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16세기의 새로운 조류

미뉴엣♡ 2015. 7. 10. 20:44
♡ 16세기의 새로운 조류 ♡    2010/07/0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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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세기의 새로운 조류 ★●

 

 

                       ■ 1520 - 1550 동안의 프랑코-플레미시 세대 ■

 

1520년부터 1550년까지의 30년동안 음악의 표현이 끊임없이 대양해졌다. 모든 나라에서 성악의 새로운 유형과 형식이 프랑코-플레미시 거장들이 주도해오던 국제적인 양식을 서서히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기악의 양과 중요성도 증가되었다. 북유럽의 조스캥 이후의 세대는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외국 특히, 이탈리아와 남독일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그 거주지의 음악어법에 익숙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다. 한동안 교회음악은 그러한 변화에 저항하였다. 사실 몇몇 작곡가들은 오브레히트와 조스캥의 매우 개인적이고 모험적인 실험들에 대한 반동인듯, 오케겜의 부단한 대위법적 양식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보수적인 작곡가들 조차도 옛 악파의 카논과 이와 유사한 수법들을 거의 완전히 포기하였다. 미사곡에서의 다성 모델들의 모방은--모방미사--점차 하나의 정선율의 옛 기법을 대신하였다. 성가 선율들은 미사와 모테트의 주제로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 그 선율들은 매우 자유롭게 다루어졌다. 모테트와 미사에서 작곡가들은 이전의 표준이었던 4성부 보다 5내지 6성부의 곡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 니콜라 공베르 : 1520년부터 1550년까지의 북유럽 모테트양식은 니콜라 공베르(Nicolas Gombert 1495-1556)의 작품들에 잘 나타나있다. 조스캥의 제자로 추측되는 그는 카알 5세 황제의 궁정교회의 관리로서 왕실의 수많은 여행에 동반하여 빈, 마드리드, 그리고 브뤼셀에서 일했다. <바빌론 강가에서-Super flumina Babilonia>는 160여개가 남아있는 그의 모테트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계속 연결되는 모방적 구절들은 맞물려진 종지들로 연결되어진다. 이것은 삼박자이며 포부르동 화성으로 된 짧은 대조적인 부분에 의해 중단된다. 이런 고풍스런 스타일은 "Quomodo cantabimus canticuni Domini in aliena(어찌 우리가 이 방에서 주의 노래를 부르리오)" 라는 가사에 의해 촉발되었음이 분명하다. 휴지가 많지않고 대부분 조심스럽게 예비되고 해결되는 불협화음을 갖는 전반적으로 매끄럽고 일정하게 빽빽한 짜임새는 조스캥의 많은 작품들과 비교하면 극적이지 않을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에는 가사의 리듬과 일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섬세한 감각이 없는것은 아니다.

 

● 야코프 클레멘스 : 이 시대 또다른 중요한 플레미시작곡가는 클레멘스 논파로 불리우는 야코프 클레멘트 혹은 라틴어로 야코부스 클레멘스(대략 1510-1556)였다. 클레멘스는 Bruges와 많은 네덜란드 교회에서 일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다수의 샹송, 15개의 미사, 200여개가 넘는 모테트, 그리고 단순한 3성부의 다성음악이며 대중적인 선율을 선율을 선호한 네덜란드어 가사로 된 4편의 시편송집(Souterliedeken)이 있다. 클레멘스의 미사 중 하나를 제외한 모두는 다성음악적 양식에 기초하고있다. 그의 모테트는 공베르의 것들과 유사하지만 악구가 좀더 분명하게 구분되고 선율 동기가 가사의 의미를 좀더 조심스럽게 묘사하고있다. 그리고 종지와 선율 전체적인 윤곽을 통해 양식의 정의에 큰 주의를 기울이고있다.

 

● 르드비히 젠폴 : 스위스 출신인 루드비히 젠폴(1486-1542(43)은 이삭의 제자이며 주로 뮌헨의 바바리아궁정에서 일했다. 그이 미사와 모테트는 당시 독일에 있는 작곡가들의 경우처럼 양식면에서 오히려 보수적이다. 그러나 젠폴이 이룬 중요한 업적은 다른 분야에서였다. 그는 많은 독일 세속곡을 썼으며 루터파 교회를 위한 독일어 가사의 종교음악도 몇 곡 작곡하였다.

 

● 아드리안 빌라르트 : 공베르, 클레멘스와 젠플의 보수주의와는 반대로 아드리낭 빌라르트는 가사와 음악의 관계를 더 밀접하게 만든 선구자였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첨단 기법인 반음계주의와 리듬의 실험에 참여했다. 플랑드르에서 1490년에 태어난 빌라르트는 파리에서 무통으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회계장부에 의하면 그는 1515년에는 Ippolito I d'Este 추기경에 고용되어 로마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페라라와 밀란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후 그는 1527년 베네치아에 있는 성 마르코 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1562년 생을 마칠때까지 지휘와 작곡을 하였으며 그의 명성과 영향을 이탈리아 전역에 미치게 한 많은 뛰어난 음악가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제자들 중에는 자를리노(Zarlino), 치프리아노 드 로레(Cipriano de Rore), 니콜라 비첸티노(Nicola Vicentino),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그리고 콘스타초 포르타(Constanzo Porta)가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이루는 종교적 작품들에서는 가사가 음악적 형식의 모든 차원을 결정짓는다. 그는 일반적인 라틴어 발음의 강세에 유의하여 음 밑에 음정을 조심스럽게 놓아야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의 제자 자를리노가 공개한 가사붙이기에 대한 규칙들은 그의 관습과 가르침에 기초했던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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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드 리 안 빌 라 르 트 : O c r u x, s p l e n d i d o 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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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드리안 빌라르트 : 모테트 : O crux splendidor 시작부분 ●

 

                               십자가여 모든 별들보다 더 밝게 빛나며 온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 되었도다.

 


                                       ■ 민족양식의 발생 ■

 

이탈리아 ; 프랑코-플레미시 작곡가들이 16세기초에 서유럽 전역에 흩어져있었고 그들의 어법이 국제적인 음악언어였지만 각 나라는 그 나름대로의 뚜렷한 음악도 가졌다. 이 음악은 북부인들의 학문적인 예술보다 대중에게 더 잘 알려졌으며 결국 주된 음악 양식이 다양한 정도로 변형되도록 하였다. 이탈이아에서 그 과정이 가장 뚜렸하였다. 그 나라에서 외국것에서 자국것으로 음악 주도권의 변화는 플레미시악파의 아드리안 빌라르트와 그의 제자들이 베네치아에서 차지했던 위치를 보면 생생히 알수있다. 약 1515년경에 그는 이탈리아로 와서 1527년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교회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있는 음악 직책이었다. 빌라르트의 많은 이탈리아 제자들 중에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20-86)가 있다. 그는 후에 성 마르코 교회에서 일했으며 그의 제자겸 조카인 조반니 가브리엘리(1556-1613)는 그의 세대의 가장 유명한 베네치아의 작곡가가 되었다. 1609년에 장래성있는 젊은 독일 작곡가인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utz)가 조반니 가브리엘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베네치아로 왔다. 그래서 1세기도 못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그리고 네덜란드를 대신하여 유럽인의 음악적 삶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주도권은 2백년 동안 유지되었다. 16세기 초, 유럽의 모든 나라는 음악적인 면에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17세기 초에는 이탈리아에 의존하였다. 그러난 그러는 동안 각 나라는 또한 자국의 민족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 프토롤라(PTOROLA) ■

 

프토롤라 : 페트루치(Petrucci)가 1501년 베네치아에서 악보 인쇄에 착수했을 때 그는 샹송, 미사와 모테트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후 1504년부터 1514년까지 그는 11권의 유절형식의 이탈리아 노래집을 출판하였다. 이 노래들은 4성부로서 가사와 음이 1:1로 대응되며 뚜렷한 리듬 패턴, 단순한 온음계적 화성, 그리고 상성부에 선율이 놓이는 명확한 호모포니적 양식을 갖추고있다. 이러한 노래들을 프토롤라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바젤레타(bazelletta), 카피톨로(capitolo), 테르차 리마(terza rima), 스트람베토(strambetto) 등과같이 매우 자유로운 형식을 갖는 하부형식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프토롤라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기에 유행하였다. 일상적인 연주법은 최상 성부를 노래하고 나머지 성부들은 반주로서 연주되었을 것이다. 1509년과 1511년, 그리고 1520년대에 프란시스코 보시넨시스(Francisco Bossinensis)는 여러 작곡가들의 많은 프토롤라를 원곡의 성악 성부들은 그대로 두고 보통 하나의 내성부는 생략된 형태로 류트와 성악곡을 위해 편곡한 곡들을 출판하였다. 따라서 독창가수는 한 혹은 그 이상의 중요한 종지에서 즉흥 멜리스마적인 장식을 도입하여 작곡된 음표들을 매우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을것이다. 그 음악이 단순하며 가사는 대개 억제되지 않고 자유로뤄 호색적이고 풍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토롤라는 대중 혹은 '민속음악'이 아니었다. 그 배경은 이탈리아 궁정, 특히 만투아(Mantua), 페라라(Ferrara), 그리고 우르비노(Urbino)의 궁정이었다. 주요 작곡가들은 이탈리아인이었지만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북유럽인들도 몇 곡 썼다. 프토롤라는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전신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152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프랑스 샹송의 영식에 미묘한 영향을 주었다. 

 


               ■ 마르코 카라 프토롤라 : lo non compro piu speranza ■

 

이 '실망한 연인의 쾌활한 푸념'은 페트루치가 출판한 첫번째 악보집에 있다. 류트 태블러추어 악보의 4박마디에 있는 마딧줄은 때때로 마디마다 6박의 춤 리듬을 모호하게 한다. 때로는 2분 때로는 3분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헤미올라(hemiola)는 그세기를 통해 대중적인 칸초네의 특징이 되고 후에 17세기 모노디에도 쓰였다. 화성은 거의 모두가 현대의 분석용어로 화음의 근음에 해당하는 베이스 음에 기초한 화음들로 구성된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이 화음 양식은 자국과 외국의 작곡자들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라우다 : 프로톨라에 대응되는 종교음악은 대중적이고 비의전적인 경건한 노래인 다성 라우다였다. 가사는 때로는 이탈리아어로, 때로는 라틴어로 쓰여졌다. 이것은 4성부로 작곡되었는데 선율은 종종 세속노래에서 빌려왔다. 1507년과 1508년에 페트루치에 의해서 2권의 라우다 곡집이 출판되었다. 라우다는 보통 작은 규모의 경건회에서 무반주로 불려지거나 대부분 세 개의하성부를 악기로 연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프로톨라와 같이 라우다는 대부분 음절적이고 호모포닉적이고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는데 거위 항상 최상 성부에 그 선율이 놓였다. 간단한 화성적 짜임이지만 라우다는 종종 상당히표현적이다. 라우다는 분위기와 목적에 있어 의전 음악과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거의 그레고리오 성가의 주제를빌리지않으며 프랑코-플레미시 교회양식의 흔적도 많이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탈리아에 있는 네덜란드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라우다와 프로톨라로부터 화성적 작곡고ㅏ 단순한 음절적 가사 붙임의 가능성을 깨달았다.16세기 후반의 많은 작곡가들(예를 들어 팔레스트리나와 비토리아)의 음악에서 보여지는 낭송적인 악구들은 아마 라우다의 전통을 일부 이어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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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테냥에의해 파리에서 제작된 미사곡집「Masses」(1532) 표지 ●

                                 1532년 파리에서 피에르 아테냥에 의해 7권으로 발행된「Masses」의
                                 제2권 표지 거기에는 무통, 클로댕 드 세르미시, 피에르 드 망시쿠르의
                                 Misses가 포함되어있다. 가운데있는 가수들이 커다란 성가합창곡집을
                                 보고 플레인 찬트를 읽고있다.

 

  

                                      ■ 새로운 프랑스 샹송 ■


프랑스, 새로운 프랑스 샹송 : 라틴어가 미사곡에 사용되는 언어였듯이 프랑스어는 항상 샹송의 언어였다, 비록 16세기 초기에 미사와 모테트를 쓰는 프랑스 작곡가들은 국제적인 양식을 약간 수정하여 작곡하였지만 이 시기와 프란시스 1세(Fransis I, 1515-47)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 샹송 작곡가들은 시와 음악의 양면에서 민족적 색채가 더 뚜렷한 샹송의 유형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작품들은 최초의 프랑스 음악출판업자인 피에르 아테냥(Pierre Attaingnant)출판한 악보집에 실려있다. 그는 1528년부터 1552년까지 파리에서 50권이 넘는 샹송집을 출판했는데 모두 1500여곡에 이른다. 아테냥에 뒤를 이어 곧 다른 출판업자들이 등장하였다. 샹송의 대중성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6세기동안 출판된 수백곡에 이르는 류트용 사본, 류트 반주와 독창을 위한 편곡으로 알수있다.


● 클로드 세르미시 : 샹송 tant que vivray

프로톨라와 같이 선율은 최상 성부에 놓이며 화음은 3도와 5도 특별한 경우에는 6도로 구성된다. 종지에서 싱코페이션 대신에 세째 마디의 c#와 같이 불협화음이 되는 음이 '선행음' 효과를 내면서 강박에 온다.가사 각 행의 끝은 비교적 긴 음이나 혹은 반복된 음들로 분명히 표시된다.그래서 시형이 분명히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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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udin de Sermisy ; C h a n s o n : tant que vivray ●

 

                           내 몸이 성한 한 나는 힘없는 사라의 왕을 행동과 말과 노래와 화음으로 섬기리라.

 


아테냥의 초기 선곡집에 실려있는 대표적인 샹송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탈리아의 프로로톨라와 카니발 노래(canti carnascialeschi)와 유사하다. 이 샹송들은 가볍고 빠르며 강한 리듬의 4성부 노래로서 음절적이고 반복되는 음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 3박의 악절이 이있지만 2박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대개 호모포니적이며 최상성부에 주선율이 있지만 짧은 모방 부분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구분되는 짧은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aabc나 abca와 같이 쉽게 파악되는 패턴의 형식을 이루며 반복된다. 가사는 시형(詩型)과 주제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즐겨사용되던 주제는 시인에게 무든 종류의 즐거운 설명과 애매모호한 암시를 할 기회를 허용하는 연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든 가사가 경박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샹송 중에 하나인  클로댕 드 세르미시(Claude de Sermisi, 1490-1562)의 샹송 시작부분이 예 7.3에 예시되어 있다.(NAWM 53) 아테냥의 첫번째 선곡집에 실린 샹송들의 주요 작곡가는 세르미시와 클레망 잔캥(Clement Janequin 1485-1560)이었다. 잔캥은 특히 그의 묘사적인 샹송들로 칭송받았다. 그이 샹송들은 이탈리아 카치아와 유사하며 새의 지저귐과 거리의 외침소리 등의 모방을 도입하였다. 잔캥의 묘사적 샹송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중 하나는 전통적으로 마리아노 전투(1515)에 관해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전쟁 La Guerre>이라는 제목의 곡이다. 이것은 16세기와 그 후의 전쟁이라는 제목을 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의 선조이다. 분명히 유머러스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유명한 곡은 'le Chant des oiseaux(새들의 노래)'이다. 이 곡은 새가 지저귀며 짹짹거리는 소리로 가득차 있다. 

그 후의 프랑코-플레미시 샹송 : 파리의 아테냥 등 외에 16세기 초반 샹송의 추요한 출판가로는 리옹의 자크 모데른(Jacques Moderne 1532-60)과 앤트워프의 틸만 수자토(Tilman Susato 1543-55, 14권)가 있다. 앤트워프에서 출판된 샹송들은 거의 프랑코-플레미시 작곡가들, 주로 공베르, 클레멘스, 논 파파, 피에르 드 망시쿠르(Pierre de Manchicourt 1564 사망), 그리고 토마 크레키옹(Thomas Crecquillon 1557 사망)의 작품이었다. 대개 그들의 샹송은 파리 작곡가들의 작품들보다 더 대위법적이고 꽉 찬 짜임새, 유려한 선율선, 그리고 덜 분명한 리듬의 박을 특징으로 하였다. 사실 이 작곡가들은 옛 샹송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러나 더 호모포니적인 양식을 지향하는 프랑스 샹송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 : 독일에서는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늦게 다성음악이 발달하였다. 미네징거의 단선율 음악은 14세기까지 독일 궁정에서 번성하였고 마이스터징거의 음악은 1450년부터 그리고 특히 16세기 통해 도시와 마을에서 번성하였다. 프랑코-플레미시 작곡가들은 1530년경부터 독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 독일 리트 ; 번창하는 상업도시 사회의 생성과 함께 독일 다성 리트의 독특한 유형이 생겨났다. 1455년부터 1460년 사이에 만들어진 최초의 독일 다성 노래집 중 하나인 <로하머 노래집-Lochmer Liederbuch>에는 단선율과 테너 성부에 주선율이 놓인 3성부 곡들이 실려있다. 유사한 3성부 곡들은 1480년경에 만들어진 <글로가우어 노래집-Glogauer Liederbuch>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곡들은 때때로 최성 성부에 주선율이 놓이기도한다. 리트 작곡가들은 독일적인 선율재료에 프랑코-플레미시 전통에서 온 보수적인 작곡법과대위법적인 기교를 능숙하게 결합시켰다. 다성 리트를 쓴 최초의 진정한 거장들은 이삭(Issac)과 그의 동시대인인 하인리히 핑크(Heinrich Finck 1445-1527) 그리고 막시밀리안 환제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파울 호프하이머(Paul Hofhaimer 1459-1537)였다.(이삭의 리트 <인스부르크, 나는 너를 떠나리>의 두 가지 작곡에 대한 논의 참조, NAWM 52a와 b, 238번) 루드비히 젠플(Ludwig Senfl)에 이르러 리트느 예술적 완성에 이르렀다.그의 리트 중 몇곡은 가사의 언어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네덜란드 유형의 완숙한 모테트이며 그 양식의 가장 아름다운 예이다. 젠플은 또한 민속적인 테너 선율에 기초하여 보다 짧은 노래들을 많이 작곡하였다. 이 테너 선율들은 회화적이거나 해학적이면서도 어떤 지성적인 진지한 독일적인 성격을 보여주고있다. 독일 리트 모음집은 16세기 초반, 그 시대 독일 문화를 주도하던 뉘른베르크를 중심으로 계속 출판되었다. 1550년 이후 독일인의 취향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과 빌라넬라로 옮겨졌다. 결과적으로 리트는 중요성면에서 약화되거나 이탈리아의 특성을 지니게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리트는 루터파 교회의 코랄이나 찬미가를 위한 음악적 모델과 많은 음악적 재료들을 제공하였다.

 

● 쿼들리베트 : 주로 독일에서 쓰여진 노래의 한 종류로 쿼들리베트(quodlibet, 문자그대로 "당신이 좋아하는것 무엇이나")가 있었다. 이것은 어울리지않고 우스꽝스럽게 뒤섞인 가사를 만들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노래나 노래의 단편을 모아서 만든 곡이다. 그러나 많은 쿼들리 베트는 음악적으로 볼 때 건전하며 심지어는 예술적이다. 이 무렵 독일에서 발생한 비교적 덜 중요한 또 하나의 장르는 또 하나의 인문주의 연구 산물로서 고대 라틴 시구에 곡을 붙이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호라티우스(Hrace)의 <오드-Ode>가 있다. 이러한 곡들은 엄격한 낭독조의 양식으로 되어있다. 리듬은 길고짧은 음가의 결함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고전적 박절법에 의해 결정지어진 시의 길고 짧은 음절에 정확히 상응한다. 이러한 곡들은 때때로 고전 문학을 배우는 학교 과정에서 교육용 자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스페인 : 15세기 후반까지 스페인에서는 부르고뉴 악파와 프랑코-플레미시 작곡가의 작품들이 알려졌고 불려졌다. 동시에 다성음악 작곡을 위해 민족악파가 생겨났다. 이것은 독일에서와 같이 몇 가지 대중적 요소들을 혼합했으며 외국의 영향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5세기 말엽 스페인의 세속적 다성음악에 있어 주요한 장르는 비얀시코(villancico)였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프로톨라의 스페인판으로 간주될 수 있다. 후렴이 있는 짧은 유절형식의 노래로서 aBccaB의 전형적인 패턴을 가지고있다. 비얀시코는 최상 성부에 주선율이 놓이며 두 세개의 악기의 반주와 함께 독창으로 부르도록 된 것 같다. 그것들은 노래집들(cancioneros)에 수록되어있으며 많은 곡들이 류트반주 독창곡으로 출판되었다. 16세기초 중요한 시인이자 작곡가는 후안 델 엔시나(Juan del Encina 1469-1529)였다. 그의 목가극은 보통 비얀시코로 끝난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종교적 가사에 기초한 독창과 합창을 위한 훨씬 더 정교한 유럽 대륙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종교적 다성음악은 프랑코-플레미시 작곡가들의 영향하에 있었다. 공베르, 망시쿠르, 크레키옹 등은 때때로 스페인에서 활동했으며 그 무렵 스페인의 필사본들에는 이 거장들의 많은 작품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외국에서 도입된 기법의 기본적인 틀 안에서 스페인의 종교음악은 각별히 절제된 선율, 적당히 사용된 대위법적 기교, 그리고 종교적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의 정렬적인 강렬함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16세기의 가장 뛰어난 스페인 작곡가이며 1535년부터 1545년까지 로마에 머무는동안 교황청 교회의 일원으로 이탈이아에서 명성을 얻었던 크리스토발 데 모랄레스(Cristobal de Morales 1500-53)의 모테트 <잘못을 뉘우치자-Emendemus in melius>를 들으면 알수있다. 모랄레스는 다수의 16세기 스페인 작곡가의 일원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전적으로 스페인에서 활동하였다. 반면 모랄레스와 빅토리아와 같은 다른 작곡가들은 로마교회의 음악과 밀접히 연결되어있었다. 독일,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16세기 중반 이후 전통적인 프랑코-플레미시 기법이 점차 민족적 특성에 의해 주로 결정지어지는 새로운 종교와 세속음악 양식에 흡수되었다.

 

 

            ■ 크리스토발 데 모랄레스 : 모테트 - Emendemus on melius ■ 


이것은 회개적인 모테트이다.(가사는 재(災)의 수요일 예배의 레스폰소리로 사용된다) 모랄레스는 다른 4성부와 음악과 가사의 양면에서 독립적인 제5성부를 이용하여 이런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제5성부는 "사람아 너는 먼지에서 나왔으니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이 당시의 미사에서 이러한 가사는 성직자가 신자의 이마에 재를 묻힐 때 하던것이다. 반복되는 이 동작은 오스티나토 선율로 인해 음악으로 상징된다. 그 선법의 최종음 E와 5번째 음 A가 이 선율의 시작과 끝에서 교대로 들려진다. 이 엄한 조언과 대조적으로 다른 성부들은 촘촘한 거미줄과 같은 대위법으로 회개와 용서의 기도문을 부른다. 비록 내부의 많은 가사절들이 모방적으로 다루어지긴 했지만 유일한 정식 푸가 기법은 시작 부분의 짝지어진 성부 도입에서만 나타난다. 갑자기 사망의 날에(subito praeocupati die mortis, {27번째마디})" 라는 가사에서 음악이 단성적인 낭독조로 느닷없이 바뀌어진다. 또 하나의 극적인 표현은 "살피소서(Attende {69번째마디})" 라는 가사에서 보여지는 옥타브와 단6도 도약이다. 자주 화성적 종지가 이루어지지만 많은 경우 회피되어지기 때문에 리듬의 움직임은 꾸준히 계속된다.

 

동부 유럽 : 정도와 시기는 달랐지만 동유럽의 국가들은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음악발전에 참여하였다. 카톨릭 교회음악에 있어서만은 서유럽 성가에 기초를 두고있다. 그러한 예는 11-12세기 동부의 필사본들에서 발견된다. 어디에서나 이국적 요소들은 자국의 대중적 전통과 혼합되었다. 시퀀스와 트로프 그리고 전례극의 선율들에 모국어 가사가 붙여졌다. 동유럽 궁정에서 활동했던 서유럽 국가의 작곡가들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은 동유럽 음악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동시대 프랑코 플레미시 음악은 황제 카알 4세의 재위기간(1347-78) 동안에 보헤미아에 알려졌다. 폴란드 다성음악의 최초의 예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라코프 궁정의 하프시코드 주자였으며 모테트 작곡가였던 라돔의 니콜라스(Mikolaj z Radomia 1420-40)는 가수를 위한 가르침으로서 '포부르동(per bordunum)'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 중 하나였다. 16세기까지 폴란드와 보헤미아 작곡가들은 류트, 오르간, 그리고 기악 앙상블을 위한 음악뿐만 아니라 샹송, 미사, 그리고 모테트도 작곡하였다. 이시기의 폴란드의 오르간 태블러추어는 특히 중요하다. 카톨릭 교회음악의 선두 주자는 폴란드에서는 바슬라우(Waclaw of Szamotul 대략 1520-1567)이었고 보헤미아에서는 야콥 핸들(Jacob 'Gallus' Handl 1550-91)이었다.

 

영국 : 영국에서 음악의 생산은 장미전쟁의 혼란기 동안(1455-85) 주춤하였다. 헨리 7세의 재위 기간(1485-1509)에 재흥되기 시작했을 때영 국작곡가들은 비교적 고립된 상태에서 작업했던것으로 보여진다. 동시대 대륙음악의 발전상은 알려졌으나 프랑코-플레미시 음악가들은 1510년 이후까지 영국에 오지않았으며 새로운 양식의 계속적인 모방 대위법이 채택되기는 했으나 그 속도가 느렸다. 고립된 초기의 예들을 제외하면 이 기법은 1540년경부터 처음으로 찬미가와 모테트에 체계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는동안 본국의 세속음악의 생산은 계속되었다. 헨리 7세와 8세의 재위기간(1509-47)에 나온 필사본들은 궁정생활의 여러가지면을 반영한 다양한 노래와 3.4성부의 기악곡을 보여준다. 당시 영국의 궁정 생활은 어떤식으로도 대중적인 요소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의 영국 다성음악으로 현재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미사, 마니피카트(Magnificats), 그리고 봉헌 안티폰이 주를 이루는 종교 음악이다. 다수의 이러한 작품들은 동시대 대륙음악이 표방했던 더 일반적인 4성부의 모방적 짜임새와 대조적으로 5내지 6성부의 더 풍부한 음향에 대한 영국인들의 선호를 보여준다. 이에 부합하는 음악의 화성적 측면에 대한 그리고 대조되는 성악그룹의 사용으로 얻어지는 다양한 음향의 가능성에 대한 강한 느낌이 분명히 있다. 16세기 내내 지속되었던 영국의 특성은 가사의 한 음절에 긴 멜리스마적인 악절을 쓰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테트의 코다 부분에 종종 나타나는 일종의 자유 모음창법으로 여기서 대단히 이름답고 표현적인 악절이 흘러나왔다. 16세기 초 영국 작곡가들의 선두 주자는 윌리엄 코니시(William Cornysh1465-1523)와 로버트 페어팩스(Robert Fayrfax 1464-1521)였다. 윌리엄은 세속음악과 모테트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로버트는 미사와 다른 종교적 작품으로 유명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이튼 성가집(Eton Choirbook)에 수록되어있다. 이것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영국음악 필사본으로 평가된다. 이 성가집은 1490년경과 1502년 사이에 이튼 칼리지를 위해 편집되었다. 본래는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67개의 안티폰이 수록되어있었고 대학 설립법이 요구하는 매일의 특별 예배에 사용되었다.

 

 

                  ■ 윌리엄 코니시:Partsong : My love she monurneth ■


베이스에서 먼저 들리는 선율은 전부터 있던 곡이었을 것이다. 비록 테너가 베이스와 함께 카논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럽대륙의 노래 편곡과 마찬가지로 선율은 테너 성부에 위치하고 대위선율들이 그 위와 아래에 작곡되었다. 여기서 반주 성부는 대륙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분명히 성악을 위한 것이며 화려한 장식 악구로 종지에 기여한다. 그당시의 가장 위대한 영국 음악가는 의심할것도 없이 존 테버너(John Taverner 1490-1545), 그는 4년 동안 옥스포드 칼리지에서 합창 지휘를 했는데 이것은 후에 Christ Church(옥스포드 대학의 기숙사)가 되었으며 그당시에는 40명의 큰 합창단을 가지고 있었다. 테버너의 축제 미사들과 마니피카트들은 거의16세기 초반의 풍부하고 화려한 영국양식--경우에 따라 동형진행적 악절과 약간의 모방을 사용한--을 대변한다. 테버너의 미사<Western Wynde>는 16세기에 이 선율을 바탕으로 씌어진 영국 작곡가들의 세 개의 작품 중 하나이다. 세곡은 모두 정선율을 전통적인 방법으로다루지아노고 오히려 일련의 변주곡으로서 16세기 후반의영국 건반악기 변주곡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와 유사한 기법은 미사<Gloria tibi trinitas>에서 사용되었다.

 

 

               ■ 존 테버너:Benedictus from Missa Gloria tibi trintas ■

 

이 미사는 1520년 칼레(Calais) 근교에서 있었던 영국의 헨리 8세와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회담에서 연주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미사는 또한 다른 이유로도 유명하다. 베네딕투스에서 "in nomine Domini" 라는 가사에서 정선율은 가장 애호되는 기악 변주곡이 되었으며 종종 'in nomine'로 축약되기도 했다. 정선율은 삼위일체 주일의 저녁기도에 불리우는 첫째 안티폰의 솔즈베리 대성당판(전례)이다. 그 성가는 테너에서 부분적으로한번 불려진 후 알토에서 불려지는데 이때 in nomine Domini라는 가사는 27마디에 걸쳐 매우 멜리스마적이고 자유로운 모방 대위법으로 한 번 불려진다. Osanna에서 테버너는 같은 성부에서 다시 그 전체 성가의 음가를 반으로 줄여 반복한다. 그리고 곡은 모방의 기미가 거의 없는 6성부로 되었는데 이렇게 자유롭게 모음으로 노래하는 것이 당시 영국음악의 특징이었다. 16세기 중엽 영국 작곡가 중의 선두 주자는 크리스토퍼 타이(ChristopherTye1505-1572), 토머스 탈리스(Thomas Tallis 1505-85), 로버트 화이트(Robert Whyte 1538-74)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탈리스였다. 그의 작품들은 16세기 초기와 후기의 영국 양식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고있으며 그의 경력은 이시기의 영국 교회음악에 준 종교적인 큰 변동과 혼란스러운 정치적 변화를 반영해주고있다. 헨리 8세 밑에서 그는(하나의 모방 미사를 포함한) 여러 미사곡과 봉헌 안티폰을 썼다. 에드워드 6세(1547-53 재위) 밑에서는 영국 예배를 위한 음악과 가사가 영어로 된 앤섬을 그리고 메리 여왕 즉위한 후에는 다수의 라틴 찬미가와 (아마도)7성부의 대규모 미사를 썼다. 엘리자베스 여왕 밑에서는 라틴어와 영어 가사로 된 음악을 두가지 다 작곡하였다. 그의 후기작품들 중에 두곡의 애가(Lamentations)가 있다. 이것들은 예언자 예레미아의 시구에 붙인 모든 곡들 중에서 가장 감명깊은 것들이다. 이 가사는 15세기 중엽 직후 처음으로 작곡가들의 주의를 끌었으며 16세기에는 교회음악의 뚜렷한 유형을 이루었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한가지 양상(16세기 영국음악의 양상이기도 한)은 선율이 본질적으로 성악적이라는 것이다. 선율을 듣거나 부를때 사람들은 이것들을 추상적인 선율선의 상호작용으로서가 아니라 목소리의 상호작용으로 지각한다. 선율의 곡선은 가사의 자연스러운 종지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있으며 매우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사의 내용을 전하고 가수를 위해 매우 자연스럽게 쓰여져있다.

 

영국 교회음악 : 영국교회는 헨리 8세기 통치하던 1532년에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분리되었다. 이것의 배경이 이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것이었기 때문에 예배나 음악에 즉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 예배에서 영어가 점차 라틴어를 대신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1549년 에드워드 6세의 신앙 통일령에 의해 확정되었다. 이것은 그때부터 모든 공공 예배는 영국 국교회의 공공 기도서에 의거한 예배의식을 따르는 것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선포한것이다. 메리 여왕시절 로마 카톨릭으로의 짧은 귀환이 있었지만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영국교회의 의식이 회복되었으며 영국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확립되었다. 물론 이러한 모든것은 교회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1548년 에드워드 6세는 링컨대성당의 사제장과 참사회에게 이제부터 그들은 오직 영어로 노래해야하며 모든 음절 하나하나에 단순하고 뚜렷한 하나의 음을 붙여야한다고 경고하였다. 다시 말하면 평범하고 음절적이고 단성적인 양식으로 작고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16세기 초반의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중후한 카톨릭 음악으로부터의 그렇게 철저한 변화는 영국작곡가들에게는 불행으로 여겨졌다. 다행히 더 심한 요구들은 후에 약간의 대위법을 허용하는 정도까지 완화되었다. 탈리스와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1543-1623)의 라틴 모테트 몇 곡은 영어로 번역된 후에도 여전히 애창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특정한 대학예배와 라틴어가 회중에게 친숙했던 교회 안에서 라틴어의 계속적 사용을 특별히 허용하였다. 그래도 언어와 예배의식 변화의 궁극적인 결과는 영국 교회음악의 새로운 양식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분야에서 그들의 작품이 라틴 교회음악에서처럼 광범위하거나 중요하지 않지만 타이와 탈리스는 새로운 양식에 기여하였다. 버드는 로마카톨릭 신자였지만 영국교회를 위한 5개의 서비스(Services)와 60개 가량의 앤섬(anthems)을 작곡하였다. 이중 몇 곡은 질적인 면에서 그의 라틴모테트, 미사와 동등하다. 올랜도 기번스(Orlando Gibbons 1583-1625)는 종종 영국 교회음악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그의 작품들에 라틴 전통에서 유래한 기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정신적인면에서 철저히 영국적이다. 토머스 윌크스(Thomas Weelkes 1575-1623)와 토머스 톰킨스(Thomas Tomkins 1572-1656) 또한 영국 교회음악의 초기 작곡가들의 일원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영국교회음악의 주요 형식은 서비스와 앤섬이다. 완전한 서비스는 아침과 저녁기도(로마의 조과[matlus]와 만과[vespers]에 해당하는)의 일상부를 위한 음악과 종종 키리에와 크레도만이 작곡되는 성찬식(Holy Communion 로마의 미사에 해당하지만 영국 교회음악의 체계안에서 덜 중요한 위치를 갖는)을 갖는 음악으로 구성된다. 서비스는 대서비스(Great Service)와 소 서비스(Short Service)가 있다. 이용어들은 작곡된 항목의 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 음악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대서비스는 대위적이고 멜리스마적이다. 소서비스는 화성적이고 음절적이다. 영국 교회음악의 가장 좋은 예중 하나는 버드의 <Great Service)이다. 영국의 앤섬은 라틴의 모테트에 해당한다. 앤섬의 유형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후에 완전 앤섬(full anthem)이라 지칭된, 순수하게 합창을 위한것으로서 항상 대위적 양식이며(원칙적으로) 무반주였다. 톰킨스의 <When Davi'd Heard>가 한 예인데 감정적인 가사를 특별히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처리했다. 운문 앤섬(verse anthem)은 오르간 혹은 비올의 반주가 붙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독창자를 위한 것으로서 합창이 짧고 교대되는 악절을 부른다.이 유향은 분명히 콘소트, 노래에서 발생된 것인데 17세기 동안 영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 마드리갈과 연관된 형식들 ■

 

마드리갈과 이와 연관된 형식들 : 마드리갈은 16세기 이탈리아 세속음악의 가장 중요한 장르였다. 그것을  통하여 이탈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마드리갈은 짧은 시를 통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14세기 마드리갈과 이름만 같았다. 트레첸토(trecento) 마드리갈은 후렴(리토르넬로)이 있는 유절형식의 노래였다. 16세기 초의 마드리갈은 일반적으로 후렴이나 음악과 가사의 구절이 틀에 박혀 반복되는 옛정형시(formes fixes)의 어떤 다른 양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프로톨라와 같이 마드리갈은 소네트, 발라타, 칸초네, 오타바, 리마, 그리고 마드리갈과 같이 음악에 붙이기 위해 표현적으로 쓰여진 시 등의 다양한 시의 형태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마드리갈을 위해 쓰여진 가사의 대부분은 자유로운 리듬구조와 적당한 숫자의 7음절 또는 11음절행으로 이루어진 한 연으로 되어있다. 마드리갈은 많은 중요한 면에서 프로톨라와 다르다. 시는 더 고상하고 진지했으며 종종 페트라르카(Petrarch), 벰보(Bembo), 산나자로(Sannazaro), 아리오스토(Ariosto)와 16세기 말엽의 타소(Tasso)와 구아리니(Guarini)와 같은 뛰어난 시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프로톨라의 음악은 본래 시를 노래하기 위한 곡조였으며 각 행의 끝은 종지가 오며 보통 두 개의 긴음이 있었다. 하성부들은 베이스에 대해 거의 3도와 5도로 구성된(기본위치 3화음) 화성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마드리갈은 시의 각 행을 훨씬 더 자유롭게 다루었는데 이를 위해 다양한 짜임새와 그리고 가사의 한 구절에 기초하여 일부는 대위적이고 일부는 화성적인 일련의 보통 중첩된 부분들을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것은 마드리갈의 작곡자가 시의 진지함, 고상함, 그리고 예술성에 걸맞는 음악을 쓰려했다는 점이며 시의 사상과 정열을 청자에게 전달하려했다는 점이다. 마드리갈의 발생은 이탈리아 시의 취향과 비평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추기경 피에트로 벰보를 따라 시인, 독자, 음악가들은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칸초네와 그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사상으로 되돌아갔다. 벰보는 페트라르카의 작품에서 모음, 자음, 모음과 자음이 합처져 소리가 나는 음악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작곡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대위법으로 이러한 음향 효과를 모방하도록 영감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초기 마드리갈 작곡가에 의해서 붙여진 많은 가사들은 페트라르카의 것이었다.후기 작곡가들은 페트라르카를 모방한 시인들과 다른 근대적인 시인들의 것을 더 선호하였는데 이들은 거의 모두가 그의 영향 아래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1520년경부터 1550년까지 초기 마드리갈 작품의 대부분은 4성부로 짜여졌다. 16세기 중엽 이후 5성부가 규칙이었다. 그러나 6성부곡도 종종 있었으며 때때로 8혹은 10성부의 곡도 있었다. '성부(voices)'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드리갈은 한 가수가 한 성부를 부르도록 의도된 성악 실내음악곡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항상 그러했듯이 악기의 중복 혹은 대체가 가능했고 일반적이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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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성이 리드하는가운데 파트보(성악악보)를 읽고있는 한 4중창단 ●

 

 

남성이 주도하는 가운데 파트악보를 읽고있는 한 4중창단. 의상이 부유해 보이는것으로 볼 때 이들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은밀한 섬에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연주하는 귀족 신분의 아마추어들로 보인다.(Bourges, Musee de Berry)

  

마드리갈 가사 : 대부분의 마드리갈 가사들은 주제가 감상적이거나 연애시였으며 전원시에서 빌려온 장면과 암시로 표현되었다. 일반적으로 가사는 마지막 한 두 행에서 짤막하고 날카로운 절정에 이른 후 끝난다. 마드리갈은 각종 궁정 사교모임에서 불려졌다. 이탈리아에서 마드리갈은 특히 비공식적인 그리고 공식적인 학술모임(academies)에서 불려졌다. 이 모임은 15, 16세기의 많은 도시에서 문학과학 혹은 예술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고 토론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이러한 모임에서 연주자들은 주로 아마추어였지만 1570년 이후에는 명가수로 구성된 전문적인 그룹들을 왕자와 디른 후원자들이 그들 자신과 손님들의 여흥을 위해 고용하였다. 마드리갈은 또한 연극과 다른 무대 예술에서 불려졌다. 이탈리아에서 마드리갈과 그와 유사한 다성노래 작품들은 무수히 많이 작곡되었다. 약 2000개에 달하는 선곡집이 1530년과 1600년 사이에 출판되었고 그러한 추세는 17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초기 마드리갈 작곡가들 ;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초기 작곡가로는 피렌체에서 활동한 베르나르도 피자노(Bernardo Pisano 1490-1548)와 프란체스코 드 레이욜(feancesco de Layolle 1492-1540), 그리고 프랑코-플레미시 악파의 필리페 베르들로(Philippe Verdelot 1480-1545)가 있으며 로마에서 활동한 피자노와 베르들로와 콘스탄초 페스타(Constanzo Festa 1490-1545)가 있다. 페스타는 16세기 초에 교황청 교회에서 일했던 몇 안되는 이탈리아인 중의 한 사람이고 북유럽에서 온 작곡가들과 진지한 경쟁을 했던 최초의 이탈리아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다. 아드리안 빌라르트와 야코프 아르카델드는 북유럽인이었으며 한동안 교황청 교회의 악장을 지내다가 후에 파리 왕실교회의 단원이 되었다. 피자노와 페스타의 작품과 베드를로의 4성부곡과 같은 최초의 미드리갈은 짜임새에 있어 프로톨라와 비슷했는데 대부분 호모포니적이고 행 끝에 여유있는 종지를 갖는다. 베르들로는 모테트와 같은 짜임새로의 변화를 시도하였는데 빈번한 모방, 변화하는 성부그룹 그리고 후기 마드리갈의 특징인 종지에서 겹치는 성부가 등장한다. 아르카델트 또한 베르들로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의 마드리갈 <Ahime,dov'e 'I bel viso>는 변화된 양식, 호모포니적 인 프로톨라와 더 절실히 모방적인 마드리갈 사이의 중간 단계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야코프 아르카델트;마드리갈:Ahime, dov'e' l bel viso ■

 

1538년경에 작곡된 이 마드리갈은 초기 단계의 두 가지 특징을 예시해준다.한편으로 호모포니적으로 움직이며 정돈된 리듬을 사용하고 시형식을 엄격히 고수하는 면은 샹송이나 프로톨라와 비슷하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곡은 미묘한 표현 기법으로 가득차 있다. 감정이 가득 담긴 <mio caro thesoro-나의 사랑하는 보물 예7.4> 이라는 가사는 C장조 화음에서 지속되는 Bb장조 화음으로 바뀌면서 강조된다. Bb장조 화음은 이 곡의 선법 밖의 화음이며이전 화음과의 교차관계(cross relation)를 야기시킨다. 25번째 마디에서 <Oime chi me'I ritiene-아 그것에서 나를 떼어놓는 자가 누구더냐>라는 부분의 악절은 호소하는 듯한 병행 6화음으로 짜여졌고 동시에 모방을 도이하였다. 그시대의 교회음악이 청자에게 종교적 가사의 메시지로 감동을 주는데 실패했다고 비평했던 시릴로 프랑코 주교(Bishop Cirillo Franco)는 이 마드리갈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다 이 빛은 작곡가들이 감정의 소통이라는 음악의 일차적인 목표를 위해 곧 어려운 푸가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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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코프 아르카델트 : 마드리갈 : Ahime dov'e' I bel viso ●

                                     나의 귀한 보배 지선함이요 오, 누가 그것은 나에게서 떼어놓는가

                                     누가 그것을 나에게서 숨겨놓는가?

 

 

                               ■ 페트라르카(PETRARCA) 운동 ■


페트라르카 운동 : 16세기에, 14세기의 시인 페트라르카가 세인의 존경을 받은데는 시인이자 정치가인 그리고 추기경이었던 피에트로 벰보(1470-1547)의 역할이 막대했다. 벰보는1501년 페트라르카의 'Canzoniere'를 편집하였다. 이 편집 과정에서 그는 페트라르카의 작품이 이미지나 의미를 바꾸기 위해서라기보다 단어의 소리때문에 종종 수정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 몇몇 시인들보다 더 흥미를 가졌던 페트라르카 그의 시에서 추구했던 두가지 반대되는 특성--유쾌함(piacevolezza)과 근엄함(gravita)을 지적해 내었다 유쾌함의 범주에는 우아함, 감미로움, 매력적임, 부드러움, 쾌활함 그리고 위트가 포함되는 반면 근엄함의 범주엔 소박함, 위엄, 장중, 장려, 그리고 웅장이 포함된다. 리듬, 운(韻)의 거리, 한행당 음절의 수, 악센트의 패턴, 음절의 길이, 그리고  특정한 모음과 자음 소리의 특성은 모두 시를 유쾌하거나 근엄하게 한다. 작고가들은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음향적 가치에 민감해졌다. 그들은 아마「Prose della volgar lingua」(1525)라는 벰보의 책이나 벰보 자신에 의해 깨우쳐진 듯한데 이는 벰보가 1513년에서 1520년까지 로마에서 일했으며 그후에는 베네치아에서도 일했기 때문이다. 피자노는 1520년에 17개의 페트라르카의 칸초네를 출판하였다. 1559년에 출판된 빌라르트의 Musica nova(1540년대 작곡된듯)는 25개의 마드리갈을 포함하고있는데 이중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 곡을 붙인것이다. 여기에는 매우 훌륭한 선구자격인 'Aspro core'(NAWM 57)가 포함되어있다. 치프리아노 드 로레는 페트라르카의 'vergini'--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문으로서「Madonna Laura의 죽음에 관하여」란 연작시의 끝을 맺는다--에 기초한 11개의 마드리갈을 작곡하였다.

 

치프리아노 데 로레 : 치프리아노 데 로레(1516-65) 역시 페트라르카의 시에 열중하였다. 그는 페트라르카의 시의 이미지, 표현, 그리고 기법적인 면에서 매우 세련된 음악을 붙였다 플레미시에서 태어난 로레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잠시동안 그의 스승 빌라르트의 뒤를 이어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교회에서 음악감독을 역임했지만 조로 페라라와 파르마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그의 세대의 마드리갈 작곡가의 선두 주자였으며 16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는 마드리갈의 경향을 확립시킨 중요한 혁신적인 작곡가였다.

 

 

                            ■ 아드리안 빌라르트 : 마 드 리 갈 ■

                          (Aspro core e selvaggio e cruda voglia)

 

페트라르카의 이 소네트는 아마도 충실한 가사 낭독법과 생생한 표현을 지향하는 출발을 도운듯하다. 빌라르트는 첫행과 둘째 행의 대조를 위해 뚜렷한 음악적 병행구를 고안하였다. 첫행에서 마돈나 로라의 "사납고 무자비한 마음"은 겹자음과 거치른 음향으로 무겁게(gravita) 표현되었으며 그녀의 "상냥하고 얌전하며 천사같은 얼굴"은 유음(r과 l)낭낭하고 부드러운 음향으로 가볍게(piacevole) 표현되었다. 첫행에서 빌라르트는 병행 장3도를 포함하는 장6도와 장3도의 보다 거칠은 협화음을 사용했으며 선율 진행에 있어서는 온음과 장3도를 선호하였다. 둘째행에서는 단3도와 단6도와 같이 보다 감미로운 협화음을 선택했고 임시내림표를 통해 반음과 단3도에 의한 선율 진행을 실현시켰으며 교차 관계를 피했다. 그의 제자인 자를리노가 이러한 감정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그 기법들(그가 찬성하지 않았던 병행 장3도는 제외하고)과 똑같은 작법들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관심을 끈디 첫 행에서 빌라르트는 장6도 뒤에 5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거칠은 효과를 얻었다. 이것은 불완전 협화음이 가장 가까운 완전 협화음으로 진행해야한다는 규칙을 어긴것이다. 보다 특징적인 음악적 이미지는 "Quando e 'l di chiaro(빛나는 낮에)" 와 "e quando e notte  oscura(어두운 밤에)" 사이의 대조이다. 첫째 구절에서 성부들은 밝은 C장조 화음을 향해 올라간다. 반면 둘째 구절에서 소프라노는 한 옥타브 내려와서 Bb을 지나 어두운 A단조 화음으로 내려간다. 작곡가는 14행의 소네트를 긴 모테트의 두 부분처럼 둘로 나누었다. 첫부분은 8행까지이며(ottava) 둘째 부분은 나머지 6행으로 이루어진다.(sestina). 첫 부분은 선법의 5음으로 끝나며 둘째 부분은 최종음으로 끝난다.

 

 

                  ■ 자를리노;가사에 하모니를 붙이는것에 대하여 1558 ■

 

작곡가가 거칠음과 쓰라림같은 겻들을 표현하기 위해 악곡의 성부를 배치할 때 이들이 반음이 없는 움직임, 즉 온음과 장3도(ditone)같은 것들로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는 본래 약간 거칠은 장6도와 장13도를 콘센투스(정선율)의 가장 낮은 음 위에서 들리도록 해야하며 가장 낮은 음으로부터 4도나 11도의 계류음을 쓰는데 좀더 느린 움직임에서는 7도의 게류음도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작곡가가 비탄과 슬픔의 효과를 표현하고자할 때에는 그는(주어진 법칙을 지키며) 반음과 단3도(semi ditone)같은 음정으로 진행하는 움직임을 쓰며 종종 악곡의 가장 낮은 음으로부터 단6도나 단3도를 이루는 음정을 사용한다. 이들은 천성적으로 감미롭고 부드러운데 특히 신중한 판단에 따라 올바르게 쓰여질 때 그러하다. 그러나 여러 효과들의 원인은 위에 기술한 방법으로 쓰여진 거론된 음정들만이 아니고 성부들이 노래불려질 때의 움직임도 원인이 된다는것에 주의하여야한다. 이 움직임에는 본위적인(本位的:natural)것과 임시적(accidental)인것이 있다. 본위적 움직임은 임시표의 개입 없이 악곡의 자연스런 음들 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임시적 움직임은 임시표에 의해 만들어진 음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이들은 #과 ♭의 기호로 표시된다. 본위적 움직임은 약간 기운이 빠진 듯한 임시적 움직임보다 더 활기가 있는데 이런 이유로 전자는 거칠음이나 쓰라림같은 효과의 표현에 사용되며 후자는 비탄과 슬픔 같은 효과를 위해 쓰여질 수 있게된다.

 

조세프 자를리노. 「Le Istitutionai harmoniche」제3권 31장 Vered Cohen 영역의 자를리노, 「On the Modes」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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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프리아노 데 로레 - 마 드 리 갈 : 「Datemi pace」 ● 

                                       내게 평화를 다오 오 갈피를 못잡는 나의 생각들이여 [기억은]

                                       나의 남은 모든것을 부수어 버릴것이라네.

 


반음계적 진행과 선법외의 음들을 통한 반음계에 대한 탐구는 고대 그리스의 반음계적 이명동음적 음악을 부활시키려는 실험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자극을 받았다. 실험가들 중 가장 여향력있는 사람은 니콜라 비첸티노였다. 그는 1555년에 '현대 관습에 맞추어진 고대음악(L'antica musica ridotta alla moderna prattica)'과 같은 부흥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논문을 출간하였다. 그는 아르지쳄발로와 아르치오르가노를 직접 고안하여 제작하였다. 이것들은 당시의 조율법에 따른 일반적인 키보드로는 불가능한 반음정과 마이크로 음정의 진행을 포함하는 음악 연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비록 많은 동시대 사람들이 그의 사고와음악을 비웃었지만 그의 몇몇 마드리갈은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그 예로 1572년 그의 다섯번째마드리갈집에 수록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를 가사로 한 <Laura ch'el verde lauro>가 있다. 이 악곡의 한 지점에서그는 모방을 위한 동기로서 단3도와 두개의 반음이 하행하는 그리스의 반음계적 테트라코드를 사용하였다.(예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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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콜라 빈첸티노 : 마 드 리 갈 : Laura ch'el verde lauro ●

 

                                       바람은 푸른 월계관과 금빛 머리칼이 속삭이도록  불어오네

 


이러한 종류의 반음계주의는 16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반음계적'인 기보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보다 짧은 음의 사용으로 (예를 들어 ♩로 표기되던 음가를 이분음표(ㅇ)로 표기하여) 이전의 C대신 C중앙선로 표시하는 4/4박자의 음악을 작곡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 페이지에 검은 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그 기보법을 'chromatic'--즉 이전 기보법의 하얀 음표의 머리를 검게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작곡가들은 검은 음표들을 '어두운' '밤'그리고 '눈 먼'과 같은 가사에 붙일 수 있게되었다. 이것이 실제 소리에 있어 차이가 없고 단지 그 페이지를 보고있는 가수들 만이 인식할 수 있는 일종의 눈음악(eye-music)에 불과했지만 작곡가들은 종종 이와 같이했다. 이점은 최소한 16세기 중엽 이후까지 마드리갈이 청중보다 연주가의 즐거움을 위해서 대부분 작곡되고 노래되었다는 사실을 예시해준다. 이 음악은 한 마디로 사교 음악이었지 연주회용 음악은 아니었다.


후기 마드리갈 작곡가들 : 당세기 중엽 이후 마드리갈을 발전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햇던 북부의 많은 작곡가들 중 오를란도 디 라소, 필리페 데 몬테, 그리고 자케스 데 베르트 이 세 사람은 곡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를란도 디 라소(1532-1594)는 교회움악 작곡가로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의 재능은 마드리갈과 샹송, 그리고 리트에서 잘 나타나있다. 필리페 데 몬테(1521-1603)는 라소와 같이 종교와 세속, 모든분야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마드리갈을 쓰기 시작했고 비엔나와 프라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들 밑에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끊이지 않고 작곡하였다. 그는 서너권의 「영적 마드리갈 곡집-madrigali spirituali」이외에도 32권의 세속 마드리갈 곡집을 출판하였다. 자케스 데 베르트(Giaches de Wert 1535-1596)는 애트워프 근처에서 출생했지만 거의 전생애를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그는 로렐에 의해 시작된 마드리갈의 작법 양식을 더욱 발전 시켰다. 대담한 도약, 레시터티브와 같은 낭독, 그리고 과도한 대조의 후기 양식은 몬테베르디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당세기 말경의 탁월한 마드리갈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츨신들이었다.루카 마렌치오(1553-99)는 놀라운 예술적 수완과 기교를 지닌 작곡가로서 그의 작품에는 대조적인 감정과 시각적인 세부가 최대한 기교적으로 표현되어있다. 16세기 말엽의 마드리갈 작곡가들이 그러했듯이 마렌치오는 주로 전원적인 시를 가사로 사용하였다.

 

 
                      ■ 루카 마렌치오 : 마드리갈 Solo e pensoso ■

 

마렌치오 마드리갈 중 가장 유명한것은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에 곡을 붙인 것이다.

 

Solo e pensoso                         혼자 생각에 잠겨,
i piu deserti campi                        나 인적이 닿지않는 곳을 걷노라,
Vo misurando a passi                          느리고 활기없는 걸음으로
tardi e lenti                          광야를 배회하면서

 

이 첫행들의 이미지와 분위기는 최산 성부에서 g'음에서 a"음으로 중단없이 상행했다가 d"음으로 되돌아오는 느린 반음계의 사용으로 암시된다. 그러는 동안 다른 성부들은 첫행에서 늘어지는 드러내주기 위한 배경의 역할을 하며 둘째 행에서는 질질 끌다가 휴지에 이른다. 다음 부분(25-33마디)의 들쭉날쭉한 선율은 대중의 시선을 피해 숨을 장소를 찾는 시인의 성난 눈을 묘사한다. 여기서 시인은 그 안에 내재된 격정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있다. 그는 그를 이미 알고있는 산, 해변, 강과 나무들 속에서 안전하다. 이러한 지형적 사항들은 음악적으로 표현된다. 넘치는 강은 7도에 걸쳐 이 성부에서 저 성부로 옮겨다니는 8분음표로 표현된다. 그리고 시인이 그를 따라다니는 큐피드를 단념시키기에 충분할정도로 거치른 잔디밭을 찾을수없다고 불평하는 것을 마렌치오는 당김음, 계류음과 교차관계(111-121마디)를 사용하여 각 성부가 느리게 말을 더듬는것 같이 표현한다. 그 후에 쏜살같이 한 옥타브 아래로 내려가는 점부점 음표들은 우리들에게 큐피드가 맹 추격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는동안 두 성부는 "Cercar non so(난 찾을 수 없어)" 를 반복하고 있다. 반음계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마드리갈은 확실히 G선법이며 8행의 끝에서 5음의 종지로 끝난다. 이 곡은 감각적인 음악적 이미지 화성적 세련미 그리고 능숙한 대위적 작법의 걸작품이다.


카를로 제수알도 : 이탈리아 미드리갈의 반음계주의의 극치는 베노사의 왕자인 카를로 제수알도 (1561-1613)의 작품에서 달성되었다. 그는 개성이 풍부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살인자로서 그의 명성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능가하였다. 그는 1586년에 나폴리에서 사촌 Maria d'Avalos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얼마 안있어 안드리아 공작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공작은 제수알도에게 연애 현장에서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제수알도는 스캔들을 이겨내고 1593년에 페라라의 공작 알퐁소 2세의 조카 Leonora d'Este와 재혼하였다. 페라라에서 제수알도는 마드리갈 작곡가인 루차스코 루차스키(Luzzasco Luzaschi 1545-1607)의 영향을 받았다. 구차스키는 비첸티노의 반음계 - 이명동음적 아르치쳄발로와 특별하게 제작된 이명동음적 오르간으로하는 즉흥연주에 능했다. 제수알도에게 있어 반음계주의는 더 이상 고대에 대한 향수가 아니었고 예 7.7에서와 같이 가사에 대한 매우 감동적인 반응이었다.

카를로 제수알도 ; 마드리갈 - "lo parto" e non piu dissi ! "Dunque ai dolori resto(그리하여 나는 고통스러운 채 남게되리니)" 라는 연인의 감탄문을 위해 제수알도는 선율의 반음계 진행과 근음이 3도씩 떨어져있는 화음의 모호한 연속을 결합시켰다. 그는 시행을 조각내었지만 상투적인 종지를 피하여 계속성을 유지하였다. 온음계적 체계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E선법의 주 음정들은 시행의 시작과 끝과 같은 주요 지점에서 강조되었고 마디7(E), 11(G), 23(E), 25(B)와 마지막 마디와 같이 리듬상 중단되는 곳에서 강조되었다. 마지막 행에서 제수알도는 'accenti' 라는 단어에 즉흥연주시 'accenti'라고 불리우는 장식적인 빠른 악구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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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를로 제수알도 : 마드리갈 : "Io parto "e non piu dissi ●

                                   그리하여 나는 고통속에 머물고있습니다. 내가{고통스런 탄식속에서

                                   번민하는 삶을} 그만둘 수는 없나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 마드리갈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의 생애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몬테베르디는 마드리갈을 다성적인 성악 앙상블을 위한 곡에서 익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이중창으로 변화시켰다. 몬테베르디는 크레모나에서 태어나 그도시의 대성당 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인체내리(Marc' Antonio Ingegneri)로부터 최초의 음악수업을 받았다. 몬테베르디는 1590년 만토바의 공작인 벤첸초 곤차가(Vincenzo Gonzaga)를 위해 일하다가 1602년 공작의 교회 악장이 되었다. 1613년부터1643년 생을 마칠때까지 그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의 합창 지휘자로 있었다. 1587, 1590, 1592, 1603, 그리고 1606년에 각각 출판된 몬테베르디의 5권 마드리갈 모음집은 다성 마드리갈의 역사에 포함된다. 이러한 마드리갈 곡집에서 몬테베르디는 제수알도와 같은 극단적인 데 치우치지 않고 단성적 작법과 대위적 작법을 부드럽게 연결시켰으며 가사를 충실하게 반영시켰고 포정이 풍부한 화성과 불협화음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16세기 후기 마드리갈의 기교를 다루는 그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몬테베르디가 신속하게 그리고 남다른 확신을 갖고 17세기의 새로운 양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가지 특징--동시대인들의 음악에도 전혀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많은 음악적 동기가 선율적이지 않고 레사터티브와 같이 낭송적이다. 짜임새(texture)는 종종 동등한 성부라는 매재(媒材)에서 벗어나서 화성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베이스 위에서 이중창이 되었다. 그리고 즉흥연주에서 이미 허용된 장식적인 불협화음과 다른 장식음들이 악보에 적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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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 마 드 리 갈 : 「Cruda Amarilli」 ●

                              무정한 아마릴리 그대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를 아아,{그대는 쓰디쓰게 가르치네}

 


                       ■ 아르투시에 대한  몬테베르디의 답변 1605 ■

 

먼저 아르투시가 매우 사소한 부분에 대해 했던 비판에 대한 답변없이 내가 이러한 마드리갈을 인쇄에 돌리는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나는 만투아공작 각하를 섬기고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일을 하기위한 시간을 마음대로 낼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느 내가 우연히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며 곧 다시 쓰여질  그것은 앞에 'Seconda pratica overto perfettione della moderna musica'란 제목이 붙여진 채 빛을 볼것이라는 알리기 위하여 답변을 썼다. 몇몇 사람들은 자를리노가 가르쳤던 것과 다른 어떤 실제가 있다는 것을 밎지 않으며 이것에 놀랄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동의하는 현대의 작법을 변호하는 이미 결정된 것과는 다른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고려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로 이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말하고싶다. 즉 'Seconda pratica' 라는 표현은 다른것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며 지식인들은 그동안 화음에 대해 다른 식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작곡가들이 진실에 기초하여 작곡하고있다는 것을 믿어주기를 바라고 행복하게 사십시요.

 

테니스 아놀드, 나이젤 포춘 편「The new Monteverdi companion」(런던 보스톤 1935) pp.151-52중 C. Palisca의 "The Artusi Monteverdi Controversy"에서 발췌

 


그 외의 이탈리아의 세속적인 성악 형식 :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보다 가벼운 다양한 합창곡들도 작곡되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1540년대에 나폴리를 중심으로 처음 등장하여 주로 나폴리 지방에서 유행했던 농부의 노래(canzon villanesca)혹은 빌라넬라(villanella)였다. 빌라넬라는 3성부의 유절적이며 호모포니적 양식의 활기찬 소품이었다. 빌라넬라에서 작곡가들은 병행 5도를 고의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본래 빌라넬라의 단순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후에는 마드리갈의 유려한 정확성을 희화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빌라넬라는 종종 마드리갈의 가사와 음악 양면을 우스꽝스럽게 모방하였다. 이러한 노래들은 진지한 마드리갈을 작곡하였던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바로 그 작곡가들에 의해 그리고 바로 그 현학적인 청중들을 위해 작곡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빌라넬라는 마드리갈을 점점 더 닮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고유의 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6세기 말경 이탈이아의 보다 가벼운 다성음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칸초네타(canzonetta)와 발레토(balletto) 였다. 이 두가 형식은 유사하다. 이들은 균형잡히고 경쾌한 호모포닉적 양식으로 작곡되었고 분명하고 뚜렷한 화성을 가지며 자주 반복되는 균등한 부분들로 나누어졌다. 그 이름이 암시하듯 발레토는 성악이나 기악 연주뿐 아니라 무용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fa-la-la의 후렴이 특징적이다. 칸초네타와 발레토를 작곡했던 뛰어난 작곡가는 자코모 가스톨디(Giacomo Gastoldi 1622 사망)였다. 이 두 형식은 이탈리아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독일과 영국 작곡가들에 의해서 모방되기도 하였다.

 

독일 : 16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자국의 작곡가들과 민족음악의 유형이 부각되는  동안 독일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형식이 전개되고 있었다. 많은 궁정과 자치시는 황제가 그의 교회에서 이루어놓은 예를 따라 1550년경부터 자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음악적 직책에 먼저 네덜란드 사람을, 그 다음엔 이탈이아 사람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 작곡가들은 자신의 이국적인 취향을 고집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대부분 독일적인 음악생활에 빨리 동화되어 세속적 리트 및 루터퍼와 카톨릭의 교회음악 모두에 큰 공헌을 했다. 결국 젠플의 작품에서 예시된 종류의 독일음악은 서서히 독일과 프랑코-플레미시, 그리고 이탈리아적인 특징들을 혼합한 보다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 ■

 

오를란도 디 라소 : 16세기 독일에서 활동하던 국제적인 작곡가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였다. 그는 어린시절 이탈리아에서 보냈고 1556년이나 1577년에 바바리아공작 알브레히트 5세 밑에서 일하다가 1560년에 공작교회의 악장이 되어 159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 직책으로 뮌헨에서 활동하였다. 라소의 수많은 악곡가운데는 7권의 독립 리트 모음집이 있다. 리트<Ich armer Mann-나는 가련한 남자>의 가사는 다소 투박한 시인데 라소는 어울리는 음악을 붙여놓았다.(예 7.9) 라소의 작법은 더 이상 초기의 독일 리트에서 그랬던것처럼 거미줄 같은 대위법으로 테너 성부에 놓인 친숙한 선율을 중심으로 작곡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대신 그는 동기의 다채로운 상호작용 약간의 모방이나 반향을 사용하였고 "muss ich im hader stahn(나는 언제나 말다툼을 해야만한다)" 이란 악구의 거짓 애상적인 멜리스마들에서 모든 성부들에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여 마드리갈과 같은 방법으로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 작품이 출판되던 해(1576)에 다른 플레미시 악파의 작곡가로서 황제의 교회에 소속되어잇던 야코프 레나르(Jacob Regnart 1540-1599)는 <나폴리풍 즉 이탈리아 빌라넬라 양식에 의한 3성부의 유쾌한 독일 리트집 - kurzweiltge teutsche Lieder zu dreyen stimmen nach art der Napolitanen oder Welschen Villanellen> 제1권을 출판하였다. 레나르의 이 곡집은 이와 비슷한 16세기 후기의 많은 모음집들중 하나로 이탈리아양식이 독일에서 얼마나 유행하였는가를 증명하고있다. 이탈리아의 부드러움과 독일의 엄숙함의 효과적인 결합은 16세기 후기 독일에서 가장 위대했던 작곡가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의 음악에서 이루어졌다. 1564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하슬러는 1584년 베네치아에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와 함께 공부하였다. 1585년에서 1612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그리고 드레스덴에서 여러가지 직책을 맡았었다. 그의 작품에는 기악 앙상블과 건반악기용 악곡 이탈리아어 가사의 칸초네타와 마드리갈 독일 리트, 라틴어 가사의 모테트와 미사 그리고 루터파 교회용 코랄이 있다. 두 곡의 리트 <Ach Schatz-아아 사랑스런 여인이여>와 <Ach, stisse  Seel'-아아 달콤한 영혼이여>는 하슬러 음악의 좋은 예로서 그의 유려한 선율선과 명백한 화성적 구조, 그리고 동기의 다양한 반복과 균형잡힌 반향을 지닌 명확하게 구분된 형식을 보여주고있다. 하슬러 작품은 각 성부가 동등한 독일 르네상스의 다성음악 시대의 마지막에 위치한다. 하슬러 이후 이러한 양식으로 곡을 쓴 중요한 독일 작곡가로는 요한 헤르만 샤인(Johann hermann Schein 1586-1630)과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utz 1585-1672)가 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 양식으로 쓴 그들의 리트와 미드리갈은 젊었을 때의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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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를란도 디 라소(Orlando di Lasso):리트 : Ich armer Mann ●

 

                              나 불쌍한 자여 무슨짓을 했는가? 나는 아내를 맞았다네{그렇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 내가 얼마나 자주한탄하는지 당신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하루

                              종일 나는 잔소리 바가지를 듣고 긁히네 {잘 때나 식탁에서나...........}

 

 

프랑스 : 프랑스와 네덜란드(Low Countries)에서는 16세기 후반에도 샹송이 유행하고 있었다. 다성음악의 오랜 전통은 1594년과 1612년 네덜란드 작곡가 얀 스벨링크(Jean Sweelinck 1562-1621)가 출판한 두 권의 샹송집에서 볼 수 있듯이 북부 지방에서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마드리갈에 대한 열렬한 인해 이 전통이 수정되었다. 프랑스음악에 대한 그 영향은 1560년부터 15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다. 프랑스 음악이 프랑코-플레미시-이탈리아의 영향을 받는데중계역할을 했던 주요 인물 중의 하나는 오를란도 디 라소였다. 그의 강한 음악적 개성은 16세기 후기에 있었던 모든 유형의 성악곡과 마찬가지로 성악곡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어 가사에 곡을 붙인 라소의 많은 샹송들은 정밀한 모방 빠르기의 갑작스런 변화 유쾌하게 해학적인 작법의 다성적 구조로 작곡되었다. 그런가하면 파리풍 샹송의 호모포니적 양식으로 된 곡들도잇다. 이러한 곡은 가사가 가지는 갖가지 뉘앙스와 악센트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듯한 다양한 리듬을 지니고있다. 호모포니적 샹송의 한 예로서 한 양식의 본질적인 특성을 꿰뚫는 라소의 천부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은 <Bonjour mon coeur - 안녕하세요 내 마음의 아가씨> 이다. 16세기 프랑스의 뛰어난 샹송작곡가중에는 클로드 르죈(Claude le Jeune 1528-1600)과 기욤 코틀레(Guillaume Costeley 1531-1606), 그리고 자크 모뒤(Jacques Mauduit 1557- 1627)가 있었다. 르죈 샹송 중 다수는 다섯 혹은 그 이상의 성부를 위한 몇몇 부분으로 이루어진 진지한 다성작품인데 로레시대의 이탈리아 마드리갈과 비슷한 점을 지니고있다. 후기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실험(예를 들면 마렌치오와 제수알도의 실험)들은 프랑스에서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한편 빌라넬라와 발레토는 프랑스에서 많이 모방되었다. 1550년경 프랑스에서는 다성 샹송과 함께 다른 유형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샹송은 엄격하게 호모포니적이고 짧고 유절적이며 간혹 후렴을 동반하였고 보통 류트 반주가 붙은 독창곡으로 연주되었다. 이런 샹송을 보드빌(vaudevill)이라 불렀는데 후에 에르 혹은 에르 드 쿠르(air de cour;궁정의노래)라 알려지게 되었다.

 

  

                                ■ 정률음악(musicque mesuree) ■

 

정률음악(musique mesuree) : 음악의 박절이 가사의 운율에 구속되는 호모포니적 양식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악곡은 샤를 9세의 보호 아래 1570년 '시와 음악의 아카데미'를 조직한 몇몇 시이들과 작곡가들의 실험을 반영하고 있다. 시인인 장 아투안  드 바이프(jean Antoine de Baif)는 고대의 고전적 박절(vers mesures a l'antiquw)--현대적인 억양 원칙을 대신하는 것으로 장단 음절을 이용하는 고대 라틴어 용법--로 프랑스어로 된 유절형식의 시를 썼다. 르 죈, 모뒤, 그리고 그밖의 작곡가들은 각각의 장음절에는긴 음표를, 가각의 단음절에는 장음절의 반에 해당하는 음표를 두는 규칙을 엄수하면서 여러성부의 음악을 이러한 시들에 붙였다. 프랑스어는 길고 짧은 음절간의 일관된 구별이 없었기 때문에 그 규칙들은 이러한 음가를 확실히하기 위해 고아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다양한 시형들은 르죈의 샹송 <Revecy venir du printans> 에서와 같이 2박과 3박이 자유롭게 교대, 상응하는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것은 '정률음악(musique mesuree)'이라고 불리워지는데 너무 인위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후기 에르 드 쿠르에 불규칙한 리듬이 도입되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불규칙한 리듬은 17세기 전반 프랑스의 작곡가들에 의해 에르가 발전되었을 때 이 장르의 특징으로 남아있었다. 1580년경 이후 에르 드 쿠르는 프랑스 성악곡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유형이었다.

 

  

                       ■ 클로드 르 죈 : Revecy venir du printans ■


정량시(vers mesure)의 이론가들이 완성한 체제에 따라 프랑스어의 음절들은 길고 짧은 음가로 나누어지며 그것에 따라 곡을 붙인다. 이 시에서 다음의 패턴은 거의 긑까지 사용된다. ~ ~ - - ~ - ~ - -. 4분음표로 해서 이것은 2 3 3 2 2의 패턴이 된다. 이것은 카라와 몬테베르디가 사용했던 대중적인 프로톨라 리듬과 같다. 후렴은 5성부로 나오고 반면 각 절은 연속적으로 2 3 4 그리고 5성부로 나온다. 4음 이하의 멜리스마는 리듬의 경직성을 풀어주고 각 성부에 경쾌함과 매력을 더 해준다.

 

영국 마드리갈 : 영국에서는 세속음악의 황금기가 대륙의 나라들보다 늦게 찾아왔다. 1588년 니콜라스 영(Nicholas Yonge)은 이탈리아 마드리갈을 영역하여 런던에서 <Musica trnsalpina>라는 선집을 출판한다. 이러한 마드리갈 중 다수는 손으로 베껴져서 영의 선집이 출판되기에 앞서 벌써 여러해 동안 유포되어 왔었다. 영은 선집의 서문에서 그 음악을 자신의 집에서 만난 신사들과 상인들의  그룹이 매일 불렀었다고 밝히고있다. 그 후 10년동안 이탈리아 마드리갈 곡집이 네권 이상 출간되었다. 이러한 출판물은 17세기 초기의 수년 동안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16세기의 마지막 10년간 크게 번성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된 영국 마드리갈 악파 발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악파의 주된 작곡가들은 토머스 몰리(Thomas Morley 1557-1602)와 토머스 윌크스(Thomas Weelkes 1575-1623), 그리고 존 윌비(John Wilbye 1574-1638)였다. 그 중 제일 초기의 작곡가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몰리는 보다 가벼운 유형의 미드리갈과 발레(ballet)나 칸초네(canzonet) 와 관련된 형식에 특히 뛰어났다. 발레는 비슷한 이름의 이탈리아 형식 특히 가스톨디의 발레티(balletti)에서 파생되었다. 이것은 주로 최상 성부에 선율을 가지는 호모포니적 짜임새로 불려졌고 그 이름이 나타내듯 춤과 같은 박절을 가진다. 도 완전종지로 각 부분은 명확히 구분되고 AABB나 그와 유사한 형식적 패턴을 이루는 반복이 있으며 두 세개의 시절이 같은 음악으로 불려진다. 종종 음절 'fa-la'로 불리는 후렴이 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을 때로는 'fa-la'곡이라 불리기도했다. 그런데 영국의 마드리갈은 첫째 음악구조 전체에 보다 더 주목하고 둘째 순수한 음악수법에 전심했으며 세째 수시로 변할 수 있는 가사에 맞푸어 악곡을 쉽사리 토막내는 이탈리아 양식을 따르기 싫어했던 점에서 이탈리아의 마드리갈과 기본적으로 다르다. 영국의 마드리갈리스트는 우선 음악가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마드리갈리스트는 종종 극작가의 역할이 더 강했다. 출판된 파트보 모음집 표지에 "서악과 비올에 적합하다"(즉 모든 동원가능한 조합으로 연주될 수 있다)고 제시된 것이 많았지만 원래 마드리갈과 발레 칸초네는 모두 주로 무반주 독창을 위해 작곡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영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작품의 각 성부를 성악적으로나 기악적으로 읽을 줄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토머스 몰리 : 마드리갈이란 장르에 관하여 ■

 

가벼운 음악은 최근에 어떤 경박함도 끝까지 추구되지 않은것이 없을정도로 더 비천한 데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들 중 최고의 것은 마드리갈이라 불리우는데 나로서는 이 말의 어원을 알고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 용법을 살펴보면 이는 페트라르카나 우리시대 많은 시인들이 잘 썼던 노래나 소네트에 곡을 붙인 음악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작은 노래를 쓰는 시인들이 모든 정직한 귀들이 싫어하는 외설스런 것들을 쓰지않고 "ch'altro di te non iddio non voglio(나는 당신 외에 어떤 신도 바라지 않소)" 같이 모든 사람(최소한 구원을 얻을 소망을 가진)들이 두려움을 떨지않고는 부를수없는 신성 모독을 쓰지만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허용치 못할 것도 없었을것이다. 음악 자체로 보면 이것은 모테트에 버금가는 매우 예술적이며 이해력이 있는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런 종류의 음악을 작곡하려 한다면 당신 자신이 연애 감정을 갖추어야한다. (왜냐하면 당시이 당신 자신을 작곡하고자 하는 상황에 밀어넣어 빠져들지 않는 한 어떠한 작품도 훌륭하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음악 가운데에서 바람과 같이 일렁거리게 되는데 때로는 방자하다가 때로는 기운없고 때로는 근엄하고 침착하다가 때로는 나약해지게된다. 어떤 점을 지킬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으며, 3분법을 쓸수도 있고 당신의 다양함을 최대한 보여주어야하는데 더 많은 다양성을 표출할수록 더욱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면에서 특출한데 그래서 당신이 본보기로 삼아 모방할 수 있는 다음 작곡가들을 안내자로 당신에게 추천하려 한다. 심오한 기법을 위해 알폰소 페라보스코, 좋은 선율과 세련된 창작을 위해 루카 마렌치오, 호라티오 베카, 스테파노 벤투라, 루지에로 조바넬리, 존 크로체, 그리고 다른 매우 좋은 그러나 여기에 열거한 사람들 만한 훌륭하지는 못한 작곡가들이다.

 

Reprinted from A Plain and Easy Guide to Practical Music, ed. R Alec Herman J M Dent & Song Ltd..London 1952

                  

  

영국 마드리갈에 관한 포괄적인 아이디어는 1601년 토머스 몰리가 다른 작곡가들의 마드리갈 25곡을 편집하여 출판한 모음집 <The Triumphes of Oriana-오리아나의 승리>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592년에 출판된 <II trionfo di Dori> 라는 유사한 이탈리아 선집을 본보기로 한 것이다. 몰리의 이 선집에 실려있는 마드리갈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을 칭송하고 있다. 모든 마드리갈은 엘리자베스에게 적용된 저원 시의관습적 어휘에서 나온 이름인 "아름다운 오리아나 만세" 라는 가사로 끝을 맺는다. 마드리갈 음악의 표현적이며 회화적인 특징은 영어가사의 정확하고 경쾌한 낭독법과 결부되어졌다. 가사의 악센트는 각 성부에서 독립적으로 지켜지고 있다.(현대판의 마디줄이 원본에는 없었다) 그래서 앙상블은 무한한 리듬적 활력이 넘치는 찬란한 대위법을 만들어냈다. 더우기모든 세부 사항들이 빈틈없이 짜여졌기 때문에 음악의 긴 선율이 불분명해지는 곳은 전혀없다.

 

영국의 류트 노래 :16세기 초기이후 대륙에서 유행하던 류트와 비올의 반주가 붙은 독창곡은 영국에서 1589년부터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대의 전성기는 마드리갈이 쇠퇴하던 시기와 같은 1600년을 전후해서이다. 이 분야의 선두 주자는 존 다울랜드(John Dowlamd 1562-1626)와 토머스 캠피언 (Thomas Campion 1567-1620)이었다. 영국 에어의 시는 마드리갈의 것보다 훨씬 좋다. 그 음악에는 일반적으로 마드리갈같은 회화적인 수법이 없으며 그 분위기는 한결같이 서정적이다. 그러나 특히 에어-- 다우랜드의 곡들--는 섬세한 가사 낭독법과 선율의 미묘함이 뛰어았다. 류트 반주는 늘 조심스럽게 성악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리듬과 선율에 있어서 얼마만큼 독자성을 가지고있다. 성악과 류트반주는 보통 같은 페이지에 상하로 인쇄되어 있어서 가수가 직접 반주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몇몇 선집에서 노래들은 이 방법과 또 다른 방법--류트 파트가 세 성부로 나뉘어 기보되어 있고 보표들이 가수나 연주자들이 한 탁자에 둘러앉아서 모두 같은 책에서 각자의 성부를 읽을 수 있도록 기보된--으로 이쇄되어 있었다.(도표참조) 이러한 성악과 기악 버전들은 약간의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4성부로 되어있는 악보는 성악이나 기악으로, 아니면 두 가지 모두로 영주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버전 중에는 마드리갈과 매우 유사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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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다 울 랜 드(John Dowland) :「What if never speede」●

                               존 다울랜드의 곡 <what if never speede>는 <The Third and Last Booke

                               of Songs or Aires Newly Composed to Sing to the Lute, Orpharion or

                               Viols> (런던 1603)에 수록되어 있으며 류트반주에 의한 소프라노 독주

                               또는 류트 반주가 붙거나 붙지않은 4중창 어느 것으로든지 연주될 수 있다.

                               (런던, 영국 도서관)

 

 

                            ■ 존 다울랜드 에어 : Flow my tears ■

 

다울랜드의 악곡 중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던 이 곡은 1600년에 출판된「에어 곡집 제2권 」에 수록되어 있다. 이 곡은 <파반나 라크리메>와 같은 제목이 붙은 일련의 변주곡과 춤곡을 낳았다. 다울랜드의 에어는 대부분 유절 형식이며 그러나 이 곡은 유절 형식과 통절 형식의 중간형이다. 처음 두 연은 첫번째 선율로 불려지고 다음 두 연을 두 번째 선율로 불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연은 다른 선율로 불려진다. 따라서 음악적으로 형식은 AABBCC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파반 패턴을 중복하게 되고 동시에 춤곡으로 씌여졌을 수도 있다. 분명히 개별적인 단어와 구절의 구체적인 묘사나 표현은 그런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울랜드는 특히 각각의 선율을 지배하고 있는 C음에서 C#음으로의 하행 온음계적 진행을 통해 5영 전체에 가득 차 있는 어두운 분위기를 얻어냈다. 이 음악을 현대적인 조성 안에서 예기할 수도 있다. 첫째 선율은 관계조인 C장조에서 A단조의 딸림 화음으로 조옮김되고 셋째 선율은 A단조로 되돌아온다. 외국의 유형에서 다소간 도움을 받고있던 마드리갈 및 에어와 더불어 영국 고유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이것은 16세기 후반기에 콘소트 노래(consort songs)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는 비올 콘소트의 반주가 붙은 독창곡 혹은 이중창이었으며 후에는 합창이 추가되었다. 윌리엄 버드(1543-1623)는 그의 선집<Psalmes Sobets and Songs 1588>에서 능숙한 모방 대위법을 씀으로서 이 유형의 예술성을 드높였다.

 


                                       ■ 16세기의 기악음악 ■

 

기악음악의 증가 : 1450년부터 1550년이이르는 시기가 기보된 음악만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 다성 성악의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진지한 작곡가들의 편에서 볼 때 이 100년 동안에 기악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으며 악기를 위한 독립된 양식과 작곡 형식이 나타났다. 이미 보았듯이 악기는 중세의 모든 유형의 다성음악 연주시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한 몫을 차지했었으나 차지하는 몫의 정도나 정확한 방법은 확실하지가 않다. 더우기 많은 음악이 악기로만 연주되었는데 경우에 따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악으로 연주되었으리라 간주되는 곡도 포함되어있다. 칸틸레나와 모테트를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하여 기록해 놓은 로버츠브리지나 피엔차 사본과 같은 중세의 필사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러한 방법으로 편곡된 음악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주고있다. 이밖의 춤곡이나 팡파레 등과 같은 형식의 독립된 기악곡은 늘 암기되거나 즉흥적으로 연주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1450년 이후 기악곡이 많이 늘어난 것같이 보이는 싱딩한 정도가 착각이다. 이것은 다만 이제 이러한 음악이 보다 많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중세에 대부분 엄신 여김을 받아왔고 남에 밑에만 있던 기악 연주가들의 위치가 향상되었다는 것을 반영하고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즉흥 연주가 많았기 때문에 기록되고 인쇄된 자료에는 결코 르네상스의 모든 기악곡이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많은 기악곡(몇몇 성악곡과 마찬가지로)들은 연주시 즉흥적인 장식이 가해졌다. 16세게에 기악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악기를 설명하거나 그 연주법을 가르쳐주는 책들이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출판물은 1511년에 아왔는데 그 뒤를 이어 16세기 동안 그 수가 점점 늘어갔다. 이러한 출판물의 대부분이 처음부터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씌여졌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로서 이것들은 이론가들이 아니라 실제의 음악가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책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사용하던 음높이와 음률(temperamemt), 조율법에 관한 것을 얼마간 배울수맀으며 주어진 선율선에 즉흥적인 장식음을 가하는 일에 부여된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다.

 

● 악기 : 1511년 제바스티안 비르둥(Sebastian Virdung)이 쓴「Musica getutscht und ausgezogen」(독일어로 된 음악 개관)과 1618년에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etorius)가 쓴 (음악대전)의 제2권에는 더 풍성하데 16세기 사용하던 다양한 악기에 관한 기록과 목판 인쇄도가 실려있는데 두 가지 사항이 특히 흥미롭다. 즉 관악기의 수가 유달리 많고 다양하다는 것과 모든 악기가 한 조, 혹은 한 벌 을 이루며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베이스에서 소프라노에 이르는 전 음역에 걸쳐서 하나의 통일된 음색을 앋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질의 음향에 대한 르네상스적인 이상을 따른것으로 예를 들면 세 개 내지 여덟 개의 리코더나 비올의 '채스트' 또는 '콘소트'는 베이스에서 소프라노에 이르는 사람 목소리의 '가족(family)'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리코더 외에 중요한 관악기로는 숌(shawm;겹리드 악기), 크럼호른(krummhorn 역시 겹리드 악기로 숌의 소리보다 부드러운 소리르 낸다), 코르트홀트(kortholt)와 라우쉬파이프(rauschpfeife;뚜껑 달린 리드 악기들), 가로로 부는 플루트(transverse flute), 그리고 코넷(cornetts;나무나 상아로 만든다. 컵 모양으로 패인 마우스피스가 있다)등이 있었다. 트럼팻과 색벗(트롬본의 전신)은 오늘날의 것보다 음색이 부드러웠다. 비올은 오늘날의 현악기인 바이올린족과는 구조적인 면에서 다른 부분이 많다. 즉 목에는 프렛이 붙어있고 현은 6개로 가운데의 장3도를 제외하고 4도 간격으로 조율되어 있다.(A-d-g-b-e'-a'처럼), 음색을 더 섬세하고 정교했으며 덜 딱딱하고 비브라토 없이 연주되었다. 풍성한 소리에 대한 기호는 통일된 음향으로 음역 전체를 다룰 수 있는 독주악기를 위한 곡의 출현에 자극을 주었다. 오르간의 음은 독주 음전(音銓)보다 부드러운 음향의 음전을  붙임으로서 변화를 변화를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음전은 중세악기 의 고정된 프린서플(principal)이나 복합배음관(mixtures)과 결합될 수 있었다. 1500년에 대형 교회 오르간은 오늘날 우리가 일고있는 것과 본질적인 면에서 비슷했다. 발건반은 다른 나라에서 사용되기 오래 전부터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사용되었다. 중세에 많이 있던 퍼터티브 오르간은 15세기 이후엔 명맥을 잇지못했다. 그러나 16세기에는 리갈(regal)을 포함하는 소형 포터티브 오르간이 있었다. 이 악기에는 섬세한 높은 음을 내는 리드판이 붙어있엇다. 클라비어족의 악기로는 클라비어코드와 하프시코드의 두 유형이 있었다. 클라비어코드에서는 금속 탄젠트가 현을 치고나서 그대로 현과 접촉한 채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가냘펐지만 좁은 범위 안에서 연주가는 그 음량을 조절할 수 있었으며 가벼운 비브라토를 붙일 수 있었다. 하프시코드는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게 만들어졌으며 버지널, 스피넷, 클라브생, 클라비쳄발로 등 그 이름도 여러가지였다. 이 모든 악기는 줄 튕기개(quill)가 현을 뜯어서 음을 냈다. 그 음은 클라비코드보다 강했으나 건반에 주는 압력을 달리함으로써 음의 명암을 주는 거의 할 수 없었다. 음색의 차이나 음량의 정도를 나타내려면 음전이라는 특별한 기제를 써야만 했다. 클라비코드는 본질적으로 조그만 방에서 사용하는 독주용 악기였고 쳄발로는 독주나 합주 모두에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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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엘 프레토리우스의「음악대전」제2권(볼펜뷔텔 1620)에 예시된악기들 ●

                                      ((ⓐ클라비코드 - ⓑ트롬본 - ⓒ포머 - ⓓ바스 비올라 다 감바))

 

 

● 류트 :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대중적이었던 가정용 독주악기는 류트였다 류트는 500년이 넘게 유럽에 알려져있었다. 16세기말 이전에 류트는 이미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만든것도 있었다. 비우엘라 디 마노(Vihuela de mano)라는 스페인형의 류트는 그 모양이 기타와 비슷했다. 그러나 표준형의 류트는 서양 배 형태를 하고있었는데 현은 하나의 단현과 다섯개의 복현으로서, G-c-f-a-d'-g'로 조현되어 있었다. 목에는 프렛이 붙어있었고 줄감개통은 뒤쪽을 향해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일반적인 연주법은 손가락으로 현을 뜯는 것이었다. 모든 종류의 화음과 선율, 경과구, 장식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위적인 악곡까지도 류트로 연주할 수 있었다. 이 악기는 성악을 반주하는 독주악기 및 합주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숙달된 영주자는 매우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류트 주자를 위하여 테블러추어라는 특별한 기보법이 사용되었다. 이 기보법의 원리는 각 음높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요구된 음높이를 내기 위해 손가락이 현을 누르는 지점을 표시하는 것이다. 테블러추어는 비올과 건반 악기를 위해서도 고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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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트의 일종으로서 스페인에서 널리 사용되던 악기인 비우엘라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즉흥 연주하는 시인(New York Metroplitan Museum of Art)

 


성악에 대한 기악의 관계 : 16세기초 기악은 그 양식과 연주 양면에서 성악과 여전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악기는 세속곡과 종교곡의 다성음악곡에서 성악파트를 중복하거나 대신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성무일과에서 마니피카트는 종종 성가대와 오르간이 번갈아가며 연주하였다. 가사가 홀수행인것은 성가대가, 짝수행인것은 오르간이 연주하였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성무일과 중에서 일상적으로 불려지는 부분을 악기로 대신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짧은 오르간 곡을 버스(verse)나 버세트(verset)라하였다. 이것은 악기가 대신 연주하는 성가의 선율 전부 혹은 일부를 포함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수법은 미사곡의 여러 부분  특히 키리에와 글로리아에서 종종 적용되었다. 전례용 선율이나 이 밖의 다른 정선율에 기초를 둔 오르간 곡들 역시 독립된 작품으로 작곡되었다. 이 기악곡들은 성악의 정선율 모테트와 비슷했다. 성악의 정선율에 기초한 오르간 찬미가의 좋은 예는 프랑스의 연주가인 장 티틀루즈(Jean Titelouz 1563-1633)의 아름다운 작품인 <Pange lingua>이다. (이 정선율의 역사에 대한(259면 참조) 존 테버너가 그의 미사곡 <Gloria tibi Trinitas>의 베네딕투스에서 "In nomine Domine"란 가사 부분을 악기를 위해 편곡한 곡은 많은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따라하게 될 모델이되었다.

 
                          ■ 크리스토퍼 타이 : In nomine 'Crye' ■

 

태버너와 같이 크리스토퍼 타이는 정선율은 약간 수정하여 알토에 위치시켜 4성부의 기악곡으로 작곡하였다. 다른 점에서 타이의 작겁은 태버너의 작법과 무관하다. 이 곡은 시작부분에서 반복되는 음표가 나오는 푸가의 주제가 제시된다. 이것의 응답은 아주 정확하지 않지만 5도와 13도 위에서 그리고 한옥타브 밑에서 이루어진다. 31마디까지 이 주제가 발전된 뒤에 성가의 나머지 부분에 기초한 12박의 리듬에 얹혀있는 단성적인 부분이 쓰여졌다. 또한 영국 작곡가들은 'in nomine'에 기초하여 건반악기를 위한 대위적인 환타지를 썼다. 건반악기와 앙상블릉 위해 선호된 또 하나의 정선율은 헥사코드의 6음 (우트,레,미,파,솔,라)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기초로 영국 작곡가들은 다수의 독창적인 대위적 작품을 썼다. 존 불(John Bull 1562-1628)의 유명한 헥사코드 '팬시'(hexachor & fancy)는 차례로 12개의 모든 조에서 헥사코드가 나온다. 색다른 작품은 극단적인 반음계주의를 실험했던 16,17세기의 몇몇 이탈리아 작곡가 중의 한 명인 알폰소 델라 비올라(Afonso della Viola 1570년 사망)의 신포니아를 본딴것 같다. 불의 '팬시'가 건반악기 책인「Fitzwilliam Virginal Book」에 수록된 이후, 그것은 16세기말 영국에 평균율 과 비슷한 것이 알려져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건반악기용 악보는 이 환상곡의 4개의 비올을 위한 악보를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성악곡에서 파생된 작품들 : 성악곡에서 파생된 많은 작품들은 마드리갈, 샹송, 혹은 모테트를 돌림음(turns), 트릴, 악구(runs), 그리고 다른 장식음으로 장식하여 옮겨 적은것에 불과했다. 선율장식의 기술은 16세기말에 높은 수준에 이르었고 성악과 기악의 연주에 적용되었다. 원래 장식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작곡가들이 장식을 기보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바로크시대에 기악을 위해 쓰여졌던 많은 세부 사항들은 16세기 즉흥적 실습의 결과였을 것이다.

 

● 칸초나 : 칸초나는 '노래' 혹은 '샹송'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기악 칸초나를 '악기로 연주하는 샹송(canzon da sonar)', 혹은 '프랑스양식의 샹송(cazona della francese)'이라 불렀다. 칸초나는 합주용과 독주 기악용으로 작곡되었다. 16세기 후반기에 칸초나가 독립 기악형식으로 발전된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원래 칸초나는 프랑스 샹송과 같은 일반적인 양식의 기악곡이다. 즉 가볍고 빠른 진행과 강한 리듬 그리고 아주 단순한 짜임새로 되어있다. 기악 칸초나의 작곡가들은 샹송으로부터 이러한 특징뿐 아니라 거의 모든 칸초나에서 발견되는 전현적인 시작부분의 리듬도 물려받았다. 그 리듬은 2분 음표와 그 뒤를 따르는 4분 음표와 같이 첫음과 첫음의 1/2음가의 두 음으로 구성된다. 차분하고 다소 난해한 리체르카레 보다 생기있고 즐거운 칸초나는 16세기 말에 대위적 기악음악을 주도하는 형식이 되었다. 초기의 이탈리아 예들(단순히 옮겨적은 것들을 제외하고)은 오르간을 위한것이었다. 1580년경에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앙상블 칸초나를 쓰기 시작했다. 오르간 칸초나는 푸가의 전신이다. 이러한 두 용어는 1607년부터 독일에서 같은 것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합주(ensemble) 칸초나는 17세기의 교회소나타(sonata da chiesa)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발전의 근본적인 첫걸음은 칸초나가 다소 뚜렷이 구별되는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초기의 많은 칸초나는 하나의 주제 혹은 매우 비슷한 성격의 몇 개의 주제가 대위적으로 계속되고 변화없는 움직임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다소 대조되는 특정의 주제들을 도입하였으며 각각의 주제들은 차례대로 대위적인 과정을 거친 후 다음 주제로 연결되었다. 이 주제들이 선율 윤곽과 리듬이 서로 매우 달랐기 때문에 전체로서 그 곡은 일련의 대조되는 부분--비록 부분가의 분할이 대부분 종지의 겹침으로 숨겨지긴했지만--으로 이루어진다. 예 7.11은 플레미시 작곡가인 장(혹은 Giovanni) 드 마퀴 de Macque(1550-1614)가 쓴 이 유형의 칸초나에 나오는 4개의 주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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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드 마퀴 - T h e m e s from a C a n z o n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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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드레아 가브리엘리 - Themes from a R i c e r c a r e ●

 

 

독립된 부분으로 향한 더 발전된 단계는 예 7.12에서 예시되어 있다. 이 주제는 베네치아의 작곡가인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i 1510-86)의 기악곡에 나온다. 비록 리체르카레라고 불렀지만 이것은 칸초나 유형이며 이것은 이시기의 용어의 느슨함을 나타내준다. 그 주제들은 드 마퀴의 칸초나의 주제들보다 더 대조되며 게다가 그 곡의 두 번째 부분은 주로 호모포니 양식으로 쓰여져서 다른 것들과 대조되었다. 시작 부분은 네 번째 부분 뒤에서 전체가 반복된다. 그러므로 가브리엘리의 이 작품은 또한 반복이라는 중요한 구조적 원칙을 예시하고있다. 물론 대조와 반복에 대한 사고는 새로운것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음악작곡에 있어 기본적이며 서양음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이전 반복과 대조의 사용은 대개 전례적인 요구 혹은 가사의 시형, 혹은 춤 패턴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 칸초나와 같이 독립된 기악곡에서 이러한 기법은 다성음악에 응결력과 다양성을 부여하기 위한 순수한 음악적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은 16세기에 칸초나와 다른 이름--카프리치오, 리체르카레, 판타지아, 팬시 등--을 가지고 있는 이와 유사한 동시대의 형식에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후기의 독립된 기악음악의 발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 춤곡 : 르네상스기에는 사교적인 춤이 널리 보급되었고, 또 높이 평가되었다. 교양있는 사람들은 모두 춤에 능숙하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므로 16세기의 기악곡의 상당부분은 류트와 건반악기, 혹은 합주용으로 씌여진 춤곡들로 이루어졌다.그 곡들은 중세 후기의 그랫듯이 더 이상 즉흥적인것이 아니었으며 테블러추어나 파트보에 기보되었으며 페트루치와 아테냥 그리고 이 밖의 다른 출판인들이 간행한 악보집에 실려있다. 이러한 곡들은 그 목적에 적합하도록 규칙적인 리듬 패턴을 가지고있으며 구별이 뚜렷한 몇몇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주선율이 유난히 장식되거나 채색되는 일이 있었다고해도 선율이 대위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일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일반적으로 춤곡은 둘이나 세 개씩 조합되었는데 이러한 조합은 후시대의 춤 모음곡의 전신이었다. 가장 선호되던 조합 방법은 2박자의 느린 춤곡 뒤에 같은 선율을 가진 빠른 3박자의 춤곡이 따르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뒤따르는 춤곡은 앞곡의 변주곡처럼된다. 이렇게 짝을 이루는 춤곡 종류의 힌 가지 예는 16세기의 프랑스 출판물에서 자주 나타나는 파반과 갈리아드의 조합이다. 이와 유사하게 짝을 이루는 무용곡을 동시대 폴란드의 태블러추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예7.13)


16세기 초기의 춤곡들에서는 성악곡을 원형으로 하는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춤곡에서는 기악양식의 특징이 자유로이 발전하였다. 16세기에는 그 후세기에서와 같이 많은 춤곡들이 그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춤곡의 특징적인 리듬과 일반적인 윤곽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분명히 실재적인 춤을 위해 서 만들어진것이 아닌 양식화된 작품으로 발전하였다. 쇼팽의 왈츠곡들이 무도회의 왈츠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것과 같다. 16세기 후반에 류트, 건반악기, 합주를 위한 춤곡이 많이 출간되었다. 몇몇 춤곡들은 대중적 선율의 단순히 편곡이었지만 대부분은 시민의 집이나 귀족의 궁정에서 사교적인 활동을 위해 씌여졌다. 부르고뉴와 이탈리아 궁정에서 일찌기 유행했던 발레는 16세기말에 프랑스에 수입되었다. 잔존하는 프랑스 발레음악은 'Ballet comique de la reine(여왕의 극적인 발레)'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1581년 파리에서 상연된 것이다. 16세기초에 이미 나타난 둘 또는 세 개의 춤곡이 조합되며 양식화 된 춤곡을 작곡하는 경향은 계속되었다. 16세기말에 선호되던 춤곡의 쌍은 파반(파도바노,파두아나)과 갈리아드, 혹은 파사메초와 살타렐로였다. 이 두 쌍에서 첫곡은 느린 2박자였으며 두 번째 곡은 3박자의 보다 생기있는 악장으로 보통 첫곡과 선율이 같거나 첫곡의 변주곡이었다. 독일의 자료에서 두 번째 춤곡은 주로 프로포티오(proportio) 혹은 프로포츠(proportz)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두 번째 춤곡의 음가를 결정하기위해 첫번째 춤곡의 음가를 어떤 형태의 3배 비율을 적용하도록 지시하는 15세기 기보법의 용어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알르망드(혹은 알망, 보통 빠르기의 2박자 춤곡)는 16세기 중엽에 선호되었으며 후 시대의 춤 모음곡의 정규적인 항목으로서 양식화된 형식 안에 유지되었다. 후 시대의 또 하나의 정규적인 요소인 쿠랑트 또한 16세기에 등장했다. 16세기말의 기본적인 춤곡들은 몰리가 쓴 <Liaine and Easie Introduction to Practicall Musicke 1597>에 그것들의 음악적 구조에 관한 재미있는 노평과 함께 기록되어있다. 영국 작곡ㄱ가들은 춤을 위한 것이 아닌 예술적인 파반과 갈리아드의 작곡에 뛰어났다. 버드는 <파바나 라크리메-Pavana Lachrymae>에서, 파나비(Giles Fanaby 1560-1640)는 <Lachrimae Pavan>에서, 그리고 얀 스벨링크(Jean Sweelink)는 <Pavan Lachrimae> 에서, 다울랜드의 에어 <Flow my tears>를 건반악기 편곡을 위한 자싱들의 모델로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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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에 있는 알브레히트 공작 4세의 궁정 파티에서 세 쌍의 남녀가 
                                    왼쪽 발코니에서 연주되는 플루트와 드럼에 맞춰서 장중한 파반을
                                    추고있다. 오른쪽 발코니의 케틀드럼 연주자 한 사람과 트럼펫주자
                                    두 사람은 악기를 놓아두고 있다. 뒷쪽에는 공작이 한 숙녀와 카드

                                    놀이를 하고있다. 1500년경 마토이스 차징거 조각(드레스덴 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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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 z a y n e r T h a n c z from a Tablature of John of Lublin ●

 

 

● 즉흥곡 : 많은 특별히 기악적인 특징들은 즈흥연주를 통해 음악에 포함되었다. 후에는 ㅇ러한 특징들은 필사본이나 인쇄된 악보에 기보되었다. 16세기의 연주자들에게는 두가지의 주요한 즉흥 연주법이 있었다. 즉 평성가와 같은 기존 선율선을 장식하는것과 기존 선율에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대위적인 부분을 추가시키는 방법이다. 가수들이 실제로했던 둘째 방법은 'discantus supra librum({선율이 기록되어있는} 책에 기초를 두고 {즉석에서 만들어진} 디스칸투스)', contrappunto allamemte(글자 그대로 외워서하는 대위법)', sortosatio(즉흥연주-compositio 또는 기보된 악곡에 반대되는것)'라고 불렀으며 16세기 초기의 음악가를 교육시키는 면에 매우 중요한 훈련으로 간주되었다. 15세기 후기와 16세기 초기에 애용되던 궁중무용 바스-당스(bass-dance)는 차용해 온 테너를 기초로 한 이런 즉흥연주 방법을 보여주는 한 예였다.그러나 아테냥이 출판한 것들처럼 1530년경부터의 춤곡을 모아놓은 일련의 곡집에있는 후기 바스-당스를 2박자로 기보했으나 안무는 춤의 대가였던 아르보가 그의 저서인「Orchesography 1588」에서 콰테르니옹(quaternions)이라 명명했던 12박 단위의 박절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2박자와 3박자의 혼합을 필요로하였다. 춤을 위한것이 아닌 즉흥적인 양식의 곡들은 독주자를 위한 음악 최초의 예 중 하나이다. 일정한 박자와 형식에 계속해서 집착하는 일 없이 짜임새를 변화시켜가면서 때때로 다소 불규칙적인 모양이긴 하지만 기존 '선율'에 기초하지 않고 자유롭게 전개시켜 가는 곡들이다. 이러한 악곡들은 전주곡 혹은 리체르카레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다. 루이스밀란(Luis milan 1500-1561)의 <Libo de musica vihuela de mano intitulado El Maestro>(발렌시아,1536)에 수록된 판타지아들은 당시 류트 연주자들이 자신이나 가수가 류트곡, 이를테면 그의 비우엘라 악곡집에 나오는 비얀시코, 소네토, 로망스 등을 부르는 것을 반주하기 전에 즉흥적으로 연주했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해준다. 각 판타지아곡들은 주어진 선법으로 되어있다. 16세기 후반기에 즉흥적인 양식으로 된 건반악기 음악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토카타(toccata)였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 'toccare(건드리다)' 에서 나왔으며 건반 악기로 오르간 연주자가 즉흥 연주하는 것을 암시한다. 베네치아의 오르간 연주자 클라우디오 메를로(1533-1604)가 작곡한 토카타는 이러한 인상을 확실히 보여준다(예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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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 라 우 디 오 메 를 로 - T o c c a t a S e c t i o n s  ●

 

 

메를로는 음을 무한정 지속할수있는 오르간의 이점을 이용하여 시작했다. 첫부분은 F를 중심으로 한 화음이 길게 연속을 이루며 (예7.14a) 처음엔 최종음으로 끝나고 다음엔 5음에 기초한 반종지로 향한다. 수많은 계류음과 다른 연장 및 반복되는 불협화음은 오르간의 특성에 매우 잘 어울린다. 자유롭게 변화되는 리듬 안에서 장식음들과 음계적 진행은 짜임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대조를 이루는 중간부분은 사실상 4개의 짧은 주제를 가진 리체르카레였다. 각 주제들은 모방적으로 발전된다.(예 7.14b에 첫째 주제가 나와있다) 이러한 중간부분이 나온 후 시작부분과 유사하지만 더 폭넓은 화음을 가지며 화려한 도약진행으로 보다 환상적으로 연주되는 악절이 나온다. 자유로운 마지막 부분은 화성적 리듬이 느리게 움직이고 활기가 더하며 폭이 점점 더 넓어지는 빠른 악구들로 인해 가자 인상적인 클라이맥스를 낳는다.(예7.4c) 이러한 종류의 곡들인 푸가적인 부분을 필수적으로 포함하거나 모두 동일하게 토카타라 불리는것은 아니다. 다양한 다른 이름으로는 판타지아, 인토나치오네, 프렐류드 등이 있다. 16세기말에 몇몇 건반악기 곡들에서 다른종류의 즉흥곡이 발견된다. 작곡가들은 이 악곡 안에서 오르간 연주자들이 즉흥연주를 할 때처럼 이상한 미로와 같은 화성진행을 통해 꿈과 같은 여행을 하는것 같이 보인다. 예7.15는 장 드 마퀴의 'Consonsnze stravaganti(괴상한 화성)'이라고 적절히 이름붙인 이러한 종류곡의 악절을 보여준다. 이렇게 불안장하고 격렬한 화성은 17세기 로마의 오르간 연주자인 프레스코발디의 관조적인 반음계적인 토카타의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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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 드 마퀴 - C o n s o n a n z e S t r a v a g a n t i ●

 


            ■ 피에르 아테냥 편집:Danseries a 4 Parties, Second Livre ■


62a에 나오는 춤의 박자 패턴은 3+4+2+3으로 이는 aabbaa의 선율 체계속에서 20번 반복된다. 바스-당스의 기본스텝 가운데 하나가 브랑르(branle)인데, 이는 무게중심을 오른발에서 왼발로 옮기는 사이드 스텝이었다. 후에 브랑르는 독립적인 춤곡이 되었고 여러가지 변형이 나타났다. 브랑르 드블(double)과 브랑르 생플(simple)이 2박자 곡인 반면 브랑르 게(gay)는 3박자 곡이었다. 음악은 종종 최상 성부에서 불리는 가사에 의해 구별되었는데 이 경우 'Que je chatoulle ta fissette'이다.

  

                               ■ 리체르카레(R E C E R C A R) ■


리체르카레 : 성악작품을 기악 연주에 맞게 개작하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어떤 특정한 기악곡들을 반드시 어떤 성악 작품에서 파생된것은 아니지만 성악적 원형에 근거하여 양식화 되도록 이끌었다. 그러한것들이 각각 모테트와 샹송에 대응되는 기악형식인 모방적 리체르카레와 칸초나였다. '리체르카레'라는 단어는 '탐구하다' 내지는 '찾아내다'의 뜻과 '시도하다'라는 뜻 모두를 가진 이탈리아어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이 용어는 아마 류트 주자들이 지판에서 음들을 찾아낸다--recercar--뜻으로 쓴 전문 직업어에서 유래한것 같다. 최초의 류트 리체르카레는 즉흥적인 성격이었는데 건반 악기로 옮겨짐에 따라 산발적인 짧은 모방 악구가 이 장르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것은 짝을 이루는 모방 악구에 균형을 주고 악구를 어느정도 반복시킴으로서 보다 명확한 형식을 만들어내었다. 1540년경 리체르카레는 뚜렷한 개성미나 대조성이 없는 연속적인 주제로 이루어지며 각 주제는 모방을 통하여 발전되고 종지를 중복시킴으로서 다음 주제와 연결되는데, 사실상 이것은 가사가 없는 모방적 모테트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리체르카레는 대개 기악 합주용으로 만들어졌으나 건반악기와 류트용으로 자곡된 것도 있다. 이러한 곡들은 성부가 보다 자유롭게 진행되며 인쇄된 악보에 전형적으로 기악적인 장식음들이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엄격한 성악 양식과 다르다.

 

● 소나타 : 소나타란 용어는 15세기에 독주나 합주를 위한 순수한 기악음악의 다양한 악곡들로 지칭하기위해 가끔 사용하였다. 16세기 말의 베네치아의 소나타는 칸초나의 종교적인 카운터 파트이다. 그것은 여러부분으로 구성된다. 각 부분은 다른 주제 혹은 단일 주제의 다양한 변형을 기초로 한다. 이러한 구획지어진 특성이 다른 템포, 박자와 분위기를 갖는 악장들로 이루어진 17섹의 소나타 다 키에자로 연결되게 했다. 성 마르코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메를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작품에 대한 앞서의 논의로 볼 때 베네치아가 16세기 후반에 오르간과 기악 음악의 중심지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성당에서 연주가와 작곡가로 활동했던 다른 오르간 연주자로는 Jacques Buus와 Annibale padovano가 있다. 게다가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조카인 조반니 가브리엘리(1557-1612)는 합주 음악에 있어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약 36개의 칸초나와 대조적으로 7개의 소나타를 남겼다. 베네치아 악파가 이룩한 하나의 혁신은 다중 합창적 매체를 기악에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597년에 작곡된 조반니 가브리엘의 <신성교향곡-Sacrae symphoniae>에 나오는 유명한 <피아노와 포르테의 소나타-Sonata pian'e forte>는 본질적으로 기악을 위한 이중 합창모테트이다. 이 곡은 그것의 본질적인 음악적 가치보다 각 성부에 특별한 악기를 계획한 최초의 기악 합주곡 중의 하나라는 사실로 인해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번째 콰이어는 하나의 코넷과 3개의 색벗으로 구성되고 두 번째 콰이어는 하나의 바이올린과 3개의 색벗으로 구선된다. 코넷은 목관악기로 컵모양의 마우스피스가 있다. 그것의 부드러운 소리는 합주에 사용되는 다른 악기들의 소리와 잘 어울린다. 색벗은 베이스에서 소프라노까지 5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의 소리는 현대의 트롬본 소리보다 훨씬 부드럽다. 가브리엘리의 서나타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혁신은 제목과 악보에 piano와 forte를 지시한 것이다. 피아노는 각각의 콰이어가 단독으로 연주할 때 사용되었고 포르테는 두 개의 콰이어가 함께 연주할 때 사용되었다. 이것은 음악에 있어 강약 표시를 쓴 최초의 예, 가운데 하나이다.

 

● 변주곡 : 춤을 반주하는 선율에 기초한 즉흥연주는 고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베네치아와 페라라의 파반 곡들에 기초하여 쓰여진 변주곡들은 John Ambrosio Dalaza가 1508년 베네치아에서 출판한 류트 태블러추어인 Intabulatura di lauto에 나와있다.이와 연관된것은 파반에서 파생된 Passamezzo antico와 moderno와 같은 짧은 오스티나토 패턴과 Romanesca, Ruggiero와 Guardame las Vacas와 같은 성악 버스(verse)를 위한 표준적인 에어에 기초한 즉흥연주와 변주곡이다. 이러한 것들은 후기의 샤콘과 파사칼리아의 원형이었다. 스페인과의 류트와 건반악기 작곡가들은 대중적인 곡에 기초한 변주곡을 만드는 기술을 한층 세련되게 하였다. 스페인의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 겸 작곡가인 안토니오 데 카베손(Antonio de Cabezon 1510-1566)과 류트 연주자 Anriquez de valderravano가 쓴 장르의 작품들은 특히 뛰어났다. 변주곡은 16세기 후반에 영국의 건반악기 작곡가들의 그룹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행되었다. 그들은 버지널리스트라 불리었는데 버지널은 그당시의 모든 탄현 건반악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그룹의 선두 주자는 윌리엄 버드(William Byrd)였다. 그리고 그의 동료 중 중요한 작곡가들로는 존 불(John Bull), 올랜드 기번스(Orlando Gibbons), 그리고 토머스 톰킨스(Thomas Tonkins)가 있었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 출판된 건반악기 음악의 많은 필사 집들은 Mulliner  Book(1540-85)을 시초로하여 가장 방대한것은 1609년과 1619년사이에 francis Tregian이 필사한 피츠위리엄 버지널 북(Fitzwilliam Virginal Book)이었다. 여기엔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쓰여진 300여곡들이 수록되어있다. 이러한 곡들중에는 편곡된 마드리갈, 대위법적인 판타지아, 춤곡, 프렐류드, 묘사적인 작품들 그리고 다수의 변주곡들이 있다. 이 책에 수록되어있는 곡들 중에서 대부분의 변주곡들은 Bull의 스페인 파반과 같이 느린 춤곡 혹은 (Munday)의 Goe from my window 와 같이) 친숙한 노래들을 기초로 하고있다. 그 시대의 많은 민속곡들이 또한 변주곡의 주제로서 사용되었다. 변주곡의 기초로서 사용되는 곡들은 일반적으로 짧고 단순하며 노래답고 악절이 규칙적이며 뚜렷이 구분되는 종지로나누어지는 명확한 2악절 혹은 3악절의 패턴으로 되어있다. 변주곡들은 끊임없는 순서로 이어지는데 때로는 6개 때로는 20개 혹은 그 이상의 변주를 갖는다. 각각의 변주는 같은 분절, 같은 종지, 같은 화음 계획등 그 주제의 구조를 보존한다. 때때로 선율은 종종 한 성부에서 다른 성부로 옮겨지면서 변주곡 전체를 통해 그대로 유지된다. 몇몇의 변주에서 선율은 형태가 변하여 그 원형이 단지 추측될 뿐이다. 때때로 이렇게 장식된 형태는 원래 선율의 몇 악절에서 파생되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자유롭게 창작된다. Bull의 변주곡에 나오는것 같은 몇몇 악절들은 항상 음악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있지 않지만 기교적으로 높은 수준에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국 버지널음악에서 단순한 기교적 과시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니었다. 각각의 변주는 보통 주죈 장식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때때로 두 부분으로 된 하나의 변주곡이나 두 개의 연속적인 변주곡에서 한 번은 오른손에서 다음번에는 왼손에서 같은음형이 사용되어 Fitzwilliam book에 실린 Bull의 스페니쉬 파반의 제3과 제4 변주곡에서와 같이 쌍을 이루게된다. 이러한 짝짓기는 별도로 하고 대부분의 변주곡에서 유일하게 포괄적인 계획은 한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비록 간간이 조용한 간주곡에 의한 중단이 있지만--생기를 더해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박자의 변화가 도입되었으며 가끔 작곡가가 자신의 숙달됨을 과시하려고할때 둘 혹은 세 개의 다른 박자를 동시에 사용하는 변주를 쓰기도했다. 대개 마지막 변주는 더 느렸으며 보다 꽉찬 음향과 풍부한 화음으로 주제를 여유있게 다시 연주한다. 이런 기교는 다울랜드의 Flow my tears 에 기초한 버드의 건바악기용 변주곡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륙에서 활동한 영국의 작곡가들 : Fitzwilliam Virginal Book과 동시대의 다른 모음집들은 16세기 영국 작곡가들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설득력있는 증거물이다. 16세기 초기의 영국 음악가들이 북유럽의 나라들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라는 것은 노라운 것이 아니다. 존 다울랜드는 1598년부터 1607년까지 덴마크왕을 위한 류트연주가로서 일했다. 피터 필립스(1561-1628)와 리처드 데링(1580-1630)의 대륙으로 이주해 온 영국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그들의 음악은 주로 네덜란드 에서 출판되었다. 윌리엄 브레이드(1560-1530)는 덴마크와 독일에서 다양한 직책을 가졌으며 독일에서 비올을 위한 다수의 모음곡들을 출판하였다. 존 불은 1613년 브뤼셀로 건너가서 1617년부터 생을 마칠때까지 앤트워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그와 스벨링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스벨링크는 불의 음악과 불의 동시대의 영국음악을 알았으며 클라비어를 위한 작품들을 쓰는데 그 음악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 작품들은 뛰어난 몇 세트의 변주곡들을 포함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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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 A R T H E N I A - 윌리엄 버드의 버지널을 위한 음악모음집 ●

 

 

윌리엄 버드의 버지널을 위한 음악모음집 파르테니아의 표지. 존 불과 올앤도 기번스의 1613년 엘리자베스 공주와 프레드의 왕자에게 그들의 결혼선물로 주었다. 제목 파르테니아는 그리스 처녀의 합창 춤곡 노래이며 이것은 신부 악기의 이름 그리고 이것이 출판된 첫번째 그러한 모음집이라는 것을 교묘히 암시한다.

 

 

                                           ■ 문헌참조:서양음악사(Grout & Palisca 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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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Chopin : Polonaise No.3 in A 「Mil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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