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음악문화사(II) ♡ 2010/01/07 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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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z Belingar - l e R o u g e ●
●★ 고대 말기의 음악양상 ★●
■ 고대 로마의 음악 ■
고대 로마의 음악 : 우리는 로마인이 음악 이론이나 실제 음악에 얼마나 중요한 공헌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예술 음악을 그리스에서 물려받았다. 특히 기원전 146년 그리스기 로마의 영토로 된 후 더욱 그러하였는데 수입된 이 문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에트루리아(역주:이탈리아 서부에 있던 옛나라) 이탈리아의 고유 음악을 대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식의 아울로스인 티비아와 이 악기 주자인 티비시네스는 종교의식, 군악, 그리고 극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몇 가지 금관 악기가 두드러졌다.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길고 곧은 트럼펫인 '투바(tuba)'도 역시 종교, 국가, 군사적인 행사에 사용되었다. 가장 독특한 악기들로서는 큰 G자형의 원형 호른인 '코르누(cornu)'와 그보다 작은 동류인 '부치나(buccina)'가 있다.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행사에 쓰여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개인적인 즐거움과 교육에도 음악의 역할이 있었다. 키케로(Cocero)나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 또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는 교양있는 그리스어로 쓰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듯이 음악이나 적어도 음악 용어에 정통하는 것이 교양있는 사람이 받아야할 교육의 일부라고 생각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부분이 많이 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그리스도 기원 처음 2세기)동안에 예술, 건축, 음악, 철학, 새로운 종교의식 그리고 다른 많은 문화적인 산물들이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로마로 들어왔다. 유명한 연주자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대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유행했으며 웅대한 음악제와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음악을 보호하였으며 네로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으려고까지 하였다. 3세기와 4세기에 걸친 제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해지자 이전처럼 거창하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음악활동은 중단되었다.
● 아미테르에서 나온 석관의 장의행렬 부조(기원전 1세기말) ●
아미테르에서 나온 석관의 장의행열 부조 : 기우너전 1세기말 맨 윗줄의 2인의 코트루 연주자와 1인의 리투스 연주자가 있다. 이 두 악기는 에트루리아 로마의 관악기이다. 아래 줄에는 그리스의 아울로스와 비슷한 티비아연주자 4인이있다.(Aqulia Museo Civico)
■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
유대의 유산 : 오랫동안 음악역사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의 시나고그 예식에 근거하여 예배 의식을 만들었다고 믿어왔다. 이제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것을 뒷받침 할 만한 문서상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실제로 그들의 신앙과 의식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유대 예배의식을 모방하는 것을 기피했던 것 같다. 성전(Temple)과 시나고그(synagogue)의 종교적 기능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전 - 예루살렘의 두번째 선전으로서 기원전 539년에 지어졌던 솔로몬의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해 기원후 70년 파괴된 이후 그자리에 세워진 - 은 공공예배가 행해지는 장소였다. 이 에배는 주로 어린양의 희생제로 구성되었으며 사제가 집전하고 레위인들이 그를도왔는데 레위인들 중에는 음악가들도 있었으며 평신도 유대인들은 그 예배를 지켜보았다. 종종 사제가 때로는 평싱도들도 이 불에 태운 동물을 먹기도 하였다. 이러한 희생제는 매일 아침과 오후에 거행되었으며 안식일이나 축일에는 추가로 공공의 희생자가 있었다. 이러한 희생제 중간에 레위인들의 성가대 - 적어도 12명으로 이루어진 - 는 시편을 불렀는데 주일의 각 요일에 적합한 시편을 불렀으며 이것은 현악기로 반주되었다. 중요한 축일, 예를 들면 유월절 저녁의 경우에는 알렐루야 후렴구가 있는 시편 113편에서 118편이 회중들이 사적인 희생제를 드리는 동안 불리워졌으며 아울로스를 닮은 목관악기가 현악 반주에 합류하였다. 개인들도 성전에서 또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가정에서 혹은 실외에서 기도를 드렸다. 성전의 희생제와 기독교의 미사간에는 확실한 유사점이 있다. 미사는 사제가 포도주의 형태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경배자들이 빵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취하는 상징적인 희생제이다. 그러나 미사가 최후의 만찬의 기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면 시편창 형태의 음악이 수반되는 유월절 식사와 같은 축제적인 유대교의 식사를 모방하였다. 시나고그는 성찬과 기도보다는 낭독과 설교를 위한 장소였다. 회합이나 예배를 드릴때 여기에서는 성서가 낭독, 토론, 또는 설명되었다. 몇몇 낭독은 안식일 아침과 장날인 월요일과 목요일에 지정되었다. 반면 고유문의 낭독은 순례와 관련된 축제, 작은 규모의 축일, 금식일들, 또는 새달의 날에 이루어졌다. 성전(Temple)의 파괴 이후 시나고그 예배에는 사원의 희생제를 대체할 만한 요소들이 편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1세기 혹은 2세기에나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모델이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매일매일의 시편창은 그리스도시대 이후에나 수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집회소에서 교회력의 특정시기에 맞춘 낭독의 관습과 그에 대한 공적인 설명이라는 관습들에서 시나고그의 영향을 받았다.
● Andy Warhol - T h e L a s t e r S u p p e r ●
■ 비잔티움 - 콘스탄티노플 - 이스탄불 ■
비잔티움 : 동방의 교회들은 강력한 중심적인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각 지역에 따라 다른 전례들을 발전시켰다. 9세기 이전에 동방 예식에
쓰였던 음악사본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지만 초기 동방 교회음악에 관한 몇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비잔티움(혹은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재건되어 330년 재통일된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영구 분열된 후
1453년 터키군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1000년이 넘도록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비잔티움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의
소재지였으며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요소를 혼합한 빛나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잔티움의 음악적 관습은 여덟 가지 선법으로 음악을 분류하는 점,
그리고 6세기와 9세기 간에 서방이 동방으로부터 빌어온 수많은 성가들에 그 흔적을 남겼다.
● B l u e D a n c e r s - J o y - Unknowned ●
● Cy twombly b.(1928) - Four Seasons:Summer 1994 ●
서방의 전례 : 동방에서와 같이 서방에서도 처음에는 지방 교회들이 각기 독자성을 띠었다. 물론 일반적인 관습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공유했지만 서방의 각 지역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동방의 유산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초기의 차이점이 지역의 특수한 조건과 맛물려서 5세기와 8세기 사이에 몇몇 다른 전례와 성가의 체계를 만들어내었다. 결국에는 암브로시오 성가 하나를 제외하고 이 모든 지역적 변형이 소멸되거나 로마가 그 권위의 중심이 된 하나의 통일 체계안에서 흡수되었다. 9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론면에서나 실제면에서 서방 교회의 전례는 점차 로마화 되었다. 7세기에서 8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서부유럽은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고트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의 고유한 성가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었다. 대략 현대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는 갈리아식 성가가 있었다. 남부 이탈리아에는 베네벤트식(Beneventan), 로마에는 고대 로마식(Old Roman)성가가, 스페인에는 서고트적 혹은 모사라빅 성가가, 밀라노주변에는 암브로시우스식 성가가 있었다(후에 영국이 자신의 그레고리아 성가의 지역적 방언을 발전시킨 후에는 '세럼-Sarum'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중세 후기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갈리아식의 전례에는 켈트족적이고 비잔티움적인 요소 모두가 혼용되어있었는데 8세기 말경까지 프랑크족 사이에서 쓰인다. 8세기 말에 이르러 피핀과 그의 아들 샤를마뉴가 그 자신들의 영토에서 로마의 성가를 부를것을 요구하게 된 후 이 전례는 억압되었다. 이 전례가 어찌나 철저하게 억압되었던지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반면에 거의 모든 고대 스페인의 가사와 선율들은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 악보로 전사할 수 없는 기보법으로 되어있다. 성가들이 보표선으로 기보되기 이전에 이미 이런 체계들이 전례에 쓰이지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633년 톨레도 공의회가 열린 후 스페인식의 성가는 더 명확한 형태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8세기경 이슬람교인들의 침입 이후 이 전례에는 모사라베식(Mozarabic)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음악에 아라비아가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만한 이유는 없다. 스페인의 전례는 1071년 이전까지 로마 전례로 공식 대치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톨레도.살라망카.바야돌리드 등지의 몇몇 교회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우스식 오퍼토리와 이에 해당하는 스페인의 사크리피시아(sacrificia)간에는 음악적 유사성이 발견되었다.
● 갈리아 성가 - 성아리외(St. Arieux)의 성가집에서 발췌 ●
갈리아성가 갈리아 전례를 포함하는 성 아리외(St. Arieux)의 11세기 성가집에서 발췌한 일면 - 이 페이지에 실려있는 복음 사가인 성 마가 축일의 연도(蓮禱 L i t a n y)이다.
고대 로마식은 로마에서 11세기와 13세기에 만들어진 사본에 보존되어 있는 성가 레퍼토리이지만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은 북부의 프랑크적 양식이 성행하고 지속적으로 발달한 오래된 관례로 믿어진다.(55면참조). 샤를마뉴(742-814)가 건립한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프랑스 스위스와 독일 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에서 프랑크왕국으로 건너온 선율이 무엇이었겠는가?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낭송음, 시편곡조 그리고 단순한 다른 유형의 노래들은 매우 오래된 것들이며 아마도 그 당시로부터 실제로 본래 모습으로 보존된 것들일 것이다 30내지 40곡의 안티폰들은 성 그레고리오 시대에 생긴 곡들일 것이다. 더 복잡한 대부분의 선율들 - 트락트.그레두알.오퍼토리.알레투야들 - 은 아마도 북부로 전해지기 이전에 로마에서(좀더 단순한 형태였을 테지만) 사용되었을것이다. 초기 선율중 몇몇은 고대 로마 성가의 사본에 보존되어 있을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이 수입된 음악중 몇몇은 마침내 우리가 지금 볼수있는 오래된 북부 필사본에 적히기이전까지 변화를 계속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9세기 이후로는 상당수의 새로운 선율들과 새로운 성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성가는 프랑크 출전에서 나온것이며 이들은 아마도 로마의 원판에 기초했을 것이다. 프랑크 출전에는 각 지방의 필사자와 음악가들이 추가한 것과 조금 다른 판들이 들어가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필사본들이 프랑크 왕국에서 축적되고 편찬된 성가의 레퍼토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대부분의 성가가 북부의 종교적 중심지에서 작곡되고 그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최근 프랑크와 고대 로마의 버젼을 비교해본 결과 고대 로마의 것이 원래 성가의 기본 재원이며 이것이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 약간만 변화했을 뿐이라는 믿음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크의 주요 필사본에 보존되어있는 성가는 교황 그레고리 1세(190-604)와 그이 주요 계승자인 교황 비탈리안(657-72)의 지휘하에 재편성되었던 레퍼토리를 전해주고있다.그레고리의 역할이 중요했었다고 알려져있기때문에 이 레퍼토리는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불리운다. 샤를마뉴가 800년 신성 로마제국의 왕위에 오른 후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그레고리오 레퍼토리를 널리 전하고 다른 지방의 성가들 ; 예를 들어 켈트, 갈리아, 모사라베, 암브로시우스의 성가들을 억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지방의 성가들을 없애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의 베네딕트의 수도사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원전들을 주석과 함께 영인본으로 만들어서 Paleographie musicake라는 연속물 출판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수행해왔다. 또한 그들은 다양한 범주의 성가들을 위한 각각의 권들로 된 네우마 양식의 기보법으로 된 현대적 악보 출판을 기획하였다. 이것은 1903년 교황 비오 10세가 공식 바티칸 판이라고 공표하였던 것들이다. 두번째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결의된 자국어 미사의 장려와 함께 이 책들은 근대식 예배에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또한 정기적으로 출판되지도 않게 되었다.
● 모 사 라 베 성 가 - 모사라베식 전례미사 경본에서 발췌 ●
성인들의 축일을 위한 미사를 포함하는 모사라베식 전례의 미사 경본에서 발췌한 모사라베 성가. 이 페이지에는 성 세르반두스와 성 게르마누스 축일에 드리는 성무일과의 한 부분이 포함되어있다. (L o n d o n B r i t i s h L i b r a r y)
● 암브로시우스 성가 - 12세기 암브로시우스 기도서에서 발췌 ●
12세기의 암브로시우스 기도서에서 발췌한 암브로시우스 성가. 이 페이지에는 세례 요한의 참수 축일에 드리는 성무일과와 미사의 일부분이
수록되어있다.
■ 로마의 우세 ■
로마의 우세 : 근대 시기의 첫 몇세기 동안 로마는 제국의 수도로서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본거지였다. 그들의 비밀리에 만나고 비밀리에
예배를 올렸다 313년 콘스탄키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가 제국 내의 다른 종교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인가하여 주었다. 그래서
교회는 즉시 지하생활(역주:종교 탄압으로 인하여 카타콤 생활을 해왔었다)에서 벗어났으며 4세기에는 라틴어가 로마 전례의 공용어로서 그리스어를
대신하게되었다. 로마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게되자 로마의 주교가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신앙과 교육에 관한 로마의 지도적인 권위가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라들이 개종을 하고 부가 늘어감에 따라교회들은 큰 바실리카(역주:볍정 교회등으로 사용된 로마시대의 장방형 회당)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예배는 이제 더 이상 초기의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열리지않게 되었다. 5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황들이 전례와 음악의 개정에
관심을 두게되었다. 수도원 운영의 지침서인 성 베네딕트 규칙(The Rule of St. Benedict,ca 520)에는 칸토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의무가 무엇인가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몇 세기 동안 수도원의 칸토르는 음악 프로그램 도서관과 필사실 등의
유지, 전례의 연주 지휘등을 맡은 중요한 사람이었다. 8세기경 로마에는 스콜라 칸토룸(Scohola Cantorum)이 있었다. 이것은
성인남자와 성인들을 교회음악가로 훈련시키는 일을 위탁받은 가수들과 교사들의 모임이었다. 6세기에 이미 교황합창대가 있었으며 590년부터
604년까지 교황의 자리에 있었던 그레고리오 1세(The great)는 전례 성가를 표준화하려했다는 점에서 칭송되어 왔다. 9세기 중엽,
교회에서 부르고있는 선율은 모두 그레고리오 자신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전설이 나올만큼 그의 업적은 컸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업적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한 전설이 전하고있는 것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의 업적으로 알려진 것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전례집을 새롭게 편찬하고 스콜라 칸토룸을 다시 조직했다. 그는 1년 동안 갖가지 예식에 알맞게 전례의 특정한 항목들을 배정하였는데 이것은
16세기까지 본질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왕국 전체의 통일된 성가 레퍼토리를 확립하기 위한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렇게 위대하고 광대한 업적들이 겨우 14년 동안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 Joan Miro - P o r t r a i t of M r s. M i l l ●
교회의 교부들 : 이러한 견해는 음악이 영혼으로 하여금 신성한것을 사색하도록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교부들의 믿음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음악이 그것을 듣는 사람의 성격에 좋은 혹은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중세 초기의 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생각 즉 심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만 또 아름다운 음을 연주할때의 순수한 쾌락을 위해서만 음악을
듣는다는 생각을 강조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음악 소리가 유쾌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플라톤의
원칙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원칙에 의하면, 아름다운 사물들은 우리에게 신성(神性)과 완전한 미(美)를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향락이나 소유욕만을 고취하는 세상의 외견적인 미(美)는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몇몇 신학자들의 저서에서)의 저서주의 음악에 관한 발언은 이러한 입장에 그 근거를 두고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철학은 음악이 종교의
하인이라는 것이었다. 음악은 그 매력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신성한 생각을하도록 해줄 때만 교회 안에서
들려질 가치가 있었다. 가사가 없는 음악은 이와같은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공식적인 예배에서 기악의 사용을 금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가정이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찬미가와 시편을 노래할 때 리라의 반주는 허용되었다. 이 점에서 교부들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구약성서 특히 시편을 보면 프살테리움과 하프, 오르간 그리고 그밖의 다른 악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많이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였겠는가? 다음과 같은 비유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혀는 주의 프살테리움이다.. 하프는 채(plectrum)가 연주하듯 성령이
진동시키는 입술이라고 이해해야 하며.. 오르간은 우리의 몸이다." 이런 류의 많은 설명들은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데서 기쁨을 느꼈던 시대에는
전형적인 것들이었다.
세인트 오거스틴의「C o n f e s s i o n s」X. Ch. 33. 휘트니 J. 오츠「Basic Writings of saint Augustine」(뉴욕 1948) 중 J.G.Pilkington 역(랜덤하우스)
■ 보에티우스 - Anisius Manlius Severinius Boethius ■
보에티우스 : 고대의 음악 이론과 철학은 - 로마 제국의 멸망과 야만족의 침입 이후 남아있던 수집요약, 변형되어 기원 후 첫 몇 세기동안 서방에 전해졌다. 이러한 과정중 특기할만한것이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의 백과전서적 저서인「머큐리 신(역주:웅변의 신)과 언어학의 결혼-The Marriage of Mercury and Philology」(5세기초)과 아니시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ca 480-524)의「음악의 원리-De institutione musica」이다. 마르티아누스는 기본 교과목으로 문법.변증법.수사학.기하학.산술.천문학과 화성학의 일곱 학예(Seven liberal arts)를 순서대로 제시하였다. 언어적 기술과 관련된 처음 처음 세 과목은 트리비움(trivium)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나중의 네 과목에는 보에티우스가 퀴드리비움(quadrivium)이라 이름붙였는데 이 과목들은 수학적 기술로 구성되어있었다. 마르티아누스는 이 과목들에 대한 도입설명을 머큐리 신과 언어학간의 결혼식의 들러리의 말로 교묘히 위장하고 있다. 화성학에 대한 설명은 대개 4개의 절충적 그리스 저자인 아리스토티데스 퀸틸리아누스(Aristides Quintilianus)에 근거하고 있는데 퀸틸리아누스 자신의 이론적 개념은 아리스토제누스(Aristoxenus)에 바탕을 두고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가미한 것이었다.
● 보 에 티 우 스 - 피 타 고 라 스 - 플 라 톤 - 니 코 마 쿠 스 ●
상상하여그린 초상들.보에티우스는 모노코드로 음들을 측정하고있다. 피타고라스는 헤머로 종을 치고있다. 두 그리스의 저자인 플라톤과 '니 코 마 쿠 스' 는 존 경 받 는 음 악 의 권 위 자 로 그려져있다.
● P a u l B r e n t -- D a i s y F u c h i a B o r d e r ●
■ 문헌자료 - 서양음악사(Grout & Palisca 공저) 제공 ■
■ W.A. Mozart:Symphonie No.41 in C K.551 ■ 「J u p i t e 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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