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후기르네상스의 교회음악

미뉴엣♡ 2015. 7. 10. 20:54
♡ 후기 르네상스의 교회음악 ♡    2010/07/25 08:04

 

  

                        제목 없음a.jpg

 

 

 

                              ●★ 후기 르네상스의 교회음악 ★●

 

 

                                   ■ 독일의 종교개혁과 음악 ■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항목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못 박을 때 그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프로테스탄테 교회를 조직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이런 분열이 다시 회복될 수 없게 된 후에도 여전히 루터파 교회에서는 예배의식 시의 라틴어 사용은 물론 전통적인 커톨릭 전례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성가와 다성음악을 막론하고 많은 카톨릭 음악들이 때로는 원래의 라틴어 가사로 때로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혹은 옛 선율에 독일어로 된 새 가사를 붙여서(콘투라팍툼이라 한다) 계속 사용되었다. 루터파 교회에서 음악의 중심적인 위치 특히 16세기 동안에는 루터 자신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가수이며 약간의 기술을 갖춘 작곡가였다. 특리 네덜란드 악파의 다성음악과 조스캥 데 프레의 작품에 대단히 감탄하였고 있었다. 그는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을 크게 믿었으며 회중 전체가 어떠한 형태로든 예배 중의 음악에 참여하기를 바랬다. 그가 신학상의 몇몇 점에 대한 자기의 견해에 맞도록 전례 용어들을 바꾸기는 했지만 예배에서 계속 라틴어를 쓸것을 원하였는데 이것은 라틴어가 청년들의 교육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개인적이든 공식적이든 간에 어느 면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다.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적용시키는데 있어서 각 지방 집회에서는 서로 다른 짧은 관례를 발전시켜 나갔다. 숙달된 성가대를 보유한 큰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라틴어 전례와 라틴어 가사가 붙은 다성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보다 작은 집회를 위하여 혹은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루터는 1562년에 이미 <독일 미사곡-Deudsche Messe>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미사의 주요한 윤곽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변화된 부분이 많았다. 즉, 글로리아가 삭제되었으며 독일어의 자연스런 억양에 적합한 새로운 낭송음들이 사용되었고 독일어에 맞는 자연스런 종지를 채택하였고 미사 통상문은 모두 독일어로 된 찬미가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이러한 형식이나 다른 어떠한 형식을 루터파 교회에 일률적으로 널리 보급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습과 새로운 이념 사이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조합과 타협된 형태는 16세기의 독일에서 언제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다. 라틴어 가사로 된 미사곡과 모테트는 계속해서 불려지고 있었으며 18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어떤곳에서는 전례에 라틴어가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바흐 시대의 라이프치히에서 여전히 라틴어로 불려지는 예배 부분이 있었다.

 

 

                              %C2%FC%BC%D5%BF%A9%C7%E0_206a.jpg

 

 

● 루터파의 코랄 : 루터파 교회가 이룩한 음악적 공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며중요한것은 독일어로는 코랄(Choral)이나 키르헨리트(Kirchenlied-교회노래)라 하고 영어로는 코랄(Chorale)이라하는 회중들이 부르는 유절 찬미가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찬미가는 주로 4성부에 화성을 붙인 악곡으로 알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즉, 평성가나 민요와 같이 코랄은 원래 가사와 선율의 두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은 역시 평성가나 민요와 마찬가지로 화성과 대위법을 이용하여 커다란 음악형식으로 확대될 수 있다. 16세기 카톨릭 교회음악의 대부분이 평성가가 성장하여 이루어진 것이듯 17세기와 18세기의 루터파 교회음악은 코랄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1524년에는 네 권의 코랄집이 출판되었으며 잇따라 다른 코랄집들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코랄들은 처음부터 회중들이 유니즌으로 부를 수 있도록 작곡되었으며 여기에는 화성이나 변주부가 곁들여있지 않았다. 어떤 코랄집에서는 그 기보법이 동시대의 그레고리오 성가 기보법과 동일하며 따라서 음표의 상대적인 시가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그 선율은 정확한 정량기보법으로 적혀있었다. 코랄은 꽤 일정한 길이의 음표로 불려졌을 것이며 가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선율에 선율에 변화가 생기고 각 악구의 마지막 음표에 길이가 정해지지 않는 휴지가 올수도 있었을 것이다. 루터파 교회의 적합한 노래에 대한 수요는 오랫동안 공급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루터 자신도 코랄 가사를 많이 썼는데 예를 들면 <내주는 강한 성이여-Ein'feste Burg ist unser Gott>가 잘 알려져있다. 일반적으로는 그가 작곡했다고 추정되지만 이 코랄(1529년에 최초 인쇄)의 선율을 루터가 썼다는 것은 확실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새로이 작곡된 코랄 선율들이 많이 있었으나 기존의 세속 또는 종교 노래에서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차용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그레고리오 찬미가인 <오소서 인류의 구세주여 - Veni Redemptor gentium>가 <오소서 이방인의 구세주여-Nun komme' der Heiland>가 되었다. 또 즐겨 불려지던 비전례적인 종교곡들이 차용되었다. 그 예로 라틴어와 독일어가 혼합되어있는 크리스마스 찬미가 <아름답고 기쁜 노랫소리-Indulci jubilo>나 독일어로 된 부활절 노래<그리스도 죽음의 어두운 감옥에 누워 계시네-Christlag inTodesbanden>등을 들수있다. <그리스도 어두운 감옥에 누워계시네>는 후에 루터가 부활절 시퀀스인 유월절의 희생에 찬미를 드리세(Victimae paschali landes)'를 본따서 재편곡하였다.

 

● 콘투라팍툼 : 코랄 종류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콘투라팍툼'이나 세속 노래들의 '패러디'였다. 여기서 기존 선율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가사는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바뀌거나 또는 적절한 영적인 의미를 주기 위하여 변화되었다. 미사곡의 역사에서 이미 보았듯이 세속적인 노래와 다성악곡을 교회용으로 개작하는 것이 16세기에는 일반적이었다. 아마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콘트라팍툼 중 하나는 이삭의 리트인 <인스부르크여 안녕-Innsburuch, ich muss dich lassen> (NAWM 52 참조)를 개작한 <오 세상이여 안녕-O Welt, ich muss dich lassen>일 것이다. 조금 후에 나타난 것으로 다소 놀라운 작품은 1600년경에 하슬러의 리트인<내 마음은 (사랑스런 아가씨 때문에)괴로워한다-Mein Gmuthist mirverwirret>에서 차용한 선율에 <내마음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누나-Herzlich thut mich ver langen>라는 종교적인 가사를 붙인 것으로 그 후에는 <오 거룩한 마리피흘리며 상처이었도다-Ohaupt voll Blut und Wunden>에 전용되었다. 하슬러의 원 악곡과 바흐가 <마태수난곡-Passion according to St. Mathew>의 2개의 악장에서 변형시켜 쓴 첫 악구들이 예 8.1에 나타나있다. 종교개혁 초기에 작곡된 코랄 중 다수가 계속해서 사용되긴 했지만 16세기와 17세기를 통하여 새로운 코랄 가사들이 많이 쓰여졌으며 몇몇 새로운 선율이 개작되었다. 16, 17세기의 몇몇 코랄 선율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영어권 프로테스탄트 찬송가집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여>와 하슬러의 <오 거룩한 머리>, 그리고 크뤼커의 <이제 우리 모두 주께 감사하세-Nun danke alle Giott>등이 그것이다.


 

                               P1010002a.jpg

                                   ● Hans Leo Hassler :「Mein Gmuth is mir verwirret」●

 

 

● 다성 합창곡 : 루터파의 작곡가들은 일찍부터 코랄을 다성으로 쓰기시작했다. 음악적인 면에서 루터의 주된 협력자였던 요한 발터(Johann Walter 1496-1570)는 1524년 라틴어로 된 5곡의 모테트와 독일어로 된 38곡의 코랄을 묶어 한 권의 모음곡집을 출판했다. 이 모음곡집은 중판을 계속하면서 확대되어 라틴어 모테트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마지막 판인 제5판은 1551년에 나왔다. 1544년 비텐베르크에서는 독일 루터파의 음악 출판계에서 주도적이었던 게오르크 라우(Georg Rhaw 1488-1548)가 보다 중요한 모음곡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123곡의 다성코랄 편곡과 모테트들이 실려있다. 발터의 모음곡집과는 달리 이것은 루드비히 젠플과 토머스 슈톨처(Thomas Stolzer 대략 1475-1526), 베네딕투스 두치스(Benedictus Ducis 1490-1544), 식스투스 디트리히(Sixtus Dietrich 1490-1548), 아놀드 폰 브르크(Arnold von Bruck 1495-1541)등을 포함한 16세기 초반기의 독일과 스위스 - 독일계통의 주도적인 모든 작곡가들의 작품을 편집한 모음곡집이었다. 이러한 모음곡집과 16세기의 다른 모음곡집실려있는 코랄들은 당연히 그 양식이 다양하였다. 어떤 곡은 독일 리트의 옛 기법을 이용하고 있는데 테너 성부에 긴음표로 된 단순한 코랄 선율을 두고있다. 그리고 독자적인 동기로 모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는 다성적인 세개 이상의 성부가 이 테너를 둘러싸고있다. 어떤 곡에서는 프랑코 플레미시 모테트처럼 모든 성부를 통하여 코랄의 각 악구가 모방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하며 거의 수직화음적인 양식으로 된 것들도 있었다. 16세기 초반기에는 곡을 간단하게 쓰는 이 마지막 양식으로 기우는 경향이 일반적이었으며 테너 대신 소프라노에 코랄선율을 두려는 경향도 있었다. 다성적인 코랄 작곡은 회중이 아니라 성가대를 위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연주법은 성가대가 때때로 기악 반주를 곁들여 {다성음악으로} 부르는 코랄의 절(stanza)과 회중들이 반주없이 유니즌으로 부르는 절을 교대시키는 것이다. 당세기 후반부의 30여년 동안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코랄은 더우더 빈번히 칸티오날(cantional)양식 즉, 주선율을 최상 성부에 두며 완전히 수직화음적이고 찬미가 같이 리듬적으로 단순한 양식으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회중들이 노래할 때는 아마도 여전히 반주가 곁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회중이 주선율을 노래하는 동안 오르간이 다른 성부들을 연주하는 관습은 1600년 이후에야 서서히 자리를 잡게되었다. 칸티오날 양식으로 된 첫번째 모음곡은 1586년 루카스 오시안더(Lucas Osiander 1534-1604)의 <코랄과 시편곡 50곡 - Funfzig Liederund Psalmen>이었다. 17세기 초기에 이 양식으로 곡을 쓴 주요 작곡가들은 H.L.하슬러,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1571-1621)와 요한 헤르만 샤인(Johann Herman Schein 1586-1630)이었다.

 

● 코랄 모테트 : 16세기 말기에는 독일의 많은 루터파 지역들이 카톨릭 신앙으로 되돌아갔으며 동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교파와 남서부의 카톨릭 교파 사이에 가로놓였던 경계선이 실질적으로 고정되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이렇게 명확한 구분이 생겨남으로서 루터파의 교회에서는 새롭고 독특한 종류의 다성음악이 나타나게 되었다. 종교개혁 초기의 코랄 작곡가들은 본래의 코랄이 가지는 가사와 선율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중세기의 오르가눔 작곡가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변화될 수 없게 확립된 아름답게 꾸며지면서도 개인적인 표현 감각으로 해석될 수 없는 그 무억으로 취급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코랄을 취급하였다. 16세기말에 가서는 이러한 이러한 태도로 변했다. 라소의 예를 보고 마음이 움직인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작곡가들은 15세기에 카톨릭 작곡가들이 행했던--자유로운 예술적 창작의 기본 소재로서 전통적인 선율들을 이용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해석과 회화적인 세부사항을 덧붙인--일에 손을대기 시작했다. 이렇게해서 새롭게 생겨난 작품들을 코랄 모테트라 부른다. 루터파의 코랄 모테트의 한 예로는 미하엘 프레토리우스가 쓴 비치니움(2성부 악곡)이있다. 이것은 코랄인 <우리 아버지-Vater unser>에 기초하고 있다.(예 8.2) 코랄 모테트를 쓴 작곡가들은 여전히 코랄이나 리트 양식과 관련된 선율적 소재를 사용하기는했지만 전통적인 코랄 선율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하였다. 이러한 모테트의 출현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음악에 있어서 회중이 부르는 단순한 찬미가와 숙달된 성가대가 부르는 보다 정교한 음악 사이에 계속적으로 존재해왔던 구분을 더욱 확실히 하였다. 16세기말에 독일어로 된 모테트를 썼던 주요 작곡가로는 하슬러, 요하네스 에카르트(Johannes Eccard 1553-1611), 레온하르트 레이너(Leonhard Lechener 1550-1606), 그리고 미하엘 프레토리우스가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독일에서 루터파의 교회음악 양식을 확립했으며 100여년 후, J.S.바흐에게서 절정을 이루게 되는 발전의 시초가 되었다.

 

 

                              P1010003a.jpg

                                    ● Michael Praetorius :「비 치 니 움 - Aster unser」●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를 다 같은 형제로 만드사

                                         당신께 부탁드리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는이여

 


                           ■ 독일 밖에서의 종교개혁의 교회음악 ■ 

 

● 시편가집 : 종교개혁이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스위스 음악에 미친 영향은 독일에서의 발전과는 그 양상이 매우 달랐다.장 칼뱅(Jean Calvin 1509-64 캘빈)과 개혁된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지도자들은 카톨릭의 전례와 예배의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것에 대해 루터보다도 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예배 의식에 있어서의 예술적 유혹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이 더하여 성경에 없는 가사를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특정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칼뱅파 교회에서 주목할만한 유일한 음악적 산물은 시편가 뿐이었다. 이들은 시편을 운율에 마춰 번역한 것으로서 그 선율은 새로 작곡되기도 했지만 대중적 기원을 지니거나 평성가에서 차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프랑스어로 된 주요한 시편가집은 1562년에 출판되었는데 루이 부르주아(Loys Bourgeois 1510-61)가 선곡하였거나 작곡한 선율에 클레망 마로(Clement Marot)와 테오도르 드 베즈(Teodor de Beze)가 번역한 시편의 가사가 붙어있었다. 시편은 원래 교회 예배에서 반주없이 유니즌으로 불려졌었다. 한 편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에서는 주선율을 테너나 소프라노에 둔 4성부나 그 이상의 곡으로서 때로는 단순한 수직화음적 양식이거나 때로는 모테트 같이 아주 정교하게 편곡된 것이 사용되었다. 그러는 동안 비교적 단순한 4성부 작품 중의 몇 가지가 공식적인 예배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시편가 작곡가는 클로드 구디멜(Claude Goudimel 1505-1572)과 클로드 르 죈(Claude Le Jeune)였다. 또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는 JP 스벨링크(Jan Pietersz Sweelinck)였다. 프랑스의 시편가의 번역판이 독일과 네덜란드 영국 및 스코틀랜드에 등장하였고 이러한 나라의 개혁파 교회에서는 프랑스 선율을 많이 차용했다. 독일에서는 많은 시편가의 선율이 코랄로 개작되었다.(예8.3a) 또 네덜란드에서는 1566년도 번역판이 네덜란드어로 된 그 이전의 시편가집인 1540년의 <시편가집-Souterliedekens>을 대신하였다. 이 시편가집의 선율은 동시대의 대중가요에서 차용한 것이며 후에 클레멘스 논 파파가 3성부로 편곡했다. 프랑스의 모델은 16세기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시편가집인 스턴홀드(Sternhold)와 홉킨스(Hopkins)의 시편가집(1562)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1564년 스코틀랜드의 시편가집에 준 영향은 더욱 컸다. 헨리 에인스워드(Henry Ainsworth)는 1612년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에 있는 영국인 분리주의자를 위한 시편가집을 출판하였다. 그 안에는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의 전통이 조합되어있는데 이 전통은 필그림들에 의해 1620년 뉴일글랜드에 전해졌으며 미국 최초의 시편가집인 1640년의<베이 시편가집-Bay Psalm Book>이 등장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프랑스어로 된 시편가의 선율은 대부분의 독일 코랄이 가지는 직선적이며 활기찬 성질에 비해 대체로 부드럽고 친근감이 느껴지며 다소 엄숙하다. 칼뱅파 교회가 음악을 정교하게 꾸미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루터파의 코랄과는 달리 시편가의 시편가의 선율은 성악과 기악의 보다 큰 형식으로 거의 발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편가는 일반적인 음악사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예배음악으로서는 매우 훌륭하다. 보통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그 선율선은 평성가와 비슷한 특성을 가지며 그 아구들은 변화가 아주 다양한 리듬 형으로 이루어진다. 1562년 프랑스의 시편가집에 실려있는 선율 중 오늘날의 찬송가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원래 시편 제134편에 붙여 불려졌던 선율인데 이것은 영국의 시편가집에서 시편 제 100편에 붙여졌으며 그 이후 <옛 100편 - Old Hundredth>이러고 알려져있다.(예 8.3b)

 

 

                               P1010004a.jpg

                               ● 1562년의 프랑스 시편가집에 수록된 선율들과 그 후의 편곡들 ●

 

 

얀후스(Jan Hus 1373-1415)가 주도한 보헤미아의 전(前)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 중기까지 교회로부터 다성음악과 기악을 실제적으로 추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후스의 추종자들은 민요와 같은 성격을 지닌 단순하고 주로 단선율로 된 찬송가를 불렀다. 그 이전의 엄격함이 서서히 느슨해짐에 따라 여전히 1음표 : 1음표 양식이긴 하지만여러성부로 된 음악이 허용되었다. 1561년 '체코 형제(Czech.Brethren)'라 알려져 있는 한 모임에서 가사가 체코어로 된 찬송가집을 한 권 출판하였다.그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나 세속가요 혹은 4성부로 된 프랑스 칼뱅파의 시편가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후에는 '모라비아 형제(Mravian Brethern)'로 불린 그 모임은 18세기초에 미국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그들이 정착한 곳--특히 펜실베니아주, 베스리엄(Bethlechem)--은 중요한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폴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은 지속적인 진보를 거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성과로서 1586년 크라코프에서 한 권의 시편가집이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미콜라이 고몰카(Mikolaj Gomolka 1535-1609)가 쓴 4성부 작품에 폴란드어 가사를 붙인것이었다.

 

 

                              P1010005a.jpg

                             '체코 형제' 모임에서 사용한 찬송가집의 표지 1561년 jan Blahoslav)가 
                                편집한 것으로 체코어로 된 735개의 성가가 담겨져 있다. 긴 막대기를 
                                들고있는 합창 지휘자가 두 그룹으로 된 성가대를 지휘하고 있는데 한
                                그룹은 폴리오(folio)크기의 합창책을보고 다른그룹은 작은 찬송가집을
                                들고 노래하고있다.

 

 

                                           ■ 반 종교개혁 ■

 

1500년경 몇 년 동안은 16세기 카톨릭 교회음악에 있어서 운명적인 시기였다. 1527년 로마는 카알 5세가 이끄는 스페인과 독일 용병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약탈당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에서의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 된 삶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개혁을 주창한 사람들이 교회에 관한 일에 그 힘을 행사하게 되었다. 북부에서의 종교개혁과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의 상실 혹은 상실에 대한 위협은 반 종교개혁 작업을 보다 절실하게 만들었다.

 

● 트리엔트 공의회 : 1545년 1563년까지 수많은 휴식과 중단을 거듭하면서도 교회에서 악폐와 방종을 추방하는 법안을 세우고 또 공식적으로 승인하기 위한 공의회가 이탈리아의 북부도시인 트리엔트에서 열렸다. 교회음악--공의회의 안건중에서는 일부에 불과했던--에 관해 말하자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나온 주요 불만들은 세속적인 정선율에 기초를 두거나 샹송을 서투르게 모방한 미사곡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세속적인 정신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과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복잡한 다성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교회에서 시끄러운 악기를 지나치게 사용한다는 점, 교회에서 노래부르는 사람들의 나쁜 발음과 부주의 및 일반적으로 불경스러운 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1555년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가대에게 이에 관한 기억될 만한 질책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최종 결정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즉,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라고 올바르게 불려지기" 위하여 '불순하거나 음탕한 짓'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고 선언되었다. 이러한 지시를 이행할 수 있는 권한은 각 교구의 주교들에게 일임되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그것의 시행을 감독하도록 추기경들의 특별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공의회는 기술적인 점에 대해서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다성음악이나 세속적인 내용이 담긴 악곡을 모방하는 일에 대해서 금지하지는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다성음악을 폐지하도록 강력히 주장하고 있을 때 팔레스트리나는 다성음악이 결코 경건한 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것이 아니며 반드시 가사의 이해를 방해하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6성부 미사곡을 작곡했으며 이리하여 팔레스트리나는 '교회음악의 구세주'가 되었다는 오래된 전설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있다. 문제의 미사곡은 1567년 <교황 마르첼루스 의 미사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곡은 마르첼루스 2세의 짧았던 교황 임기(1555)중에 씌여졌을 수도 있으나 그 교황을 기념하기 위해 그 후에 작곡되어 헌납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미사곡이 트리엔트 공의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 그러나 공의회의 최종 결정은 1561년 일련의 특별 기도(preces speciales)를 작곡한 플랑드르 출신의 야코부스 데 케를레(Jacobus de Kerle1532-91)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곡들은 공의회의개회 중에 불려졌으며 선명한 성부 작법, 화성적 어법의 잦은 사용, 침착하고 경건한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다성음악이 지니는 가치를 공의회에 확신시켰고 그 가치를 반대하는 경향이 있던 몇몇 극단론자들을 침묵케하였다.

 

 

                                          Algue-Blanche-Sur-Fond-Rouge-Et-Vert-19--C10362317.jpeg

  

 
                ■ 트리엔트 공의회 :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에 관한 규범 ■

 

미사는 노래불려지든 아니든 간에 그것이 적당한 빠르기로 정확하게 연주되었을 때 그ㄱ것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과 귀에 평온하게 도달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한다. 노래와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미사의 경우에 불경스러운 어떤것도 섞여 들어가서는 안되며 오직 신에 대한 찬미와 찬송이어야만 한다. 노래의 양식은 귀에 공허한 즐거움을 주는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들이 가사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천상의 조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고 은총 받은자들의 기쁨을 묵상하도록 해야한다. 노래로 불려지든지 오르간으로 연주되든지 간에 외설적이거나 불순한 것을 담고있는 모든 음악은 교회에서 추방될것이다.

 

A. Theiner, Acta..Concilil tridentini...2(1874):122 Gustav Reese, Music in tje Renaissance P.449에 영역기록

 

 

                        ■ 팔레스트리나(Giovanni da Palestrina) ■ 

 

● 팔레스트리나 : 팔레스트리나는 작곡가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da Palestrina)가 태어난(1525 혹은 1526) 로마 근교의 조그만 마을 이름이다. 그는 로마에서 소년 성가대원으로 있으면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544년 고향에서 오르간 주자와 성가대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551년에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카펠라 줄리아의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다. 1554년에는 첫번째 미사곡집을 출판하여 그의 후원자였던 율리우스 3세에게 바쳤다. 1555년에는 교황의 공식 예배당인 카펠라 시스티나 성가대원으로 잠시 활동하였으나 독신의 규율을 따르지 않고 결혼했었기 때문에 그 영예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성 요한 대성당(로마)에서 성가대 지휘자가 되었다. 6년 후에는 성 마지오레 대성당에 비슷하지만 더 중요한 직책으로 옮겨갔다. 1565년부터 1571년까지 로마에 새로 설립된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571년에는 다시 성 베드로 성당의 부름을 받아 159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곳에서 카펠라 줄리아 성가대의 지휘자로 일했다. 팔레스트리나는 로마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한 번은 1568년 막시밀리언 2세 황제한테서 받은 제의였고(결국 필리페 데 몬테가 이 직책을 맡게 되었다.)다른 한번은 1583년 만투아의 굴리엘모 곤차가 공작의 제의였다. 그는 공작의 초청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공작의 예배당을 위하여 미사곡을 썼는데 이러한 곡들은 최근에 와서야 발견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말년에 이르러 공식 전례서의 음악 개정작업을 감독하게 되었다. 이것은 트리에트 공의회의 명령을 가사에서 이미 이루어진 변화에 음악을 일치시키고 성가에 도입된 야만스럽고 미천하고 모순되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정화하는 작업이었다. 교황 고레고리오 13세에 의하면 이러한 요소들은 작곡가와사보가 그리고 출판인들이 서툴고 혹은 게으르고 혹은 악의까지 품은데서 생겨난 것이었다. 이 작업은 팔레스트리나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완성을 보지못했으나 1614년까지 다른 사람들이 작업을 계속하여 미사성가집<Graduale>의 메디치 판이 출판되었다. 이 판과 다소 차이점은 있지만 다른 판들은 1908년 바티칸 판에서 성가의 결정적인 개혁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여러나라에서 사용되었다. 팔레스트리나 작품은 대부분이 종교적이었다. 그는 104곡의 미사곡 250여곡의 모테트, 다수의 다른 전례용 악곡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된 종교적인 마드리갈 50곡을 작곡했다. 그의 세속적인 마드리갈 100곡은 기술적으로 잘 다듬어졌으나 보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년에 이르러 세속적인 연애시에 곡을 붙였던 일을 "부끄러워하고 마음아파했다."

 

 

                               P1010008a.jpg

                                팔레스트리나가 첫번쩨 출판한 작품집(1554년 로마 Valerio & Luigi Dorico

                                출판)의 표지 그림은 교황 율리우스 3세에게 음악을 증정하고있는 작곡가를

                                보여주고 있다.(Berlin Preussische Staatsbiblothek)

 

 

● 팔레스트리나 양식 : 바흐 이전의 작곡가로서 팔레스트리나만큼 이름이 알려져있는 사람은 없다. 또 기교에 있어서 그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도 없다. 그래서 그는 '음악의 왕자'라고 불려졌고 그의 작품들은 교회양식 절대적인 완성이라는 평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인정되고있는 사실은 그가 반 종교개혁의 절제되고 보수적인 국면의 본질을 다른 어느 작곡가보다 더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팔레스트리나 양식'이 교회 다성음악의 기준이라고 말하는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실제로 요한 요셉 푹스(Johann Joseph Fux)의 <Gradus ad Parmassum 1725>에서 더 최근의 교재들에 이르기까지 대위법 교재들은 어린 작곡가들에게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재창조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팔레스트리나가 프랑코-플레미시 작곡가들의 작품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그들의 기교적인 면에 통달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이 미사 가운데 53개가 다성음악 작품을 모델로 삼은것이며 대부분이 Andreas de Silva, Lheritier, Pinet Verdelot와 모랄레스(Morales)같은 그 이전 세대의 주요한 대위법 작곡가들의 작품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모댈 중 11개의 작품은 리옹에서 자크 모데른의 모음집인 1532년과 1538년 Motetti del Fiore 안에 출판되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트리나는 과거의 훌륭한 작품들을 받아들이고 개작하고 세련되게 만들었다. 그의 초기 미사곡 중 몇 곡은 구식의 정선율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여기에는 <무장한 남자-L'homme arme>의 전통적인 선율에 근거해 작곡한 두 미사곡 중 첫번째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선율을 테너 성부에 제한시키기보다는 모든 성부에 사용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또 옛 플랑드르 전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는 팔레스트리나의 초기 작품인 <Missa ad fugam>과 1570년의 또 하나의 미사곡 <Repleatur os meum>이 있다. 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더블 카논형식으로 쓰여져있고 후자는 8도에서 1도 음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정에서의 다양한 진행을 통해 여러 악장에서 체계적으로 카논을 소개하며 마지막의 아뉴스 데이에서 더블 카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말하는 두 작품처럼 그렇게 엄격하지는 않지만 카논은 팔레스트리나의 후기 미사곡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다. 팔레스트리나가 지니는 다른 또 하나의 보수적인 특징은 작곡가들이 일반적으로 5성부 이상의 곡을 작곡하던 그 때 그의 악곡 중 상당한 수가 4성부만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가 쓴 코테트의 1/4정도와 미사곡의 1/3 그리고 마드리갈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그렇게 작곡되었다. 개별적인 성부들은 거의 평성가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아치형의 곡선을 그리며 거의 순차 진행하여 도약은 크지 않고 드물다. 유명한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곡-Mass of Pope Marcellus, 예8.4>의 제1 아뉴스데이 같은 전형적인 작품의 어느 한 성부 중의 선율선을 예로들어도 호흡이 길며 다양한 길이의 리듬으로 융통성 있게 구분된다. 그리고 거의 음이 반복되는 일없이 주로 순차적으로 대부분 9도 음역안에서 진행하고 있어서 노래부르기가 쉽다. 3도 이상의 큰 도약은 결코 극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도약한 음정 내의 한 음으로 돌아옴으로서 매끄럽게한다. 이러한 모든것은 평이하고 자연스러우며 품위있는 음향의 곡선을 이루고있다. 선율선의 순수성은 화성의 순수성과 잘 어울리고있다. 팔레스트리나의 특징은 동시대의 보다 진보적인 작곡가들이 철저하게 개발시켜가고있던 새로운 표현수단인 반음계주의를 완전히--고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피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마드리갈에서도 팔레스트리나는 이 점에 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종교적인 작품에는 더욱 그러했고 무엇보다도 미사곡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다. 그에게는 무지카 픽타(musica ficta)의 규칙에 따라 요구되는 필수적인 변화음만이 허용되었다.

 

 

                               P1010010a.jpg

                           ● 조반니 팔레스트리나 : Agnus Dei I from Popes Marcellus Mass ●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밥적인 관습은 빌라르트 학파의 가르침 및 자를리노(Zarlino)가 1558년 <Le Institutioni harmoniche >에 잘 다듬어서 설명해 놓은것과 일치한다. 수직적으로 볼때 독립적인 선율선들은 마디의 강박과 약박에서 만나도록 기대되는데 이들은 C에서 4분 음표 2개와 2분 음표로 되어있으며 베이스로부터 3도와 5도 또는 3도와 6도 음정이 꼭 나온다. 이런 관습은 계류음으로 인해서 깨지게 되는데 이 때 계류음이 있는 한 성부는 다른 성부들과 약박에서는 협화적이지만 이 음이 다음 마디의 강박까지 지속되므로 다른 성부들 중 하나 이상과 불협화음을 이룬다. 계류된 성부는 순차 하행하여 협화음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긴장과 완화의 교대 강박에서의 강한 불협화음과 약박에서의 부드러운 협화음으로 무엇보다도 시계추의 움직임 같은 음악의 맥이 생기게 된다. 개별적인 성부에서 강박과 약박 사이에 들어있는 박자에서는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만 한다면 다른 성부들과 불협화음을 이루어도 좋다.팔레스트리나는 오래된 이 규칙의 예외를 썼는데(자를리노는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음) 이것은 후에 카미비아타로 불렸다. 성부는 순차 진행으로 협화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3도 하행 도약으로 협화 음정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한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역동성은 예 8.5에 잘 나타나있는데 여기서는 10-15마디 아래 4성부가 원래 음가로 되어있다. (P는 경과음, S는 계류음, C는 캄비아타이다;아래 놓여진 숫자들은 불협화 음정과 그 해결음이며 화살표는 강박과 약박을 뜻한다.)

 

 

                               P1010013a.jpg

                               ● 예 8.5 & 8.4의 10-15마디 Tenors I II. Bass I II의 화성분석 ●

 

 

부드러운 온음계적인 선율선과 불협화음의 신중한 취급 방법은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에 어느 작곡가의 경우와도 견줄 수 없는 일관된 청명합과 명백함을 제공한다. 그의 대위법--사실상 훌륭한 모든 성악적인 다성음악--이 가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은 수직적인 조합에서 음들을 체계적으로 쌓아올리고 배치하고 중복시키는 음향의 취급  방법에 있다. 음을 싸아올린는 방법을 다양하게함으로서 같은 화음에서도 미묘하게 다른 수많은 명암과 수많은 음향을 얻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어떤 것은 다른것에 비해 한층 균형이 잘 잡히거나 혹은 더 효과적일 것이다. 모두 각자가 특별한 상황에서 또는 특별히 음색을 강조하거나 표정이 이풍부한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쓰일 수도 있을것이다. 다양한 성부들의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진행에서 생겨나는 팔레스트리나의 수직적인 음향은 16세기의 어떤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동질적이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음향은 매우 제한적인 것 같이 느껴지는 화성의 범주 안에서 쓰여진 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성과 지속적인 흥미거리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고있다. 팔레스트리나는 그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하여 특별한 음역이나 특별한 배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효과는 음향의 영역 안에만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가 간단한 3화음이나 첫째자리바꿈 화음이 무반주의 4성부 혹은 5성부 6성부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방법으로 소리가 나느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 같다. 간단한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 <오라 그리스도의 신부여>의 제1 아뉴스 데이에서 F-A-C 혹은 A-C-F형의 조합이 21번이나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을 화성적으로 동일한 것--즉, F 장3화음의 여러가지 유형처럼--으로 들을수도 있겠지만 실제 음향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 화음에는 18종의 다른 조합과 배열 방법이 있다.(예8.6)

 

 

                               P1010015a.jpg

                                   ● F. A. C의 다양한 음향 Agnus Dei I from Palestrina : ●

                                   「 M a s s V e n i S p o n z a C h r i s t i」

 

 

팔레스트리나 음악의 리듬은 16세기의 모든 다성음악이 가지는 리듬과 같이 여러가지 성부들의 리듬에 선율선의 화성적인 조합과 대위법적인 조합에서 생겨나는 총괄적인 리듬을 가미시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것이다. 예 8.7은 예 8.4의 처음 7마디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각 성부는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맞추어 마디줄이 그어져있다.이 예는 각 선율선이 어떻게 독립되어 있는지를 도표식으로 보여준다. 그렇지만 모든 성부가 소리날 때 들리는 이 총괄적인 리듬은 강한 악센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부분이 화성의 변화와 강박에 계류음을 둠으로해서 얻어지는 2/2 혹은 4/4박자의 마디가 매우 규칙적으로 연속되는 인상을 준다.어떻게 부드럽게 나타나는 리듬의 규칙성이 팔레스트리나 양식의 특징이었다. 

 

                               P1010016a.jpg

                             ● in Agnus Dei I from Palestrina-Pope Marcellus Mass의 리듬 ●

 

 

이 아뉴스데이는 또한 팔레스트리나가 순수하게 음악적인 수단으로 어떻게 악곡을 통일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외적으로 볼 때 이 악장은 공베르가 쓴 전형적인 모테트를 닮았다. 즉 가사의 각 구에는 그 자체의 음악적인 동기가 있으며 각 동기의 대위법적인 발전은 일부 성부는 멈추고 나머지 성부는 계속되면서 성부가 중복되는 종지에 의해서 다음 동기의 대위법적인 발전과 연결되어진다. 그러나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에서 동기들 사이의 연결은 단순한 연속이 아니다. 중요한 종지를 위해 선법상의 음들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과 체계적인 반복을 통하여 유기적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이 팔레스트리나의 평상적인 작곡 방법이다. 그러나 <교황 마르첼루스 미사>에서 그는 의식적으로 가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이 곡은 1562-63년에 씌여졌는데 이 시기는 바로 "가사는 만인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라고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에 관한 규범집>을 발간한 시기였다.(인용문 참조)

 

 

                               P1010021a.jpg

                                ●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 : 크레도 - Pope Marcellus Mass ●

 

  

            ■ 조반니 다 팔레스트리나 : 크레도 - Pope Marcellus Mass ■

 

크레도는 원문의 중요성과 그 길이로 인해 작곡가들에게 항상 도전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팔레스트리나는 성부들이 모방적인 다서음악의 엇갈린 방법이 아니라 주어진 악구를 동시적으로 발음하도록 하였다. 이렇게하면 당시 이탈리아와 스페인 교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화성적으로 된 시편창 형식(팔소보르도네)에 내재하며 팔레스트리나의 유명한 <Improperia-비난의 교송 ; 성 금요일에 부르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말씀>과 같은 예에서 발견되는 단조로움에 빠지기 쉬웠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다양성의 원천을 발견해냈다. 팔레스트리나는 6성부의 성가대를 각기 독특한 음색을 지닌 여러개의 소그룹으로 나누고 "per quem omnia facta sunt-이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Et incanmatus est-나 육신을 입으시고" 와 같이 점층적인 가사나 특별히 의미 심장한 가사를 위해서만 전체 6성부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성부는 가사의 일부분을 부르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보통 많이 쓰이는 모방이나 반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예 8.8은 음악의 자임새에 대한 이러한 융통성있는 접근을 보여준다. Cantus-Altus-Tenor II-Bassus I 그룹은 같은 가사 "Et in unum Dominum"을 노래하는 Cantus-Tenor I-Tenor II-Bassus II그룹으로 응답된다. 각 그룹은 이해하기 쉬운 작은 단위로 가사를 세분해서 말하는 듯한 리듬으로 발음하며 각자 종지를 갖는다. 위의 두 경우는 모두 장6도 8도의 연속에 기초한 약한 종지형이다.그리고나서 3중창은 아마도 삼위일체 본질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제 짜임새가 달라져서 포부르동 양식이 부활된다. 빌라르트 악파는 세련되지 않았다고 하여 포부르동 양식을 도외시했으나 팔레스트리나는 이 부분을 비롯한 크레도 여러 곳에 이 양식을 적용시켜 큰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포부르동 양식의 화음으로 거의 일정 불변하는 밑음 3음 5음의 3화음에서 벗어난 변화를 피하고자 아마도 먼 옛날 믿음이 더욱 깊었던 시대의 미묘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했음일것이다. 제27마디에는 완전 종지가 이 역시 칸투스 성부의 제3음에 의해 약화된다. 팔레스트리나는 진정한 최종 종지를 다음 5성부 부누의 마지막인 "de Deo vero"라는 구절까지 미루었다.(38마디) 팔레스트리나는 리듬상의 방법을 사용하여 단조로움을 꽤하였다. 앞서 노의한 바있는 '아뉴스 데이'에서처럼 각 성부는 마디 내의 서로 다른 박에 악센트를 준다. 강세 음절은 어느 박에든 올수있다. 그리고 약하든 강하든 간에 종지만이 센박과 여린박이 정상적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것을 복원시킨다. 예컨대 "Et in unum Dominum" 이라는 부분에서 청자는 322213331322식으로 3박자, 2박자, 1박자 리듬이 교대로 니티나는 것을 듣게된다.


필레스트리나 양식은 서양음악사에 있어서 작곡가들이 당연히 전혀 다른 종류의 음악들을 작곡하던 뒷세대의 본보기로서 의식적으로 보존, 분리, 모방된 첫번째의 것이다. 이 양식은 17세기에 음악가들이 구양식(stile antico)을 논할 때 항상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은 19세기와 20세기 초기에 특히 강조되었던 카토릭의 몇몇 측면에 대한 음악적 이상을 구체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 팔레스트리나의 동시대인 : 팔레스트트리의 양식을 계승하고 신성화하는 것을 도운 사람들 중의 팔레스트리나의 제자로 성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에서 그 후임자가 되었고 후에 교황청 예배당의 지휘자가 된 조반니 마리아 나니노(Giovanni Maria Nanino 1545-1607)는 로마 악파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들 중의 하나이다. 펠리체 아네리오(Felice Anerio 1560-1614)는 나니노의 제자로서 1594년 교황청 예배당의 정식 작곡가로서 팔레스트리나의 뒤를 이었다. 조반니 아니무치아(Giovanni Animuccia 1500-71)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팔레스트리나의 전임자였다.그는 특히 로마의 오라토리오 집회를 위하여 라우다를 쓴것으로 유명하다. 이 집회는 피렌체의 사제인 필리포 네리(Filippo Neri 후에 성자 명부에 오름)종교적인 강의와 신앙적인 구업을 목적으로 조직한 회합에서 발전되어 나왔는데 이 회합은 라우다를 노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이름은 회합을 하던 원래의 장소 즉 로마 어느 성당의 오라토리(기도하는 작은 예배당)에서 유래하였다. 라우다나 이와 비슷한 경건한 노래는 후에 대화나 다른 극화된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Flowers-1970--C10287829 jpg.JPG

 

 

● 빅토리아 : 팔레스트리나 다음으로 로마 악파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는 스페인 출신의 토머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Thomas Luis de Victoria 1548-1611)이다. 모랄레스의 경력이 보여주듯 스페인 작곡가들과 로마의 작곡가들 사이에는 16세기 낸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빅토리아는 1565년 로마의 예수회의 독일 대학(Collegio Germanico)에 갔는데 팔레스트리나와 함께 공부한것 같다. 1571년에는 팔레스트리나의 후임으로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1587년경에 스페인으로 돌아간 황후 마리아의 전속 사제가 되었는데 1603년 황후의 죽음에 임하여 유명한 진혼 미사곡을 썼다. 그의 음악은 오로지 종교음악뿐이다. 그의 양식이 팔레스트리나의 양식과 비슷하다고는 해도 빅토리아는 매우 개인적이며 전형적으로 스페인적인 강렬한 가사의 표현을 그의 음악에 종종 불어넣는다. 모테트 <오 모든 사람들-O vos ommes)은 그의 작품의 좋은 예이다. 이 곡은 팔레스트리나의 유연하고 평이한 리듬과는 달리 선율선이 마치 흐느끼는 절규처럼 분산된다. 반복되는 음을 가진 생생한 악구("attendite universi populi-보라 모든이들아")는 곧 포부르동의 흔적과 날카로운 불협화적 계류음들로 강조되는 통곡의 외침("sicut dolore meus-나의 슬픔같이")으로 이어진다. 팔레스트리나의 예술이 라파엘의 예술에 비유될수있다면 정렬적이고 종교적인 정신으로 가득차있는 빅토리아의 예술은 그의 동시대인인 엘 그레코의 예술과 비슷하다. 교회음악에서의 두각을 나타냈던 스페인 작곡가로서 스페인의 여러 도시에서 활약하다가 1574년 로마로 건너간 프란치스코 게레로(Francisco Guerrero 1528-99)와 연대적으로는 후기에 속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팔레스트리나 빅토리아 양식과 같은 카탈로니아 출신의 후안 푸홀(Juan Pujol 1573-1626)이 있었다. 16세기 프랑코-플랑드르 악파 작곡가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찬란한 전통을 장식한 사람은 필리페 데 뫁테(Philippe de Monte)와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였다. 팔레스트리나와는 달리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세속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테는 보다 현대적인 기법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대위법적인 기교를 보여주는 38곡의 미사와 300곡이 넘는 모테트를 작곡했다.

 

 

                               P1010025a.jpg

                                 엘그레코의 The Burial of Count Orgaz(1586) 그는 많은 매너리즘적 
                                 요소들을 하나의 황홀한 장면에 담아놓았다(Tokedo Spain Santo tome)

 

 

● 오를란도 디 라소 : 오를란도 디 라소는 16세기의 위대한 종교음악 작가곡가 중에서 팔레스트리나와 비견되는 사람으로 팔레스트리나가 미사곡의 거장인데 반하여 라소는 주로 모테트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경력과 악곡으로 볼 때 라소는 음악사상 가장 국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24세때 이미 마드리갈집과 샹송집 그리고 모테트집을 출판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2000곡을 넘었다. 참회 시편(1560년경)에 곡을 붙인 그의 작품들이 그의 교회음악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기는 해도 완전히 대표적인것은 아니다. 그의 주요한 모테트 선집 <위대한 음악작품-Magnum opus musicum>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만인 1604년에 출판되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생각이 깊고 오전하며 고상한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라소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고 정력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모테트의 전체적인 형식과 세부적인 면은 수사학적, 회화적, 극적으로 가사에 접근하는 데서 나오고있다. 만년에 이르러 반 종교개혁 정신의 영향을 받은 라소는 '보다 본질적이고 힘이 있는' 음악을 위하여 청년 시대의 '쾌활하고' '즐거운' 노래를 버리고 종교적인 가사에 곡을 붙이는 특히 신앙적인 마드리갈을 쓰는데 전심하였다. 그러나 라소양식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수는 없는데 그것은 그가 너무나 다재다능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악파의 대위법, 이탈리아풍의 화성, 베네치아 악파의 풍부함, 프랑스의 활기, 독일의 엄숙함 등의 모든 것을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16세기 다른 어떤 작곡가의 것보다 더 완전하게 이 시기의 성과를 총괄하고 있다.


 

                               P1010026a.jpg

                                 오를란도 디 라소가 뮌헨의 공작 알브레히트의 궁 안에있는 성 조지홀 
                                 안에서 악기 버지널에 앉아 실내 앙상블을 지휘하는 모습 3명의 소년 
                                 성가대원 20여명의 가수들과 15명의 기악주자들이 보인다. 미니어쳐는
                                 한스 밀리히(hans Mielich 1516-1573)가 라소의 참회 시편 필사본 안에
                                 그려놓은 것이다.(Munich Baterische Sattatsbibliothek. Mus Ms A...fo187)

 

 

              ■ 오를란도 디 라소:Cum essem parvulus(내가 어렸을때) ■

 

성 바울의 서신인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기초하여 1579년에 작곡한 이 작품에서 선율적인 주제 및 음형 짜임새 대위법적인 기교 형식등은 모두 가사에 대하여 완전히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사도 바울의 회상 'Cun essem parvulus(내가 어렸을 때)'가 칸투스와 알투스 성부에 나타나 어린이의 음성을 환기시키며 그들의 작은 움직임들은 작은 빠른 음형(runs)들에서 상징화 된다.(예 8.9에서 8분음표 참조, 본래의 음가를지닌 전체의 모테트는 NAWM 37에 수록됨) 어린아이게서 화자인 바울로 초점이 옮겨가면서 합창단의 나머지 4성부는 'Loquebar(나는 말했다)'를 노래부른다. 가사의 다음 부분에 나오는 수사학적인 대구--'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 가--라소로 하여금 음악상 이와 유사한 병행구조를 만들도록 했다 그는 "factus sum vir(내가 어른이 되었을때)" 에서 완전한 6성부 합창단을 사용하였다. 가장 극적인 대조는 "videmus nunc per speculum in aenigmate(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듯이 희미하나)" 와 "tunc autem facie ad faciem(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요)" 의 두 가사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videmus(본다)"는 다소 혼란스럽고 산만한 짜임새로 된 3개의 짧은 모방 부분으로 제한된다. 반면에 "facie ad faciem(얼굴과 얼굴을 )"은 낭송 양식으로 된 1음표 대 1음표 근음위치 화음이 두 번 들린다. 라소는 자신의 음악에 극적인 등장인물을 도입하였을 뿐아니라 서신의 이미지와 거의 모든 수사학적인 제스처를 맞추어 내었다.

 

 

                               P1010028a.jpg

                         ●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 di Lasso)「모테트-Cum essem parvulus ●

 

 

내가 어릴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 윌리엄 버드 : 16세기의 위대한 카톨릭 교회음악 작곡가로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영국의 위리엄 버드(William Byrd)였다. 1543년에 태어난 버드는 아마 소년시절 토머스 탈리스 밑에서 음악 공부를 했던것 같다. 1563년 그는 링컨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10여년이 지난 후에 그는 런던으로 옮겨가 왕실 예배당의 일원으로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카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을 떠날때 까지 그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1575년부터 그는 영국에 악보 인쇄하는 독점권--처음에는 탈리스와 공동으로 1585년 탈리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독자적으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느 1623년에 세상을 떠났다. 버드의 작품에는 영어 가사로 된 다성노래와 건반악곡 그리고 성공회에서 부르는 악곡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상의 성악 작품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라틴어로 된 미사곡과 모테트들이다. 당시의 영국의 종교적인 상황으로 보아 버드가 3곡의 미사곡(가각 3성부, 4성부, 그리고 5성부로) 밖에 쓰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들이 영국의 작곡가가 쓴 미사곡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버드의 초기 모테트는 아마 역사적인 종교 회합을 위해 쓰여진것 같다. 그러나 두 권의 <그라두알리아-Gradualia(1605년과 1607년에 출판)>는 전례용으로 만들어 졌다. 1605년 판 <그라두알리아>의 헌사에서 버드는 작곡가의 상상력에 영감을 주는 성경 말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성서의 가사에는 모습을 감추고 저장되어있는 어떤 힘이 있어서--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세부적인 면까지 꿰뚫어 보는 마음으로 신성한 것들을 묵상하고 숙고하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열망하고 있을 때 가사에 가장 알맞은 선율이 스스로 다가와 자유로이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알게되었다.

 

 

                ■ 윌리엄 버드:모테트 - Tues Petrus(너는 배드로라) ■


버드는 북음서 중에서 마태 16:18 부분을 발췌하여 성 사도 베드로와 바울위 축일을 위한 모테트의 기사로 삼았는데 이 부분은 그날 즉 6월 29일에 알레루야와 코무니온에서도 사용되던 구절이었다. 6성부로 된 이 모테트는 모음집<Gradualia seu cantionum sacrarum>(런던 1607)안에 출판되었고 버드가 널리 퍼진 모방 기법(pervading imitation)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자유로운 푸가로 시작되는데 첫번째 마디의 3개의 주제가 제2소프라노와 알토 성부에 각각 제시된다. 첫번째 주제를 제시하는 중에 버드는 '너는 베드로라(Tu es Petrus)'라는 가사에 다른 성부들과 불협화음이 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2분 쉼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의마있는 가사부분 중간에 쉼표를 사용하는 것은 빌라르트 악파에서는 싫어했던 것이다. 가사 "aedificabo Ecclesiam meam(내 교회를 세우리니)"에서 버드는 교회의 설립을 형상화하는 주제를 등장시키는데 이 주제는 우선 단3도로 상행한 후 순차진행하여 옥타브 상행하는 움직임으로 되어있다. (예 8.10 참조) 이 모티브는 음정 간격도 거의 변화시키지 않은 채 여러 성부에서 20번 이상 모방된다. 이에 못지않게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울 반석과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동음이어적으로 강조하고있는 'petram(반석)'이라는 가사의 페달인트도 자주 등장한다. 버드가 14마디동안 종지를 회피하고 마지막 알레루야에서 이따금 포부르동을 암시하고 있는 점은 16세기초 유럽대륙의 음악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버드가 교회를 세우는것에 대한 장엄한 은유를 사용한 것은 16세기말 마드리갈과 더 연관되어있다.

 

 

                              P1010031a.jpg

                                 ●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모테트 - Tu es Pertrus」●

                                           ...그리고 내가 이 반석 위에내 교회를 세우리니

 


                                         ■ 베네치아 악파 ■

 

● 베네치아의 사회적 여건 : 16세기에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반도에서 가장 중요한(로마 다음으로)도시였다. 독립된 도시국가로서 지리적으로는 개펄 위에 고립되어있어서 (본토에 몇몇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안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근접국가들은 분쟁으로부터 떨어져있었고 명목상 공화국이면서 실제로는 견고한 과두 정치이며 유럽과 동방을 잇는 주요 무역항구인 독립된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15세기에 권력과 부와 영광에 있어서 최고봉에 이르고 있었다. 16세기가 되어서는 전쟁과 그 밖의 불운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지만 과거 번영의 결과였던 성대한 문명은 그 어떤 감퇴의 기색도 없이 계속되었다. 베네치아 음악문화의 심장이자 중심지는 비잔티움식의 돔과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 그리고 엷은 초록빛을 띠는 황금색으로 가득찬 넓은 내부를 지닌 웅장한 11세기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었다. 베네치아처럼 성 마르코 대 성당도 독립되어있었다. 음악가들을 포함하여 이곳의 성직자들은 어떤 외부의 교회 권위보다도 베네치아 총독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장엄한 시민적 의식은 대부분 대성당이나 그 맞은편의 커다란 피아차(piazza;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베네치아 음악은 국가와 교회의 위엄을 표현 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모든 가능한 음향과 징식을 이용하여 공식적으로 과시되는 장엄하고 축제적인 행사에 연주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과 함께 베네치아의 생활에는 로마를 특징짓던 금욕적이며 신앙을 구심점으로 하는 특성이 거의 없었다는 기억해야한다. 베네치아는 종교를 보다 가볍게 받아들였으며 쾌락적이고 외방과의 무역은 베네치아로 특히 국제적이며 화려한 분위기를 갖게하였다. 성 마르코 대 성당의 음악은 국가 관리들의 감독을 받아왔으며 이 음악의 베네치아의 찬란한 전통을 이어가게 하는데에 어떠한 노고나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대성당의 성가 지휘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선망되는 음악분야의 직책이었다. 대성당에는 두대의 오르간과 엄중한 시험을 거쳐 선발된 오르간 주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언제나 이르난 예술가들이었다 16세기 성가대 지휘자들은 빌라르트와 로레, 자를리노 그리고 발디사례 도나티였다. 그리고 오르간 주자로는 자크 부스와 안니발레 파도비노와 클라우디오 케를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그리고 그의 조카인 조반니 가브리엘리(1557-1612) 등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단지 지휘자나 오르간 주자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작곡가들이기도 했다. 세기가 지남에 따라 북부사람들(빌라르트, 로레, 부스) 후임에 이탈리아 본국인들이 그 직책을 맡게 되었다. 16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은 특히 마드리갈에 공헌하였다. 또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오르간 음악을 만들어냈다. 베네치아의 음악은 풍부하고 꽉차있으며 대위법적이라기보다는 호모포니적이며 음향에는 변화가 많고 색채가 풍부하고 짙은 것이 특징이었다. 모테트에서도 다성적인 선들이 서로 얽혀있는 네덜란드 작곡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무게있는 수직화음적 화성이 일반적이었다.

 

 

                              P1010033a.jpg

                              자를라타니, 즉 부퐁파 코미디언들이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의 3개의 무대

                              위에 서있는모습. 전경에 Commedia dell'arte 단이 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류트를 연주한다. 16세기 말에 Giacomo Franco Forma의 동판화(Copenhagen

                              Kongelige Kobberstik Sam ling)

 


● 베네치아의 복합창 모테트 : 빌라르트의 시대부터 그리고 그 이전에도 베네치아의 작곡가들은 두 성가대를 위해 종종 곡을 썼다. 이들은 특히 대창으로 연주될 수 있는 시편에 이 방법을 썼다. 5개의 시편으로 구성되고 처음이 모두 laudate동사의 형태로 시작되어 5개의 laudate로 알려진 한 세트가 많은 축제일에 이 분리된 합창대에 의해 제1만과(Vespers)를 위해 불려졌다. 이런 종류의 연주는 보통의 그려진 제단을 치우고 아름답게 황금으로 조각된 제단을 드러내는 경우에 영광을 더하게 된다. 이러한 'cori spezzati(분리된 합창대)'는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것은 아니었으며 베네치아만의 고유한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팔레스트리나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2중 합창용으로 작곡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수법은 베네치아 작곡가들이 선호하던 호모포니적 유형의 합창 작법과 폭넓은 리듬조직에 적합했으며 더욱 장려되었다.오르간 뿐만아니라 다른 많은 악기들--색벗, 코넷, 비올 등--도 성부와 함께 연주되었다. 연주자의 수는 베네치아의 거장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조반니 가브리엘리 손을 거쳐 전례 없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즉, 합창단이 둘.셋.네개 혹은 다섯개까지 쓰였는데 각 합창단은 고성부와 저성부를 서로 다르게 조합하였다. 또 각각 다양한 음색의 악기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대창적으로 선율을 서로 주고 받기도 하고 독창 성부들과 교대하기도 하다가 무게있는 음향상의 절정을 이루기 위해 하나로 합류하기도 하였다. 가브리엘리의 모테트 <In ecclesiis>는 그 한 예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새로운 작곡 원리가 확립되었는데 그것이 곧 음향의 대조와 대립이다. 이 원리는 바로크시대 '콘체르타토(concertato)'양식의 기본요소가 되었다.

 

 

                              P1010036a.jpg

                                  ● 조반니 가브리엘리 :「모테트 - Hodie completi sunt」 ●

 


      ■ 조반니 가브리엘리 모테트「Hoide completi sunt dies pentecotes ■


성령강림제 제2만과에 쓰이는 안티폰의 가사에 작곡한 두 개의 4성 합창단과 오르간을 위한 이 모테트는 가브리엘리가 보편적인 다성기법에서얼마나 벗어나있는지를 보여준다. 모방기점(point of imitation)으로 시작하는 대신에 그는 번갈아가며 "completi sunt"란 가사에 붙은 4음으로 된 동기를 두 합창단 사이에 이동시켰다. 가브리엘리는 팔레스트리나의 부드러운 성악 선율대신 "dies pentecostes"라는 가사부분에 나오는 즐거운 들쑥날쑥한 모티브로 오순절 마지막날 기쁜 성령의 강림을 환영하는데 이 중 한 음절은 장식적인 불협화음에 불과한 16분음표에 붙여져있다.(예 8.11)(팔레스트리나 양식의 음절 하나에 주어지는 가장 짧은 음표는 미님 minim, 즉 2분음표이다) 첫번째 '알레루야'에서 처음으로 3박자가 나오고 베이스의 5도와 6도에 해당되는 음을 동시에 지닌 화음에 자유롭게 도입된 일부 불협화음을 7화음이 뒤따른다.(17마디 참조)비록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리듬적인 에너지와 음악적인 공상이 작용하고 있다는 인상이지만 언어를 그림처럼 나타내려는 욕망이 수많은 제스쳐 뒤에 숨어있다. 예컨대 "et tribuit eis chari smatum dona(그리고 성령이 그들에게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라는 가사에서 보면 짧은 8분음표 동기가 'tribuit'에 흩어져있고 우아한 돈꾸밈음(turns)들이 'charismatum'을 특징짓고 있다. 거브리엘리는 이 작품의 다채로운 음색에서 그 이전의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성령 강림제의 영광을 그려내고있다.

 

베네치아의 영향 : 가장 진보적인 악파로서 이탈리아의 어디에서나 찬탄을 받아온 베네치아 악파는 16세기 후기와 17세기 초기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가브리엘리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상당수에 달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그의 직속 제자는 독일의 하이리히 쉬츠(Heinrich Schutz)였다. 주목할만한 베네치아양식의 지지자는 함부르크의 히에로노무스 프레토리우스(Hiero nymus Praetorius 1560-1629)였다. 라틴어식으로는 야코부스 갈루스(Jacobus Gallus)라고 알려지기도 한 슬로베니아 태생의 야코프 한들(Jocob Handl 1550-91)은 올뮈츠 프라하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특히 2중 합창을 위한 모테트는 베네치아 양식과의 밀접한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제자인 독일의 한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가 쓴 모테트들은 주로 베네치아의 전형적인 특성--충실한 음향과 풍부한 화성--을 지닌 다성 합창용이다. 폴란드에서 칠렌스키(Mikola Zielenski 1615년 사망) 와 다른 많은 작곡가들의 힘으로 이 다성 합창양식이 발전되었다.

 

 

10047782jpg.JPG

  


                                             ■ 요 약 ■

 

16세기 후반의 음악에 관한 위의 논의는 우리가 르네상스의 한계로 정했던 1600년이라는 임의의 경계를 여러 번 넘어섰다. 그 이유는 물론 음악양식에 있어서의 변화가 시공간을 달리하였으며 복잡한 방법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 되었다는 것이다. 후기 르네상스의 특징은 확실히 17세기에도 남아있었으며 바로크 초기의 많은 특징은 16세기가 끝나기 오래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각 특징들이 1450년과 1600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로 인하여 음악적 스타일이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겠다.

 

● 짜임새(Texture) : 서로 비슷한 대위법적인 성부들로 이루어진 특징적 짜임새는 오케겜이나 조스캥의 음악에서 그러했듯이 16세말에 팔레스트리나와 라소, 버드, 그리고 가브리엘리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일반적이었다. 다른 어떤 특징들보다도 이러한 텍스쳐가 르네상스 음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편 호모포니가 모든 형태의 다성작법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 악파에 있어 이 기법이 크게 지배적이었던 것은 다가오는 시대를 알리는 하나의 조짐이었다.

 

● 리듬 : 16세기 선법체계 안에서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교대에 힘입어 리듬은 당세기 말에 이르자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밥적인 양식과 베네치아의 오르간 토카타같이 명백히 자유로운 악곡에서조차 비교적 안정되고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오케겜과 조스캥의 현대판 작품집에서는 마디줄이 이따금 흐름을 방해하는 침입자처럼 보이는데 팔레스트리나와 가브리엘리 버드의 현대판 작품집에 와서는 더이상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성악음악에서 기본적인 리듬은 alla breve의 2박 박절로 때때로 3박과, 또는 2박 안에 숨겨진 그룹과 교대되었다.

 

● 음악과 가사 : 무지카 레세르바타(Musica recervata), 회화적이고 표정이 풍부한 마드리갈의 필치 제수알도의 정도를 벗어난 반음계적인 탈선 그리고 베네치아의 대규모 합창단이 가지는 찬란한 음향 등의 모든 것은 음악에 있어서 생생한 외향적 표현으로 치닫는 16세기의 약동을 보야주는 것이다. 17세기에는 이러한 추진력을 더욱 확대시켜서 오페라의 칸타타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것을 구체화하였다. 순수한 기악형식(리체르카레, 칸초나, 그리고 토카타)의 생성으로 르네상스의 음악은 이미 가사를 초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은 바로크 시대와 그 이후에도 중단없이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의 독창곡들이 양식에 있어서 마드리갈과 거의 다를 바없는 서정적인 작품들이었다는 것에 비추어볼 때 1600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중요한 혁신 중의 하나는 독창곡이 극적 표현을 위한 매개체로서  쓰일 수 있음을 발견한것이었다. 제수알도와 가비리엘리가 인성의 앙상블을 통해 표현했던 격렬한 감정 상태가  이제는 기악으로 반주되는 독창곡으로 표현되었다.

 

 

                                 ■ 문헌자료 - 서양음악사(Grout & C. Palisca 공저) 참조 ■

  

                             

                              %25006%5B1%5Daa.jpg

 

 

                                     ■ Vivaldi:Violin Concerto in E RV.271「l'amorso」■

                                      



 

 

 

 

 

 

 


 

 

 

 

 

 

 

'서양음악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기바로크(2)  (0) 2015.07.11
후기바로크(1)  (0) 2015.07.11
16세기의 새로운 조류  (0) 2015.07.10
중세성가와 세속가(2)  (0) 2015.07.10
중세성가와 세속가(1)  (0) 201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