 예술은 일반적으로 귀족적인 사회(거기에는 왕들도 끼어있었다)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낮은 가문출신의 예술가는 그의 재능으로 더 높은 상류 계급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 겸 작곡가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노래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르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음유 시인에게 연주를 위임할 수도 있었다. 만약 현존하는 곡들이 각 사본마다 다르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사보가들이 사보했다는 것일 수도 있고 기계적으로 암기하여 배운 후 그것을 자신들의 고유한 방법으로 다루었을 음유시인들이 만들어낸 '같은' 노래의 갖가지 변형들일 수도 있다. 음악이 기보되기 전 얼마동안 구전으로 전수될때 마다 생겨낫듯이말이다. 그 노래들은 샹송 모음집(chansonniers)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몇 곡은 현대 악보와 영인본으로 출판되었다. 전부 합하여 트루바드루의 것으로는 약 2600편의 시와 약 260편 이상의 선율이 남아있고 트루베르의 것으로는 2130편의 시와 1420편의 선율이 남아있다. 트루바드루와 트루베르의 시와 음악의 본질은 종종 깊이가 없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구조는 상당한 다양성과 창의성을 보여주고있다. 단순한 발라드와 극적 양식의 발라드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둘 또는 그 이상의 등장인물을 요구하거나 암시하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극적 양식의 발라드에는 몸짓을 해가면서 연주하도록 만들어진것이 몇 개 있으며 많은것들이 분명히 무용을 곁들이도록 되어있다. 적어도 더 오래된 예에는 합창단이 불렀음이 분명한 반복구가 간혹있다. 더불어 특히 남부에서 그들은 사랑의 노래를 작곡하였는데 이것은 트루바두르 노래의 뛰어난 주제였다. 정치적 윤리적인 주제를 다룬 노래도 있었고 가사나 궁중의 사랑에 관계된 난해한 논점에 대한 토론이나 논쟁을 다룬 노래도있었다. 종교적인 노래는 북부 특유의 것인데 13세기말이 되어서야 나타난다. 이러한 일반적인 노래 유형들은 각각 많은 하위 유형들을 갖고 있었는데 모두 주제와 형식 그리고 처리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관례를 따랐다.. 인기있던 유형의 하나는 극적인 발라드의 일종인 파스투렐(pastourelle)이었다. 파스투렐의 가사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다. 한 사람의 기사가 양치기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처년는 대개 저항하지만 결국 굴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치기 소녀가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한다. 그녀의 형제나 연인이 달려와 쫓아내버린다. 초기의 파스투렐은 모든 화법이 독백으로 되어있었다. 기사와 양치기 처녀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가사로 만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런 단계였다. 후에 이 대화는 연기를 하면서 노래불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한 두개의 삽입곡이 추가되고 구출해주는 목동이 한 무리의농부들과 함께 나타나며 연주가 노래와 무용으로 장식되면 그것이 바로 조그만 음악극이 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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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d a m de la H a l l e' 의 초상 ●

 

                                           <아라스의 샹송곡집-Chansonnier d'Arras> 미니어처에

                                           들어있는 '아당 드 라알(Adam de la Halle)'의 초상. 이

                                           책에는 그의 샹송 여섯곡이 수록되어있다. 그림설명에는

                                           "Adans li bocus가 이 노래들을 만들었다"라고씌여있다.

                                           그의 가족은 아라스 출신인데 'le Bossu(곱사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Arras, Bibliotheteque munincipale)

 


파스투렐과 다른 발라드 노래들은 민족적 소재를 귀족적으로 적용한 것들이었다. 반대로 프로방스어로 된 사랑의 노래는 처음부터 귀족적이었다. 많은 노래들은 노골적으로 관능적인 것이었으나 다른 것들은 육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신비적인 정렬로 표현되는 '궁중적인'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관능적인 면을 감추고있는 것도있었다. 확실히 그 대상은 실제의 여성이었으며 대체로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 여인은 멀리서 신중함과 존경, 겸허 - 따라서 그녀의 연인은 그의 모든 열망의 대상인 '이상적 사랑'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만족해하는 숭베자에 가까웠다. - 로서 사모되었다.그녀가 진실한 연인의 사랑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응대해 주는것이 품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될 정도로 그녀 자신은 멀리 떨어져 있고 조용하며 고결하고 잡근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모든 사건은 상당히 추상적이며 주된 흥미거리는 상황의 지적인 미묘함에 있다. 동정녀 마리아를 찬미하는 트루베르 노래가 현세적인 사랑을 찬양하는데 쓰이는 것과 같은 양식이나 어법, 그리고 때로는 같은 선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깊은 일이다.

 

 

                          ■ 트루바드루와 트루베르의 선율기법들 ■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선율 기법들 :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 노래에는 경우에 따라 짧은 멜리스마가 덧붙기도 하지만 대체로 실래빅한 선율이 붙여졌다. 대개는 <Can vei, NAWM 7>에서 처럼 한 행의 끝에서 두 번째 음절에 멜리스마가 붙었다. 물론 연주할 때 선율적 장식이 첨가될 수도, 한 절에서 다른 절로 넘어갈 때 선율이 바뀔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선율 - 한 절에서 다른 절로 넘어가면서 가수가 즉흥연주를 한 - 의 예로는 12세기의 여성 트루바두르인 Comtessa de Dia의 <A chantar, NAWM 8>을 들 수 있다. 음역은 좁아서 흔히 6도를 넘지 않았으며 한 옥타브를 넘는 일은 거의 없다. 선법은 주로 제1선법과 제7선법이 각각의 변격선법과 함께 쓰인것 같다. 선법의 몇몇 음들은 오늘날의 장.단조에 상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방식으로 가수들에 의해 반음계적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노래의 리듬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것들이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선율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들 모두 음표의 상대적인 시가를 표시하지 않는 방법으로 기보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들이 그 기보법이 암시하는 바와같이 자유롭고 박자없는 리듬으로 불려졌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노래에 매우 규칙적인 리듬이 있으며 가사음절의 악센트 유무에 상응하는 긴 음표와 짧은 음표로 선율에 박자가 생겼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예2.10)의 한 악구에 대한 다섯가지의 다른 현대적 악보를 보면 이점에 관한 의견의 차이를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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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nri Matisse - Les Partineurs ●

 

 

           ■ NAWM 7 베르나르 드 뱅타도른「Can vei la lauzeta mover」■

 

가장 잘 보존된 노래 중 하나는 트루바두르인 '베르나르 드 뱅타도른(Bernart de Ventadorn)'이 작사한 <Can vei 
la lauzeta mover>이다. 8연으로 된 이 노래의 처음 두연은 이런레퍼토리의 주요 주제인 사랑하는 남자의 한탄이다.

 

 

                       Can vei la lauzeta mover           When I see the lark beating its wing

                       de ioi sas alas contral rai,         joyfully aganist the sun's rays,
                       que s'oblid e.s lassa chazer       which then swoons and swoops down
                       per la dousor c'al cor li vai        because of the joy in its heart

                       ai! tan grans enveya m'en ve       oh! I feel such jealously
                       de cui qu'eu veya Jauzion,          for all those who have the joy of love

                       meravilhas ai, car desse           that I am astonished that my heart

                       lo cor de dezirer no.m fon.         does not immediately melit with desire

                       Ai, las! tan cuidava saber         Alas! I thought I knew so much
                       d'amor, e tan petit en sai,         of love, and I know so little; 
                       car eu d'amar no.m posc tener      for I cannot help loving
                       celeis don ia pro non aura.         a lady from whom I shall never obtain any favor

                       Tout m'a mo cor, e tout m'a me,    She has taken away my heart and my self

                       e se mezeis e tot lo mon;           and herself and the whole world;
                       e can sem tolc, nom laisset re     and when she left me, I had nothing left

                       mas dezirer cor volin.              but desire and a yearning heart.

 


이 노래는 유절형식으로 되어있고 마지막 연을 제외하고 나머지 연은 각각 ababcdcd의 각운을 가지는 8행으로 되어있는데 각 행은 8음절로 되어있다. 모든 연에 붙여진 음악은 비록 제7행이 부분적으로 제4행을 반복하긴 하지만 통절형식으로 작곡된 것이다. 선율은 확실히 제1선법에 속하며 제1악구에서는 d에서 a로 제2.3악구에서는 a에서 d'로 상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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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iraut de Bornelh(1173-1220)의 투르바드르선율 ● 

 

                                             Guiraut de Bornelh(1173-1220)의 트루바두르 선율

                                             Reis Glorios, 다섯가지 리듬 해석이 나타나 있다

 


투르베르의 노래에서 악구는 거의 언제나 명확하고 매우 짧으며 3/4박자인 현대 악보로 셋, 넷, 혹은 다섯마디 정도)선율의 윤곽이 뚜렷하다. 투르바두르의 선율은 덜 구획적(sectional)이며 때때로 더 자유로운 자유로운 리듬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투르베르의 노래가 프레이징이 묘미있게 불규칙적인 프랑스의 민요와 흡사한 점이 있는데 반하여 투르바두르의 노래는 리듬형에 있어서 좀더 세련되고 좀더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짧고 구분이 뚜렷한 악구의 반복과 변주 그리고 대조는 자연히 다소 명확한 형식 패턴을 만들어내었다. 트루바두르와 투르베르 선율의 대부분은 자유로운 양식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시작악구나 부분을 반복한다. 그러나 대체로 원래 필사본에 들어있는 선율들은 오늘날의 모음집에 쓰인 명칭들처럼 그렇게 정연히 분류되지 않는다. 그러한 형식적인 명칭은 사실 노래의 시 형식에만 사용될 뿐 음악형식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14세기에 이러한 단성 선율중 몇 가지가 다성 음악곡에 십입되었을 때 발라드와 비를레, 론도의 특징적인 패턴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투르바두르와 투르베르 선율의 대부분은 뚜렷하지 않은 윤곽만을 보여주고 있다. 악구는 반복되면서 달라지고 앞 악구와 어렴풋이닮거나 비슷한 부분들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주된 인상은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확실히 비기교적이다.


대부분의 투르베르 노래에는 반복구(refrain)가 있다. 이들은 가사의 몇 행 또는 몇 쌍의 행들로 그 상응악구 역시 반복되는것이 보통이다. 이 반복구는 중요한 구조적 요소였다. 반복구가 있는 노래는 아마 춤곡에서 발전했을 것이다. 반복구는 원레 춤추는 사람들 전원이 합창으로 부르는 부분이었을지 모른다. 노래가 무용 반주로 더이상 쓰이지않게 된 후, 원래의 반복구가 독창곡 안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투르바두르의 예술은 기사다운 시인 겸 음악가인 미네징거(Minnesinger)들의 독일 악파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들이 미네리트(Minnelieder 연가)에서 노래한 사랑(Minne)투르바두르의 사랑보다 더욱 추상적이었으며 명확히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했다. 그에 따라 음악은 더 건전하였다. 몇몇 선율들은 교회선법으로 되어있었으며, 몇몇은 장조 조성적인 경향을 보였다. 가사의 리듬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노래가 3박자로 불려졌다. 유절형식의 노래 또한 프랑스에서처럼 매우 흔했다. 그러나 선율은 선율적인 악구의반복을 통해 더욱 꽉짜인 조직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 NAWM 10 Wizlau von Rugen, we ich han gedacht ■


비츨라우 폰 뤼겐 왕자의 <We ich han gedcht>를 보면 10행으로 된 각 연을 노래하기 위한 Weise 또는 선율 패턴은 운율구조보다 더 반복적인 음악적 형식을 지녔다.

 

Rhyme         a a b /c c b / d e e d
Melody        A A B / A A B / C A A B

 

대부분의 프랑스 트루바두르 노래는 선율보다 시가 더 고도로 더 조직적이다. 미네징거의 가사중에는 봄철의 찬란함과 신비함을 사랑스러운 것으로 묘사한것, 새벽이 다가오는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연인에게 알려주는 충실한 벗이 부른 새벽의 노래 혹은 파수꾼의 노래(Wachterlieder)도 있다. 프랑스인과 독일인은 모두 종교적인 신앙심을 다룬 노래를 썼는데 그 대부분이 십자군에서 악상을 받은것이다.

 

 

                              ■ 미이스터징거(Meistersinger) ■

 

마이스터징거 : 13세기말경 프랑스에서는 그 이전 시대에서처럼 귀족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양잇는 중류계급에 의해서 트루베르의 예술이 점점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 그리고 16세기가 지나는 동안 독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미네징거의 마지막 계승자들은 독일의 여러 도시에 살고있던 완고한 상인과 직공인들인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였다. 그들의 생활상과 조직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에 잘 묘사되어있다. 오페라의 주인공인 한스 작스는 16세기에 살았던 마이스터징거로서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마이스터징거의 예술중에는 몇몇 걸작이 있긴 하지만 엄격한 규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미네징거의 음악에 비해 딱딱하고 무표정한것으로 보인다. 마이스터징거의 길드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19세기가 되어서 마침내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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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WM 11 한스 작스 Nachdem David war redlich ■

 

작스의 작품 중 몇가지 훌륭한 예가 남아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것 하나가 사무엘상 17절 이하에 나오는 다윗과 사울간의 싸움에 관한 논평이다. 이는 마이스터징거가 계승한 미네리트의 공통적인 형식으로 되어있다. 독일어로 바(Bar)-AAB-라 불리는 이 형식은 같은 선율의 악구 A가 Stollen이라고하는 시절(stanza)의 최초의 두 단위에 대하여 반복되고 압게장(Abgesang)이라고하는 나머지 악구 B는 더 갈며 새로운 선율 소재를 갖는다. 이 형태는 또한 프로방스의 칸초(canzo, 샹송이라는뜻)형식의 기초가 되었으며 칸초와 마찬가지로 Abgesang의 끝부분에서 Stollen악구의 전부 혹은 일부분이 반복되기도 한다. 이것은 <Nachdem David >에도 해당되는 경우로 이 곡에는 Stollen의 전체 선율이 Abgesang의 끝부분에서 반복된다.

 

중세에는 단선율의 세속적인 노래외에 교회에서 사용하려는 의도없이 만들어진 종교적인 노래들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노래는 개인적인 신앙심의 표현으로서 자국어 가사를 가지며 교회성가와 민요에서 반씩 빌려온것으로 보이는 선율적 어법으로 씌어졌다.

다른 나라의 노래들 : 현전하는 13세기의 영국노래 몇 가지는 다양한 분위기를 보여주며 오늘날 재현할 수 있는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음악생활을 암시해준다. 스페인의 알퐁소 엘 사비오(Afonso el Sabio)왕의 지휘하에 1250년에서 1280년에 걸쳐 편찬된 화려한 사본에는 400개 이상의 단성 칸티카(cantiga) 즉, 마리아 찬가가 들어있다. 이노래들은 여러면에서 투르바두르의 음악과 흡사하다. 동시대의 이태리 단선율 음악으로는 라우다(Lauda)가 있었다. 이것은 평신도 단체나 고행자들의 행렬에 의해 불려졌으며 그 음악은 활기있고 대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잇다. 라우다와 관계있는 것으로 14세기 독일의 고행자들의 노래(Geisslerlieder)가 있었다. 라우다는 13세기와 14세기에 고행의 대유행(흑사병의 창궐때문에 일어남)이 지나간 후에도 이탈리아에서 장려되었고 마침내는 그 가사에 다성 음악이 작곡되기도 했다.

 

 

                                   ■ 중세의 기악음악과 악기 ■

 

중세의 무용은 노래만이 아니라 기악에 의해서도 반주되었다. 13.14세기 영국와 대륙에 그 예가 남아있는 에스탕피(estampie)는 모용곡으로서 단성적일 수도 다성적일 수도 있으며 여러개의 부분들(puncta 혹은 partes)은 하나씩 반복된다.(시퀀스와 비교해 볼 것) 첫 번째 부분은 '열린(ouvert)'혹은 불완전한 종지로 끝나고 반복은 '닫힌(clos)'혹은 완전종지로 끝난다. 하나의 에스탕피에는 대체로 동일한 '열린'종지와 '닫힌'종지가 사용되었고 종지에 선행하는 부분 또한 비슷했다. 프랑스의 에스탕피에서 유래한 것으로 14세기 이탈리아의 사본에 나오는것이 이스탐피타(istampita)이다. 이는 에스탕피와 동일한 형식이나 조금더 복잡하게 변형되었다. 에스탕피는 분명히 13세기 이전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기악 레퍼토리의 예이다. 중세초기의 노래나 무용과 결부되지 않은 다른 기악음악이 있었을 법하지는 않지만 이시기의 음악이 오로지 성악뿐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NAWM 12 Istampita Palamento ■

 

이 이스탐피타는 다섯개의 부분(partes)으로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부분(pars)이 나머지 부분보다 더 명확한 형식으로 되어있다. 똑같은 음악이 첫번째는 열린종지로 두 번째는 닫힌종지로 두 번 연주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도 마찬가지로 열린종지와 닫한종지를 사용하며, 더우기 첫번째 부분에서 16마디나 빌어 사용한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부분 역시 열린, 닫힌 종지를 사용하며 처음의 8마디를 제외하고는 같은 음악을 사용한다.


로마의 리라는 중세까지 남아있었으나 중세적인 특징을 지닌 가장 오래된 악기는 하프(harp)였다. 이것은 9세기 얼마전에 아일랜드나 영국 본토로부터 대륙으로 건너갔다. 중세시대에 활을 사용한 악기로서 중요한것은 비엘(vielle)이나 피들(Fiedel)이었는데 이들은 다른 많은 이름으로 불리웠고 모양과 크기도 여러가지였으며 르네상스의 비올(viol)과 오늘날 바이올린의 전신이다. 13세기의 비엘에는 다섯 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보통 지속현이었다. 종글뢰르가 그림으로 묘사될때는 으례 이 악기를 들고나오는데 그들은 그들의 노래와 낭송을 이 악기로 반주했을 것이다. 또 다른 현악기는 오르가니스트룸(organistrum)이라는 것이었다. 10세기의 논문에 의하면 크랭크로 돌리는 바퀴를 회전시켜 연주하는 3현의 비올이다. 현은 손가락이 아니라 막대기로 진동을 멈추게 하였다. 중세 초기의 오르가니스트룸은 두 사람이 연주하는 커다란 악기로서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에는 형태가 더 작아졌고 이로부터 오늘날의 허디거디(hurdygurdy)가 비롯되었다. 중세에 자주 등장하는 악기로 현을 뜯기도 혹은 치기도하여 연주하는 치터(Zither)형의 프살테리움(psaltery)이 있다. 이것은 하프시코드(harpsichord)와 클라비코드(clavichord)의 먼 선조였다. 류트(lute)는 이미 9세기부터 알려졌었다. 이것은 아랍 정복자들이 스페인으로 가져온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전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리코더와 가로플루트(flute)가 있었고 오보에
계통의 리드악기로서 숌(shawm)이 있었다. 트럼펫은 귀족사회에서만 쓰였다. 보편적인 민속악기로서 백파이프(bag pipe)가 있었다. 북(drum)은 주로 12세기 이전에 쓰이기 시작했는데 노래하고 춤추는데 박자를 맞추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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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거디를 연주하고있는 음악가들의 미니어쳐 ●

                                      ((C a n t i g a s de s a n t a M a r i a))

 

                                        알퐁소 엘 사비오 <Cantigas de santa Maria> 에 들어있는

                                        허디거디를 연주하고있는 음악가들의 미니어처,이모음집은

                                        1250년부터 1280년까지의 노래를 400곡 이상을 담고있는데

                                        이들은 동정녀 마리아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다.허디
                                        거디의 현은 크랭크로 회전시키는 송진을 입힌 나무 바퀴로

                                        켜진다.(El Escorial, Real monasterio de San Lorenzo)

 


중세에는 교회용의 커다란 오르간외에 두개의 더 작은 형태의 포터티브 오르간(portative organ)과 포지티브 오르간(positive organ)이있었다. 포터티브 오르간은 마음대로 운반할 수 있을만큼(portatum)작아서 가죽끈으로 연주자들의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다. 이것은 한 줄의 파이프를 갖고있었고 왼손으로 풀무를 움직이면서 오른손으로 건반을 눌러 연주했다. 포지티브 오르간 역시 운반할 수 있었으나 연주할 때는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으며 풀무질을 하는 조수가 필요했다. 이러한 악기들의 대부분은 아시아에서 비잔티움을 경유하여 혹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 살던 아랍인들을 통하여 유럽으로 건너왔다. 초기 역사는 분명치 않으며 악기 이름들도 모순이 있는 경우가 많고 혼란스럽다. 더우기 정확하고 전문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미술가가 실제로 있었던 악기를 그린건지 아니면 인상을 그린건지, 또 시인이 종종 엄청난 악기의 합주에 대해 말할때에는 그가 어느 정도까지 공상에 빠져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수있는 것은 중세의 음악이 음악의 필사본이 암시해주는 것보다는 훨씬 밝고 더욱 다채로운 악기의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12세기 이후로는 작곡가들의 관심이 점점더 다성음악으로 쏠렸다. 트루바두르와 투르베르의 단성 노래는 봉건사회 상류계급의 특별한 예술적인 표현이었다. 이 노래들은 본질적으로 직업적인 작곡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비직업적 음악가들의 작품이었다. 미네리트나 반대중적(semipopular)성격의 종교적인 칸티카나 라우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도 애호가들이 쓴것이며 대부분의 애호가들의 작품이 그렇듯이 보수적인 양식과 어법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단성음악 - 노래와 춤곡 - 은 16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유럽에서 연주되었다. 그러나 기욤드 마쇼를 제외하면 13세기 이후에는 이런 양식으로 곡을 썼다고 알려진 제1급에 속하는 직업적 작곡가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다성음악의 발생과 중세에서의 그것이 처음 꽃피던 이야기로 관심을 돌려야겠다.

 

 

                           ■ 문헌자료 - 서양음악사(Grout & C. Palisca 공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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