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오케겜에서 조스갱까지

미뉴엣♡ 2015. 7. 10. 19:29
♡ 오케겜에서 조스깽까지 ♡    2010/05/3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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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 ; 오케겜에서 조스캥까지 ★●

 

 

 

                                                         ■ 일반적 특징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재발견의 경험은 15세기와 16세기의 유럽을 압도하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음악관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고대의 기념물, 조각품과 시처럼 고대음악 자체에 대한 경험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고대 철학자, 시인, 수필가, 그리고 음악이론가들의 저서에 나타나는 것에 비추어 음악의 목적에 대해 재사고하는 것은 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대의 문헌을 읽는 사람들은 왜 현대음악이 고대음악이 했었던 식으로 자신들에게 다양한 감정으로 감동을 주지 않는가를 스스로 묻게되었다. Bernardino Cirillo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그 당시의 현학적인 음악에 실망하여 과거의 위대함을 동경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음악가들은 조각가, 화가, 건축가들이 고대의 예술을 재발견한것, 작가들이 오염된 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라졌던 문학을 무덤에서 되찾은 것, 그리고 과학이 우리 시대에 순수하게 설명되고 제공되었던 것처럼 그들의 직업에서 노력하여야한다. 이러한 견해는 자를리노와 같은 음악가들인 동시대의 대위법적 기교의 달성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지적하던 그 당시에, 비전문가들 간에는 꽤 공통적인 것이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비평가들과 옹호자들은 모두 인문주의라고 불리는 운동에 반응하였다. 이것은 고대 학문 특히 문법, 수사학, 역사, 그리고 윤리 철학의 부활이었다. 이 운동은 생각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 예술작품, 관습,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고대의 기준으로 판단하도록 강요하였다. Cirillo 주교와 자를리노는 고대 이후 음악의 쇠퇴를 비탄하였고 고대에 이룬 고상함을 다시 이루고싶어했다. 그러나 고대의 기준으로 보면 Cirillo 주교가 교회에서 들은 다성적 미사곡들은 적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곡들은 그에게 감동을 주지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자를리노는 비록 중간에 낀 시대에 음악이 소홀함으로서 죽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현대에 이룩한 고상한 음악과 고대 음악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았다. 사실 이 두 이론가는 겉보기만큼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자를리노가 새로운 황금기를 안내했다고 믿었던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는 1540년대에 음악에 감정표현을 넣은 새로운 경향의 선구자중 한 사람이었다. 자를리노는 1558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Le Istitutioni harmoniche' 에서 대위법을 통해 가사의 단어를 표현하고 음악에 붙이는 효과적이고 충실한 방법을 한 장(障)에 걸쳐 소개하였다. Cirillo 주교는 자신의 편지 끝에 Arcadelt 마드리갈 'Ahimedov'e'l belviso(NAWM 56)'를 새로운 표현적인 음악 양식의 선구라고 찬양하였다. 빌라르트처럼 이탈리아에 정착했던 플래미시 작곡가였던 Acardelt는 왕자와 교회의 관대한 후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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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49년 Bishop Bernadino Cirillo의 다성음악에 대한 견해 ■

 

고대인들에게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음악을 가지고 그들은 우리가 오늘날 미사여구나 웅변술로 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움직이는 강력한 효과를 창조하였다. 나는 우리시대의 음악을 보고 듣는다. 몇몇 사람들은 이 음악이 전에 결코 알 수 없었던 수준위 세련미나 완벽성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음악은 이론적인 생산이 아니라 단순히 실제의 응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키리에 엘레이손은 "신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주소서"를 의미한다. 고대 음악가들은 믹솔리디아 선법을 사용하여 신의 용서를 구하는 이러한 간청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마음과 정신의 회개의 느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청자를 울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냉담한 마음을 경건한 마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가는 가사에 따라 유사한 선법을 사용했을 것이고, 키리에와 아뉴스데이, 글로리아와 크레도, 상투스와 플레니, 시편과 모테트 사이에 대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음악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한가지 식으로 노래하지 않고 무관심하고 불확실한 방법들을 혼합한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바라는 것은 교회에서 미사가 불려질 때 음악은 가사의 기본적인 뜻에 맟추어 우리들의 감정을 종교와 신앙심으로 움직여주는 음정과 숫자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시편, 찬미가, 그리고 주님께 바쳐지는 다른 찬양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시대에의 음악가들은 모방적인 악절을 작곡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한 성부가 'sanctus'를 읊는 동안, 다른 성부는 'sabaoth'를 또 다른 성부는 'gloria tua'를 구슬프고 고함치듯이 그리고 더듬거리듯이 읊어댄다. 그래서 각 성부들은 오월의 꽃보다 1월의 고양이에 더 가깝다.

 

                팔레스트리나의「Pope Marcellus Mass」(뉴욕, 1975) pp.11-14 중 알도마누치오의「Lettere

                volgari didversi noblissimi huomini」제 3권(베네치아, 1564), 루이스 록우드 번역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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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는 역사가들이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지적 운동이었다.그것은 시와 문학적 원문 비평과 같은 다른 분야보다 더 후에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러한 지연은 종종 추론된 것보다 그렇게 크지않았었다. 1424년에 설립된 만투아궁정의 고상하고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Vitirino da Feltre의 학교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위한 기초라기보다 고전적인 책으로서 보에티우스의 음악 논문을 읽었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 이론을 재학습하는 시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래지않아 중요한 그리스의 음악 논문들이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이나 혹은 비잔티움을 뒤지고 다니던 이탈리아의 필사본 수집가들이 서유럽으로 가져온 필사본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것들 중에 bachius Senior, Aristides Quintilianus, 프톨레미(Claudius Ptolemy), 클레오니데스(Cleonides), 유클리드(Euclid)와 그당시에 Pluterch의 것으로 알려졌던 음악 논문들이 있다. 또한 음악에 관한 항(項)을 포함하고있는 것으로 유용한 것들은 pseudo-Aristole의 Problems, Athenaeus의 Deipnosophists(이것은 음악에 관해 긴 항을 포함하고있다), Aristole의 Politics 8권, Plato의 Dialogues, 특히 Republic과 laws가 있다. 이들 모두는 15세기 말에 라틴어로 번역되었는데 이중 일부는 학자의 개인적인 이용을 위한 것이어서 일반적으로는 유통되지 않았다. 음악가이자 학자였던 Franchino Gaffurio는 이러한 번역서 중 몇가지를 소장하고 있었으며 그리스의 학문과 이론을 자신의 중요한 작품, Theorica musice(음악이론:1492), Pratica musice(음악의 실제:1496), 그리고 De harmonia musicorum intrumentorum opus(악기의 어울림에 관한 작품:1518)에 편입시켰다. Gaffurio의 저서들은 15세기 말과 16세기초의 음악에 관한 가장 영향력잇는 저서들이었는데 위에 나왔던 작품들의 출판된 번역서 및 해설서들과 함께 선법, 협화음과 불협화음, 조성체계의 범위와 매개변수, 조율, 가사-음악관계, 그리고 음악, 사람, 정신과 우주의 조화와 같은 문제에 관한 새로운 사고를 자극하였다. 선법의 선택이 작곡가가 청자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열쇠라는 믿음이 고대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음으로 해서 상기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그들이 논하는 선법이 어떤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선법에 의한 서로 다른 윤리적 효과를 주장하였다. 피타고라스가 파이프 연주자에게 한 선법에서 다른 선법으로 바꾸어 연주하도록 하여 광폭한 젊은이를 평온하게 할 수 있었다거나, 혹은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지아 선법으로 된 곡을 들었을 때 연회에서 나와 전쟁을 위해 무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얘기되어왔다. 이론가들과 작곡가들은 이러한 그리스의 선법이 비슷한 이름과 교회 선법과 동일하였으며 고대의 감정적 힘이 교회선법에서 야기될 수 있을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잠재력을 특별한 결말을 향해 돌리려하였다. 스위스의 이론가 Heinrich Glarean 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인「Dodekachordon-12현의 라이어」에서 전통적인 8선법에 4개의 새로운 선법을 덧붙였다. 새로운 선법은 최종음이 C인 이오니아와 하이포 이오니아였다. 이러한 추가를 가지고 그는 잘 모르고 자신이 아리스토제누스의 조성체계를 재확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조스캥의 다수의 모테트를 자세하게 분석하여 그의 음악이 12개선법(비록 조스캥은 단지 8선법만 알았지만)의 힘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보여주었다. 3도와 6도가 실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인정되자 협화음과 불협화음은 더욱 뚜렷이 구분지어졌으며 대위법의 교사들은 불협화음을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고안하였다. 대위법에 관해 15세기의 뛰어난 교본은 팅크토리스(Johannes Tinctoris)의「liber de arte contrapuncti-대위법의 기술에 관한 책」(1947)이었다. 그는 플래미시 작곡가로서 1470년대 초기 나폴리에 있는 Ferrante 1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협화음보다 불협화음이 더 많이 쓰인 이전 작곡가들의 작품들에 유감을 표시하였다.(2권 23장) 그리고 자신의 책 서문에서 40년보다 더 오래전에 쓰여진것 중에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곡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팅크토리스는 불협화음의 도입을 위해 매우 엄격한 규칙을 고안하였다. 불협화음의 사용은 약박과 종지에서 당김음이 쓰인 악구(오늘날의 계류음)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규칙들은 뒤이어 나온 이탈리아 저술가들의 논문에서 더 다듬어졌고 마침내 1558년에 나온 자를리노의 위대한 작품「Le Istitutioni harmoniche-화성적 기초」에서 종합적으로 다루어졌다. 3도와 6도의 계속적인 사용에도 15세기 중엽에 이론적으로 인정되었던 조율법은 이러한 음정들이 거치른 소리가 나도록 되어있었다. 이것은 소위 피타고라스 조율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보에티우스, 귀도와 중세의 다른 이론가들의 가르침에 따라 모노코드를 분할하는 방법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1482년에 와서야 이탈리아에 살던 스페인의 이론가 Bartolome Ramos de Pareja가 이러한 분할을 3도와 6도를 최적의 조율상태로 만들 수 있도록 수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Gaffurio와 같은 보수주의자의 반대가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이론과 실제에서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16세기 초기까지 악기들은 불완전 협화음들이 상당히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조율되었다. 그 때까지 피타고라스 체계에서 가장 순수한 음정을 지니고있던 완전 협화음들 만이 종지의 마지막 박에 허용되었다. 완전협화음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불완전 협화음도 허용한 프톨레미가 고안했고 가푸리오가 재발견했던 조율체계--동조(syntonic)의 온음계적 조율, 일종의 순정률--는 많은 이론가들에 의해 이상적인 해결책으로서 옹호되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이론가는 Lodovico Fogliano(1529)와 자를리노(1558)였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다성음악에 대해서는 부적절한 것으로 나타났고 meantone 조율과 평균율 같은 다양한 절충안들의 사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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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ioseffo Zarlino는 그의 시대 음악의 재탄생을 알았다(1558) ■

 

불운한 시대 때문이건 음악과 다른 학문들을 거의 존중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소홀한 때문이건 간에 음악은 예전에 몰랐던 최상의 높이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전의 음악에 놀랄 정도의 명예가 주어졌던 반면 나중에 그것은 매우 낮고 천하며 거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학자들도 그것의 존재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음악이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렇게 명예스러운 엄격함에 일부나 흔적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음악을 해체하고 다수의 가치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가장 나쁜식으로 다루는것을 즐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에게는 그의 무한한 힘, 지혜, 그리고 선함이 자비롭고 부드러운 강세가 동반된 찬미가를 통해 찬양되고 인간에게 명시되는 것이 적합하였다. 신은 자신을 위한 예배에 제공되는 이 예술이 사악한 것으로 생각되도록 허락할 수 없다고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에서그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천사들의 노래에 상당한 부드러움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 현세에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아드리안 빌라르트의 탄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빌라르트는 음악적 실제를 경험했던 사라들 중 정말 보기드문 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새로운 피타고라스적 모습으로 그는 음악에 어떤것이 결핍되어 있는가를 세밀히 검토하고 수없이 많은 오류를 색출하여 그런것 들을 제거하고 음악이 예전에 가졌고 그리고 당연히 가져야만 하는 명예와 고귀함으로 음악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련된 양식을 가진 모든 음악 작품을 작곡하는 합리적인 규칙을 보여주었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한 이것의 분명한 모델은 그 자신의 작품속에 있다.

 

「le Istitutioni harmoiche」(베네치아,1558), 제1부 제1장 PP.1-2에서 발췌. 번역 : C. Palisca역.

 

 

                                           ■ 조율 체계 ■


조율체계 : 새로운 조율체계에 대한 연구는 더 감미로운 협화음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온음계적 선법을 넘어 반음계 음들로 재료가 확장된 것에 의해 자극받았다. 즉흥적인 무지카 픽타는 제한된 수의 임시기호를 요구하였다. 주로 F#, C#, G#, Bb, Eb, 그러나 작곡가들은 새로운 표현 효과를 내기 위하여 5도 사이클(cycle of fifths)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5도 사이클로 인해 그들은 Cb과 Bbb과 같은 음들을 알게되었다. 전통적인 음역(gamut)을 본딴 '픽타'음계들이 이러한 음들을 수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사용된 피타고라스 조율체계에서 C#, Db과 같이 반음 올린 음과 이에 상응하는 반음 내린음은 같은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이중건반을 개발하도록 이끌었다. Nicola Vincentino는 온음계와 마찬가지로 반음계와 이명동음적 음계로 연주할 수 있는 세쌍의 건반을 가진 하프시코드를 발명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음계들(genera)의 힘이 재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음악에대한 인문주의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음악을 문학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동일인었던 고대 시인과 음악가에 대한 이미지는 공통적인 표현적 목표를 추구하는 시인과 작곡가에게 매혹적인 것이었다. 시인은 시의 소리에 작곡가들은 그 소리를 모방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가사의 구두법과 문장 구성법은 작곡가들이 가사를 붙이는 구조를 결정하고 다른 무게의 종지로 가사의 휴지점을 표시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가사의 의미와 이미지는 작곡가들의 동기, 짜임새,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혼합, 리듬, 음의 지속에 영감을 주었다. 가사의 내용을 드라마틱하게하는 새로운 방법들이 추구되었다. 작곡가들은 기보된 음고와 리듬을 정확하게 음정과 일치시키던 이전의 가수들의 특권을 떠맡게 되었다. 청자글에게 더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의미있는 음악을 만드는 이러한 주안점의 변화는 한꺼번에 일어난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전체 대략 1450-1600년 사이에 걸쳐 생겨났다. 음악이 150년간 겪었던 빠른 변화--나라마다 서로 다른 속도로--때문에 르네상스음악 양식을 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르네상스는 음악적 기교의 특별한 경향이라기보다 더 일반적인 문화 운동이며 정신 상태이다.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뜻한다. 이것은 1885년 역사가인 Jules Michelet가 자신의 저서「프랑스 역사-Histoire de France」의 부제로 사용한것에서 유래되었다. 그것은 후에 문화사가 특히 예술사가 그리고 마침내 음악사가들에 의해 역사의 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 쓰여졌다. 한 시대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재탄생 사상은 그시대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학문과 영광을 회복한다고 생각했던 재탄생 사상의 또 다른 한 면모는 정신적 가치와 반대되는 인간에 다시 열중하는 것이다. 죽은 후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충실한 삶은 이제 바람직한 목표로 나타났다. 인간 감정의 모든 범위를 느끼고 표현하는 것과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것은 더이상 사악한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종교적 주제와 마찬가지로 세속적 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자신들의 작품이 신에게 받아들여질 뿐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왜 그 운동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야했던가 하는것은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문제이다. 15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도시국가와 종종 전쟁을 일삼는 작은 공국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배자들--그들은 종종 무력으로 통치권을 얻었다--새로운 예술품과 새롭게 발굴된 고대의 공예품으로 장식된 인상적인 궁전과 시골저택을 짓고 가수들과 기악 앙상블 연주자들이 고용된 교회를 유지하고 이웃의 군주들을 화려하게 대접하여 자신과 자신의 나라의 명성을 높이고자하였다. 반면 시민들--군주에 대한 봉건적 역무가 면제되고 군대의무가 없는--은 상업, 은행업과 기예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신앙적 활동과 연합도 중요했지만 가족의 번영, 부의 획득과 미화, 종교적이기보다 고전적인 아이들의 교육, 그리고 학습과 공공 봉사의 성취를 통한 인격의 실현이 개인적인 삶과 그들의 사회적 접촉 및 제도를 촉진시켰다. 심지어 교황과 추기경 직은 아비뇽 유수 이후 높은 수준의 문화활동과 후원을 위해 세속적인 왕자들에게 위임되었으며 뛰어난 음악가, 예술가, 그리고 학자들 중 일부는 메디치(Medici), 에스테르(Ester), 스포르차(Sporza), 그리고 곤차가(Gonzaga)같은 가문 출신의 추기경 들의 후원을 받았다. 이 가문들은 각각 피렌체, 페라라, 밀라노와 만투아를 통치하였다.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군주들은 가장 관대한 음악 후원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장 재능있는 작곡가들과 음악가들을 프랑스, 플랑드르, 그리고 네덜란드로부터 이탈리아의 도시로 데려왔다. 뒤파이는 1436년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의 봉헌식을 위하여 'Nuper rosarum flores(NAWM31)'의 작곡을 위탁받았다. 1480년대에 메디치(Lorenzo de'medici)는 이 교회의 예배를 재구성하였고 플랑드르 출신의 가수 작곡가들인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 알렉산더 아그리콜라(Alexander Agricola), 그리고 Johannes Ghiselin(Vetronnet라고도 불리는)들을 충입하였다. 카리스마적인 설교자 Savonarola의 지배와 1494년 메디치가(家)가 권한을 박탈당한 기간동안 음악과 음악과 예술이 억압 받은 후 1511년 메디치가에 의해서 후원이 다시 시작되어서 피리프 베르들로(Philippe Verdelot)와 야코프 아르카델트(Jacob Arcadelt)는 거기서 마드리갈 작곡의 전통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스포르차가에 의해 1450년대부터 지배된 밀라노에는 1474년에 이미 18명의 실내악 가수들과 22명의 예배를 위한 가수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프랑코 플레미시 출신인 조스캥 데프레, 요하네스 마티니, 네덜란드 출신인 Gaspa van Weerbeke, 그리고 프랑코 출신인 루이제 콩페르(Loyset Compert)가 있었다. Este 공작하의 페라라 궁정에서는요하네스 마르티니(Johannes martini), Jean Japart, Johannes Ghiselin, 야코프 오브레히트(Jacob Obrecht), Antoni Brumel,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rt)등이 주로 활약하였다. 곤차가가의 지배를 받은 만투아는 후원의 또 하나의 중심지였다. 특히 marchese Francesco Gonzaga의 부인인 Isabella d'Este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페라라에서 마티니의 제자였다. 이곳에 모인 외국인들 중에는 마티니, 자신, 조스캥, 콩페르 라노이의 Elzear genet(카펜트라 라고 알려진)같은 사람들이 들어있었다. 이와같은 다수의 가수들은 조스캥, Weerbecke, Marbriano de Orto, Johannes Prioris, Antonie Bruhier, 그리고 카펜트라(Carpentras)를 비롯한 많은 동일한 가수들이 얼마 동안씩 로마에 있는 교황청 교회에서 재직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주로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가들을 양성한 점이 특이하였으나 1527년 위와 같은 유행에 따라 성 마르코 성당의 합창지휘자로서 아드리안 빌라르트가 임명되었다. 그가 죽자 또 다른 네덜란드인인 치프리아노 드 로레가 물려받았으나 그들의 계승자는 역시 이탈리아인들이었다. 물론 호화스런 궁정에서 일했던 이탈리아 음악가들도 있었으나 1550년경까지는 북유럽 출신의 음악가들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 노래부르는 법과 작곡법, 그리고 자기 지방의 노래들을 가지고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그들이 접한 즉흥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의 몇 가지 특성 - 덜 복잡하고 화성적이며 최상 성부가 지배적이고 종종 춤곡화 할 수 있는 방식 - 을 받아들였다. 아마 북유럽과 이탈이아 요소들의 이러한 혼합이 16세기 중엽의 국제적인 양식 안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특성들을 설명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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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보 인쇄 ■

 

악보 인쇄 : 이러한 모든 활동은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였다. 지역적인 레퍼토리에 적합한 필사본들은 각 중심지에서 편집되었고 항상 호화로운 필사본들은 결혼기념일 등의 경우에 증정품으로 필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항상 작곡가의 작품을 충실하게 전달할 수 없었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작곡된 음악을 훨씬 더 정확하고 널리 보급할 수 있었다. 1450년에 쿠텐베르크가 완성시킨 활판 인쇄술은 1473년경 평성가 기보법으로 되어있는 전례집에 이용되었다. 목판으로 인쇄된 악보의 실례는 15세기 후기의 몇몇 이론서나 교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방법은 단독으로 혹은 활판 인쇄와 혼합되어 16세기초까지 계속 사용되다가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활판으로 인쇄된 다성음악 곡집은 베네치아에서 옥타비아노 데 페트루치에 의해 1501년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1523년까지 페트루치는 성악과 기악곡 59권(개판을 포함하여)을 출판하였다. 그의 출판물 중 최초의 것들은 선명하고 정확한 점에서 모범이된다. 페트루치는 3도 인쇄법, 즉 처음에는 보표선율, 두 번째는 가사를, 세 번째는 음표를 인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보표선과 음표, 그리고 가사를 한 번의 조작으로 인쇄할 수 있는 활판을 사용하는 1도 인쇄술은 1520년경 존 레스텔에 의해 런던에서 최초로 실시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방법은 1528년 파리에서 피에르 아테냥에 의해 처음으로 체계적이며 대규모로 적용되었다. 악보 인쇄는 독일에서 1534년경에 네덜란드에서 1538년에 시작되었다. 니스.로마.뉘른베르크.파리.리옹루뱅, 그리고 앤트워프 등은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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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성음악곡 모음집 -「Harmonice musices odhecaton」 ●

 

                               4개의 파트로 된곡인 <Meskin es hu> 대부분 프랑스 노래들로 이루어진

                               96개의 다성음악곡 모음집「Harmonice musices odhecaton」에서 발췌.

                               1501년 베니스에서 옥타비아노 페트루치에 의해 발행된 이 모음집에는

                               가사의 첫 부분이 칸투스 파트의 아래에만 표시되어있다.

 


16세기에 출판된 대부분의 앙상블 음악은 파트북(partbook)형식으로 인쇄되었다. 대개 장방형의 조그만 책자인 이것은 각 성부가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연주시에는 완전한 한 벌이 있어야한다. 파트북은 원래 가정이나 사교적인 모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대부분의 교회 성가대는 계속해서 손으로 베낀 커다란 성가대악보(choirbooks)를 사용하였다. 몇몇 출판인들이 커다란 성가대 악보를 인쇄해내기도 했으나 16세기에도 여전히 새로운 합창곡집들이 손으로 베껴서 만들어졌다. 한편, 꽉 찬 화성과 모방 기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작곡가들이 한 곡을 창조하는 동안 계속해서 한 성부의 움직임을 다른 성부와 어울리게 조정하도록 요구받게되었다. 초기의 입문서에서 가르쳤듯이 보통 테너 - 소프라노의 두 성부가 뼈대를 이루고 그러고 나서 세 번째 성부와 네 번째 성부가 더 해지는 방법은 이제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1524년에 '피에트로 아론(Pietro Aron)'은 물론 초보자들은 한 성부씩 작곡하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작곡가들에게 한 번에 한 성부를 작곡하기보다 동시에 모든 성부를 작곡하라고 권고하였다. 모든 지점에서 꽉 찬 화성--즉, 촤하성부에 대해 5도와 3도 혹은 6도 와 3도가 오는--을 얻기 위한 메카니즘으로서, 아론과 같은 이론가들은 '협화음표'를 출간했다. 이것은 소프라노의 테너가그들 사이에 주어진 음정을 가지고있다면 다른 성부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시도와 실수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작곡가들은 때때로 지울 수 있는 석판이나 값싼 종이 위에 악보를 적었다. 예를 들어 이론가인 람파디우스(1537)는 마디줄이 붙은 총보의 짧은 예를 보여주고있다. 그것이 고안된 시기는 조스캥과 이삭 시대부터 이다. 총보 사본은 1560년의것 부터 남아있으며 인쇄된 최초의 앙상블 총보는 1577년에 나타난다. 음악에 인쇄술을 응용한 것은 분명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다. 힘들게 손으로 베껴야하며 갖가지 오자(誤字)의 변형을 가져오기 쉬운 소수의 비싼 사본 대신 이제 싼값은 아니지만 같은 필사본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그리고 한결같은 정확성으로 새로운 음악을 풍족히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우기 인쇄 사본의 존재는 이제 연주와 후세대에 의한 연구를 위해 훨씬 많은 음악작품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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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베스트로 가나시-레코더연주 교습서「Opera institulata」●

 

                               실베스트로 가나시(Silvestro Ganassi)의 레코더연주 교습서

                                     「Opera institulata」표지. 레코더콘서트와 두 가수가 인쇄된

                                      '파 트 북((p a r t b o o k))' 을 보고 연주하고 있다.

 

 

              ■ Pietro Aron : 모든 성부를 동시에 작곡하는것에 관하여 ■


많은 작곡가들은 먼저 칸투스를 그러고나서 테너, 텐너 후에 콘트라 베이스를 써야한다는 생각을가지고있다. 이것은 그들이 콘트랄토를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규칙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작품속에 많은 어색한 악절들을 만들고 가수나 연주자에게 어려운 유니즌.휴지.상행 혹은 하행도약을 만든다.그러한 작품에는 부드러움과 조화가 없다. 때문에 작곡가가 칸투스 혹은 소프라노를 먼저 쓰고나서 테너를 쓸 때 일단 이 테너가 완성되면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장소가 부족해지고 콘트라베이스가 완성되면 종종 콘트랄토에 사용할 음이 없게된다. 만일 당신이 각 성부를 하나씩 따로따로 고려한다면 즉 테너를 쓸 때 이 테너와 소프라노간에 협화를만드는데에만 심혈을 기울이거나 콘트라베이스도 그런 식으로 쓴다면 다른 모든 성부가 협화를 이루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4,5,6 혹은 그 이상의 성부를 위한 그들의 작품에서 확실해지듯이 이 문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전시켰다. 작고가들이 위에서 기술된 방법을 따르지않고 모든 성부를 같이 고려했기 때문에 각 성부는 편하고 쉽고 좋은 위치에 놓여졌다. 그러나 당신이 처음에 칸투스, 테너, 또는 콘트라베이스를 작곡하고 싶다면 자유롭게 이 방법과 규칙을 선택할 수 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종종 콘트라베이스, 어떤 때는 테너, 다른 때는 콘트랄토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당시은 처음엔(한번에 모든 성부를 작곡하는 방법이) 어렵고 어색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성부 한 성부씩 시작할 수 있을것이다. 당신이 어느 정도 실제로 경험을 쌓게되면 여기에 설명된 규칙과 방법을 따르게 될것이다.

 

피에트로 아론,「Toscanello in musica」(베니치아 1524), Book 2. Ch. 16 . C. Peli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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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유럽 출신의 작곡가들 ■

 

15세기 초기에 시작된 북유럽인들의 지배는 1450년과 1550년 사이의 이 지역의 중요한 작곡가들과 연주가들의 경력에서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대부분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스페인.독일.보헤미아. 혹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왕, 교황, 혹은 이탈리아의 어느 궁정에서 봉사하면서 생의 많은 부분을 보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궁정이나 나폴리.피렌체.플랑드르, 그리고 네덜란드의 작곡가들의 예술을 보급하는 주된 중심지였다.

 

 

                        ■ 요하네스 오케겜(Johannes Ockeghem) ■

 

요하네스 오케겜 : 요컨대 도나테로가 그의 시대에 조각을 재발견했듯이 오케겜이 이러한 시대들에 음악을 재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란것을 나는 잘 안다. 이러한 찬가는 작곡가가 죽은지 반세기 후에 Cosimo Bartoli가 자신의 책「Ragionamemti accademici」(1567)에 쓴 것이다. 그가 죽은후 얼마 안되어 (오케겜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Deploration sur le Jean Orcheghem)라는 추도사가 씌어졌으며 조스캥 데프레에 의해 1497년에 곡이 붙여졌다. 15세기에는 유명한 음악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晩歌, deplorations)를 작곡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조스캥의 만가에서 테너는 레퀴엠 미사곡의 입당송(requiem Aeternam;저들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소서)을 영창(intone)한다. 그러면 다른 네 성부는 신화적 암시와 반복되는 동음이의(同音異意)같은 당시의 관습적 시어법으로 애도를 표시한다. 1545년에 이르러서도 앤트워프에서 재판(再板)된 바 있는 이 만가는 오케겜의 죽음에 대해 씌여진 여러 곡중의 하나다.

 


                             DEPLORATION SUR LE TREPAS DE JEAN OCKEGHEM


Nympheres des bois, deesses des fontaines                   숲의 요정들이여, 새믜 여신들이여,

Chatres experts de toutes nations,                          모든 나라의 뛰어난 가수들이여,
Changezvos voix tant cleres dt haultaines                   너희 목소리를 맑고 훌륭하게하라
En cris tranchants et lamentations.                         높은 목소리로 외치며 애도하기위하여

Car Atropos, tres terrible satrappe,                        저 무서운 죽음의 폭군아트로포스가,
A vostre Ockeghem attrappe en sa trappe,                    참된 음악의 보배이며 거장인 너희의 오케겜을
Vray tressoriier de musique et chief d'oeuvre,              그의 올가미에 빠뜨렸기에
Doct, elegant de corps et non point trappe;                 박식하고 풍채좋으나, 건강치 못한

grant dommaige est  que la terre le coeuvre.                그를 땅이 덮어버려야 했으니

Acoutrez vous d'habits de deuil;                            애통하도다. 너희는 슬퍼하라,
Josquin, Piersson, Brumel, Compere,                         조스캥, 피에르송, 브뤼멜, 콩페르여
Et plourez grosses larmes d'oeil;                           너희 눈에서 마구 눈물흘리며 울어라,
perdu avez vostre bon pere,                                 너희의 훌륭한 아버지를 잃었도다.
Requiescant in pace, Amen.                                  그들을 평안히 쉬게하소서, 아멘.


이것이 조스캥 데프레에 의해 음악이 붙여진 시이다. 해설링 붙여진 이 작품의 사본을 보기위해서는 에드워드 E. 로윈스키편「The medici Codex of 1518」을 참조하라. 이 시의 7행은 성 마틴 대수도원의 재무 담당자였던 오케겜의 지위를 말해주고 있다. 제 11행에 있는 4개의 이름은 당시 매우 유명한 작곡가들이다. ["Piersson" 은 Pierre de La Rue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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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케겜과 그의 교회음악가들의 성가합창 장면 (1530년경) ●

 

                                   1530년경의 한 프랑스 필사본 중에 있는 이 초상화는 오케겜과 다른

                                   8인의 교회음악가들이 당시의 관례대로 커다란 필사본 성가합창집을

                                   성서봉독대 위에 올려놓고보며 <Gloria>를 부르는 장면을 보여준다.


오케겜은 1420년경에 태어났으며 그에 대한 기록은 1443년 내트워프에 있는 성당의 성가대 가수였다는 것이 처음이다. 1440년대에 그는 프랑스 브르봉의 공작인 찰스 1세에게 봉사하였다. 1452년에 그는 프랑스의 왕립교회에 들어갔으며 1454년의 자료에는 악장(premier chapelain)으로 지칭되고있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며 세 명의 왕--찰스 7세, 루이 9세, 찰스 8세--에게 봉사하였던것 같다. 그는 1497년에 사망하였다. 오케겜은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많은 지도적인 작곡가들의 스승으로 칭송되었다. 오케겜이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알려져있는 그의 작품은 13곡 정도의 미사곡과 모테트 10곡 그리고 약 20곡의 샹송이있다. 미사곡의 수가 비교적 많은 것은 이것이 15세기 후반의 중요한 악곡 형식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작곡가들은 이 형식을 통하여 자신의 기랼과 상상력을 모두 발휘하려고 생각하였다. 미사 'Caput(NAWM 40의 아뉴스데이 참조)'을 포함한 대부분의 오케겜의 미사곡들은 일반적인 음향에 있어서 뒤파이의 작품과 닮았다. 본질적으로 성격이 비슷한 네 성부는 독립적인 선율선의 대위법적 구조하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1450년 이전에는 C이하로는 좀처럼 불려지지 않았던 베이스가 이제는 G나 F음까지 하향 확대되고 때로는 낮은 성부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조합될 때 4도 더 아래로 내려가기도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음악은 대체로 당세기 초기의 것과 동일하다. 예6.1은 그 당시에 사용된 음악을 보여주고 있다. 수페리우스의 음역은 오늘날 알토의 음역에 해당한다. 테너와 콘트라테너(테너알투스)는 거의 같은 음역내에 있으며 성부의 진행에 있어서 서로 교체되는 일이 자주있다. 그 결과 15세기 전반과 비교할때 보다 빽빽한 짜임새와 보다 어두운 동시에 더 균등한 음향이 되었다. 이러한 효과는 오케겜 선율선의 성격에 의하여 보장된다. 이 선율선은 호흡이 긴 악구와 종지가 드물고 휴지가 별로 없는 멜리스마적인 평성가의 리듬과 같이 매우 유연한 리듬의 흐름속에서 길게 늘어나있다.(예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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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말 각성부의 평상적음역:Superius-Contratenor-Tenor-Bass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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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케겜(Okeghem) : Agnus Dei from M i s s a C a p u t ●

 

 

음향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케겜은 15세기초의 작고가들의 실례를 따라 정상적인 4성부에서 하나나 두 성부를 생략하고 3성부나 2성부로 한 부분 전체를 썼다. 혹은 한 쌍을 이루는 두 성부를 다른 쌍과 대조가 되게 배치시켰는데(처음 두 아뉴스데이 부분의 시작에서처럼), 이 수법은 16세기 초기의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에서 자주 나타난다. 대조를 이루기 위하여 오케겜에 사용한 다른 하나의 방법은 모든 성부가 같은 리듬으로 노래하는 악국를 종종 써서 호모포닉(또는 호모리드믹)한 짜임새를 이루는것이엇다. 이러한 낭독조의 작법은 초기의 프랑코 플레미시 작곡가들 사이에서 별로 쓰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단어를 특별히 강조하고싶은 악구에서만 사용하였다. 이 기법은 16세기 후반에는 보다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카논(C a n o n) ■

 

카논 : 일반적으로 오케겜은 그의 미사곡에서 모방 기법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모방적인 악구가 많이 있었지만 모든 성부에 확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 기법은 첫번째 아뉴스의 세 상성부의 제 27-30마디에서와 같이 단지 부수적으로만 사용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브레히트는 <Caput>의 주제[세속 목요일에 쓰이는 안티폰{Venit ad Petrum}에서 발췌, (NAWM 40참조)]의 모방적인 도입으로 세 아뉴스 악곡을 시작하였다(NAWM 41 참조) 하나의 작곡기법 즉 카논은 이 일반 적인 고찰에 있어서 눈에 띠는 예외이다. 오케겜은 그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들어서 알수있는 구조가 엄격하고 감추어진 계산된 다른 구조의 지지를 받고있는 음악을 즐겨썼다. 중세 작곡가들로 하여금 아이소리듬 모테트를 쓰게했던 기술적인 묘기를 발휘하고 전문적인 기술을 보여주려는 경향이 오케겜 및 그와 동시대 작곡가들의 카논 작곡에도 존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카논의 작법은 주어진 하나의 성부에서 한나 혹은 그 이상의 부가 성부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부가 성부들은 작곡가에 의하여 기보되거나 주어진 성부의 음표들이 일정한 지시에 따라 변형되어 노래불려질 것이다. 부가 선부는 여러방법으로 파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가 성부들이 파생되는 규칙을 카논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규칙' 혹은 '법칙'을 의미한다.(우리가 카논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시에는 푸가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제2 성부는 제 1성부의 일정한 수의 박이나 마디 뒤에서 시작하도록 지시되었을 것이다. 혹은 제2성부는 제 1성부의 전위, 즉 항상 같은음정으로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또 파생적인 성부는 제1성부를 거꾸로 부르는것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역행카논(retrograde canon) 혹은 개걸음 카논(cancrizans 혹은 crab canon)이라고 불린다.
두 성부가 서로 다른 속도로 진행되도록 만들수도 있다. 이런 카논을 때로는 정량카논(mensuration canon)이라 부르며 기호(171-173면)를 붙여서 나타낼수도있다. 정량카논에서는 두 성부 사이의 비율이 단순한 확대(제2성부가 제1성부보다 2배의 음가)일수도 있고 단순한 축소(제2성부가 제1성의 2분의 1의 음가)일수도있으며 혹은 보다 더 복잡한 비율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열거된 방법은 어느것이나 조합시켜 사용할 수 있다. 더군다나 어느 경우에도 파생된 성부의 음높이가 원래의 성부와 같을 필요는 없으며 선율이 정해진 음정만큼 위나 아래에서 재현될 수 있다. 어떤 악곡은 이중카논 즉 동시에 부르거나 연주하는 두개(혹은 그이상의)의 카논을 포함하기도한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성부가 다른 성부들이 독립된 선율선으로 진행하는 동안 카논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매우 복잡한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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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케겜(Okeghem) : Kyrie II from the Missa Prolationum ●

 

 

카논 수법으로 쓴 예는 오케겜의 'Missa prolationum(여러 비율에 의한 미사)이다. 이 미사곡의 모든 악장은 다양한 음정과 다양하게 조합된 박자표를 사용하는 이중 정량카논으로 이루어져있다. 예6.3은 이 미사곡의 제2 키리에의 시작부분을 보여주고있다. 원전에서는 두 성부에 각각 각각 두 개의 정량기호--수페리우스에 ○와 ◑, 콘트라에 ⊙과 1/2⊙--가 있다. 그리고 각 정량기호마다 두 개의 C음자리표가 있다. 예6.3b의 현대식 악보에서는 두 개의 상성부가 수페리우스를 나타내고있고 하성부들은 콘트라를 나타내는데 원래의 음가들은 적당히 축소되어있다. 오케겜의 미사 Missa cuiusvis toni는 네 개의 다른 음자리표 조합 중 어느 하나에 따라 악보를 읽고 선율적으로나 화설적으로 베이스와 F-Bㅁ 음정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조정을 함으로서 어느 선법으로나 불려질 수 있다. (예6.4 참조) 그 결과 이 음악은 네 가지 서로 다른 선법 중 어떤 선법으로도 들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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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케겜(Okeghem) : Missa cuiusvis toni 중 Qui toll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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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케겜(Okeghem) : Missa cuiusvis - Q u i t o l l i s ●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러한 것들이나 이와 비슷한 넘처흐르는 기교의 중요성은 쉽게 과대평가될 수 있다. 그것들은 음악적이든 아니든 간에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것이다. 이러한것은 말로 설명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작곡가들의 다른 본질적인것 보다 훨씬 쉽게 기억될것이다. 오케겜이 카논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것 보다는 오히려 그가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 그리 많지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극히 기술적으로 숨겨져있다는 것을 음악을 들음으로서 깨닫는 더 중요하다는것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작곡의 '과학'에 대해 배운 적이 없는 청자들에게도 음악을 통해 교감을 나누는 그의 능력을 조금도 저해시키지 않는다. 오케겜과 그의 동시대인들은 완전한 카논이라면 완전 범죄와 같이 평범한 청자에게 발견되지 않아야함은 물론 의심조차 받아서도 안된다고 믿었던것 같다. 작곡가들이 청자에게 감추어진 교묘함에서 은밀한 즐거움을 가졌다면 이러한 신비스러움에 대한 애호는 때때로 작곡가와 연주자 간에 일종의 추측 게임으로 나타난다. 제 2성부를 이끌어내기 위한(혹은 기보된 성부를 노래하기 위한) 지시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모호하거나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암시될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Clama ne cesses',즉 쉬지말고 외쳐라는 쉼표들을 무시하라는 뜻이다. 이 밖에 더 수수께끼 같은 것들도 있다. 16세기에 인쇄된 형태로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출판업자들이 종종 이런 수수께끼를 풀어낸 해답을 제시하였다는 것은 의미깊은 일이다. 오케겜이 쓴 미사곡 중 몇가지는 뒤파이의 <Se la face ay pale-만약 얼굴이 창백하다면>과 같은 정선율의 기초를 두고있는데 모든 악장의 뼈대로서 주어진 선율을 어느정도 체계적으로 이용하고있다. 예를 들어 미사<De plus en plus-점점 더>는 그 정선율로서 벵슈아의 한 샹송에 나오는 테너 성부를 이용하고있다. 또 미사곡<Ecce ancilla-참 주의 하녀>는 평성가의 안티폰에 기초를 두고있다. 오케겜의 '정선율' 미사곡의 대부분은 기존 선율의 처리가 매우 자유스럽다. (그의 미사곡 <L'homme arme>는 이 점에서 예외적이다.) 15세기와 16세기에 정선율이 없는 미사곡은 그것이 씌여진 선법이나 구성상의 어떤 특성으로부터 그 제목을 따서 붙였다. 각각의 예로는 <제 5선법에 미사곡-Missa quinti toni>이나 오케겜의 <임의적 선법에 의한 미사곡-Missa cuiusvis toni>등이 있다. 오케겜의 미사 mi.mi는 그 명칭을 아마 베이스 성부의 처은 두 음인 e-A에서 땄을것이다. 귀도의 계명창법에서 이 두음은 모두 음절 'mi'에 불려졌다. 정선율도 없고 분명한 특성도 없는 미사곡이나 작곡가가 그 원천을 밝히고 싶지 않은 미사곡은 간혹 <Missa sine nomine-이름없는 미사곡> 라고 불렀다.

 

 

                   ■ 요하네스 오케겜 : Agnus Dei from Missa Caput ■


미사곡 Caput에 차용된 평성가의 선율은 한 옥타브 낮게 노래하라는 말로 된 카논 지시가 붙여진 채 알토자리표로 씌여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로 합창의 가장 낮은 소리를 내게된다. 다소 축소된 Caput 멜리스마는 두 번 사용되었다. 첫번째는 아뉴스 I과 II에서 3박자로 그리고 두 번째는 아뉴스 II에서 더 짧은 음가의 2박자로 사용되었다. 두 번 나오는 정선율 사이엔 프로포션적(proportational) 관계가 없다. 이러한 진행에대한 모델은 같은 주제에 기초한 작가 불명의 영국 미사곡으로 종종 뒤파이의 작품으로 추측되어지는 곡이다. 각 부분은 이중창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빈번한 종지는 가사의 단어와 구절을 구분한다.(단어 'tollis'를 갈라놓은 것처럼 보여지는 열째 마디의 종지는 후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할만한 것이기는하지만) 4성부가 모두 노래할 때 각 성부는 길고 세련된 모양의 아치형 프레이즈를 갖는다. 그러나 그 성부들은 거의 같이 시작하고 끝나는 법이 없다.이것은 이음새 없고 쉼없는 음악이란 인상을 준다. 성부들은 독립성을 유지하며 또한 모방이 드물다. 한 가지 예외는 27-30마디의 악절이다. 여기에서는 3개의 상성부가 한 박씩 떨어져서 같은 동기를 가지고있다. 세 번째 아뉴스의 끝에 있는 소위 종지로 돌아가는 진행은 날카로운 리듬과 싱코페이션의 잦은 사용으로 주목할 만하다. 비록 정선율이 G로 끝나지만 오케겜은 이런 분주한 코다를 통해 D로 끝나도록 강요한다. 다양성을 주기 위하여 다른 부분들은 A와 G로 끝난다. 오케겜의 미사곡들이 15세기초 샹송 양식의 미사와 모테트에 극단적인 반발을 보여준다면 한 편의 신비스런 침잠과 다른 한편의 뚜렷한 표현 사이의 더욱 고른 균형은 프랑코-플레미시 교회음악 작곡가들의 다음 세대에서 복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오케겜의 제자였다. 이세대에 가장 탁월했던 세 사람의 작곡가는 야코프 오브레히트와 하인리히 이삭, 그리고 조스캥 데프레였다. 이들 모두 당세기 중엽에 태어났으며 오브레히트는 베르겐 오프 줌(Bergen op Zoom)에서, 이삭은 아마 브루주에서, 조스캥은 예노.지방의 어딘가에서 태어난것으로 여겨진다.이들은 초기의 음악수업을 네덜란드(Low Countries)에서 받고 그곳에서 경험을 쌓았다.그리고 유럽 여러나라를 널리 여행하며 궁정과 성당에서 일했다.이들의 자곡가 경력은 대부분 동시대인들의 경력이 그러하듯이 15세기와 16세기 무렵 유럽의 북부와 남부간, 프랑스와 프랑코 플레미시의 중심지와 이탈리아의 (얼마후)스페인의 중심지 사이에 음악적 교류가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음악에서 북부젇인 요소와 남부적인 요소들의 다양성과 혼재 그리고 어느정도 융합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것은 당연한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요소'라는것은 북유럽의 무게있는 음색과 엄격한 구조로 기우는 결향, 정교한 다성음악적 짜임새, 그리고 막힘없이 흐르는 리듬 등과 이탈리아의 한층 자발적인 분위기와 보다 명확하게 구분되는 악구 등을 일걷는다.

 

 

                          ■ 야코프 오브레히트(Jacob Obrehit) ■

 

야코프 오브레히트 : 야코프 오브레히트(대략 1452-1505)의 일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있지않다. 그는 캉브레와 브루주 및 앤트워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러 번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1487년부터 1488년까지 페라라의 궁정에서 일했으며 1504년에 공작의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갔으나 일년도 못되어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오브레히트의 작품에는 29곡의 미사곡과 28곡의 모테트 몇 곡의 샹송, 네덜란드어로 된 노래와 기악곡들이 있다. 대부분의 미사곡은--세속적인 노래나그레고리오 선율로된--정선율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빌려온 주제를 취급하는데는 많은 다양성이있다. 어떤 미사곡에서는 선율 전체가 각 악장마다 쓰이고있다. 두 번째 악구는 글로리아에서 사용되는 식으로 되어있다. 또 두 개 이상의 전례용 정선율을 조합시키고있는 미사곡들도 있다. Missa carminum은 약 20여개의 서로 다른 세속적인 선율을 소개하고있다. 그의 미사곡에서는 카논풍의 악구가 자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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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코프 오브레히트 : Agnus Dei from Missa Caput ■

 

Missa Caput(예 6.5)에 나오는 아뉴스 데이의 서두는 같은 주제로 오케겜이 작곡한 미사곡의 실례(예6.2)와 비교할 수 있다. 오케겜과 마찬가지로 오브레히트는 한 쌍의 성부로 시작한다. 그러나 청자는 금방 그 둘의 관계를 알게되는데 두 번째 성부가 첫 번째 성부를 5도 차이를 두고 모방하기 때문이다. 이 두 성부는 이중창 부분 전체에 걸쳐 카논처럼 모방해 나가지만 아주 정확한 모방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상행 5도가 상행 4도로 응답되는 경우이다. 모방되는 선율은 10마디에 걸쳐 하나의 긴 아치형 곡선을 이루며 미묘하게 관련된 작은 동기들로 구성된다. 제1-5마디의 테너성부에서 상향 4도의 동기는 그 다음 두 스테이트먼트 5도까지 확장된다. 이것은 그 멜리스마 음절 'A'에서 말끔하게 끝맺는 마침꼴로 이끈다. 후기 르네상스 작곡가들이었다면 하나의 사상이 완결되기 전에 종지를 갖거나 어는 한 단어가 완전히 발음되기 전에 휴지를 갖는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브레히트는 이런 종류의 융통성 없는 글자 그대로의 해석에 개의치않았다. 동기의 통일을  달성하는 도다른 방법은 제7-9마디의 알투스 성부에서 제시되는데 여기서는 동기의 마지막 네 음이 전도되어(inverted) 진행하는 동안 D-E-G-F-D의 리듬이 그 다음의 음표들에서 반복된다. 선율적 연속성과 각 성부들간의 이런 관련성들은 음악의 구조를 명료하게 한다. 즉 다성음악을 알기쉽게하며 청자에게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일단 정선율이 사용되면 오브레히트가 자유롭게 고안된 모방구조를 쓸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그러나 Caput 성가 단편의 처음 도입부(17마디)에서 오브레히트는 작곡가 불명의 작품과 오케겜의 악곡의 두 다성음악적 모델들에서 벗어난다. 정선율의 서두 네 개의 음표를 엄격하지않은 모방적 짜임새의 기초 재료로 사용하여 상성부들을 정선율에 연관시킨다. 상성부들과 정선율과의 관계는 디스칸투스부분에서 특히 분명하게 밝혀진다. 디스칸투스의 등장으로 정선율 B-D-C-D의 서두와 확실히 병행하는 D-F-E-F가 윤곽을 드러낸다. 또한 마침꼴의 사용 빈도수와 유형은 이전의 작곡가들과 관련하여 오브레히트의 위치를 밝혀준다. 오케겜과 오브레히트는 아뉴스 I과 II의 마지막 화음에 3도를 포함시켰다. 이것은 전시대 무명 작곡가가 처음것에만 그러한 화음을 사용했던 것과 비교된다. 어떤 작곡가도 마지막 아뉴스 III의 종지에 3도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오브레히트는 후세의 딸림음 - 음뜸음의 마침꼴과 같이 베이스가 4도 상행하는 마침꼴로 전체 아뉴스 연곡을 마친다. 이 마침은 15세기 말경에 가장 강력한 마침꼴로 간주되었다. 오브레히트는 선율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도록 내적 종지를 주의깊게 사용하였다. 여러성부의 악구가 중복되고 종지의 느낌을 회피하기위해 베이스를 4도 대신 2도 위로 진행시키거나 (예27 52마디)또는 10마디와 60마디 그리고 아뉴스의 끝부분인 92마디에서처럼 외성간의 6도를 8도로 확장되게 하였다. 그가 사용하는 마침꼴의 대부분은 종지앞의 긴장을 조성하기 위해 7-6 또는 4-3 걸림음을 사용한다. 그러나 오케겜의 특징인 종지를 향해 몰아가는 리듬도 주요 부분의 종결부에 나타난다. 선법에 관한 오브레히트의 태도는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하인리히 글라레아누스는 1547년 그의 저서 Dodecachordon에서 A와 C에 기초한 종지를 지닌 선법을 인정하고 이를 전통적인 8개 교회선법에 추가시켰다. 그러나 오브레히트는 이보다 먼저 이 선법들을 이용하였다. 아뉴스 I과 II의 서두부분은 아뉴스 III의 종결부에서처럼 글라레아누스 '이오니아선법'으로 되어있고 아뉴스 I의 종결부는 그의 '에올리아선법'으로 구성되어있다. 오브레히트는 또한 키리에 이후의 악장에서 정선율을 서로 다른 성부에 놓는데있어서 독창적이었다. 키리에에서는 정선율이 예상대로 테너 성부에 나타나지만 디스칸투스 성부는 글로리아에서 테너성부는 크레도에서 알토성부는 상투스에서 베이스성부는 아뉴스 데이에서 가각 정선율을 갖게된다.

 

 

                                    ■ 샹송( C h a n s o n) ■

 

샹송 : 15세기 후반에는 다성 교회음악 특히 미사 통상문의 작곡이 그 이전 200년 동안 그 어느때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이 시기에 세속적인 악곡이 없었던것은 아니다. 초기의 부르고뉴 악파에서 사용한 전형적인 소규모 악곡은 보다 큰 음악형식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1460년부터 1480년까지의 샹송에는 모방적인 대위법이 점점 더 많이 쓰여졌다. 처음에는 수페리우스와 테너 성부만이 그러했는데 나중에는 3성부 모두 다 그렇게 되었다. 벵슈아의 <혼기에 이른 처녀-Fille a marien>는 자유로운 모방법과 활기찬 실래빅 양식으로 씌여진 두 개의 소프라노 성부를 지지하는 느리게 움직이는 테너와 콘트라테너(아마 기악을 위함)를 가지고있다. 당시 유명했던 뷔스누아(1492년 사망)의 샹송들처럼 오케겜의 대부분의 샹송들은 궁중시의 전통적인 고정 형식(formes fixes)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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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dy Warhol : T h e F l o w e r s 1 9 7 0 ●

 

  

          ■ 요하네스 오케겜의 샹송 : D'ung amer mon cuer s'absseroit ■

 

                              예컨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은 중세형식을 고수하는 론도이다.

 

                                        AB  4행의 반복구
                                         a   반복구음악의 전반부에서 불리는 새로운 2행
                                         A   자신의 음악에 불리는 반복구의 처음 2행
                                        ab  반복구음악에 불리는 새로운 4행으로 구성된 1연
                                        AB  반복구의 전체 행과 음악의 반복

 

이 론도에서 선율은( 이 곡의 원전에서 유일하게 가사를 가진) 최상성부에서 나타나는데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하여 나머지 성부들은 기악 부분이었으리라 가정하고있다. 이 악곡은 강세가 들어가며 멜리스마를 가지는 마지막 단어의 한 음절을 제외하고는 주로 실래빅 양식이다. 조스캥은 그의 모테트 <Tu solus, qui facis mirabilia-당신 홀로 기적을 이루시는 분>(NAWM 32)에서 이 곡의 가사 첫 행과 음악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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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브레히트 ; A g n u s D e i from M i s s a C a p u t ●

 

  

오케겜과 뷔스누아,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글이 쓴 샹송은 널리 애창되었다.오케겜의 나의 입은 웃고있어도 - ma bouche rit>, 조스캥의 <사랑하는 이여 안녕-Adieu mes amours>등과 같은 몇몇 애송곡들은 여러 나라의 필사본과 인쇄본에 거듭 나타나고있다. 샹송은 자유롭게 변형되고 편곡되었다 특히 이것들은 미사곡에 무한한 정선율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때로는 샹송의 수페리우스 성부가, 때로는 테너 성부가 미사곡에 씌여졌다. 이리하여 오케겜은 그의 <나의 귀여운 아가씨 - Ma maitresse>의 수페리우스 성부를 수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미사곡의 글로리아에 사용하였다. 제 1부분은 콘트라 테너네 제 2부분은 그 후 테너에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원래는 <나의 여인, 나의 귀여운 사랑>이러고 알려졌던 바로 그 선율이 "그리고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기쁨" 이라는 가사로 불려진다. 이것은 이 당시에 매우 일반적으로 유행하던 세속적인 선율을 종교적으로 바꾸어놓은 하나의 예이다. 오브레히트의 미사 <나는 요구하지않는다-Je ne demande>는 뷔스누아의 4성부 샹송의 테너만이 아니라 다른 성부의 소재까지도 빌려온것이다.

 

 

                              ■ 오데카톤(O D H E C A T O N) ■

 

오데카톤 : 오브레히트와 이자크 그리고 조스캥 시대의 샹송은 유명한 명곡 선집중 하나로서 1501년 베네치아에서 페트루치가 출판계획의 첫작품으로 출판한「Harmonice musices odhecaton A」에서 연구할 수 있을것이다. (p.208 영인본 참조) 이 제목은 화성적,  즉 다성음악으로 된 노래 100곡 (실제로는 96곡뿐이다)이라는 뜻이다. 문자 'A'는 이러한 연속곡집의 제 1권이라는 뜻이다. 후속하는 <Canti B>와 <Canti C>가 실제로 152과 1504년에 발간되었다. <다성음악 100곡-Odhecaton>은 1470년부터 1500년 사이에 작곡된 샹송들의 선집이다.여기에는 후기 부르고뉴악파 작곡가들로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이 실려있다. 그 반이상이 3성부로 되어있는데 일반적으로 옛 양식으로 작곡되어있다. 이 선집에 나타나있는 작곡가 중에는 이삭과 조스캥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인 아그리콜라(대략 1446-1506, 아그)와 콩페르(대략 1255-1518, 콩페)가 있다. 16세기 전반기 동안 페트루치와 그 후 이탈리아 악보인쇄인들은 프랑스나 프랑코 플레미시악파의 작곡가들이 쓴 샹송을 선집으로 많이 간행하였다. <다성음악 100곡>의 4성부 샹송은 보다 충실한 짜임새와 보다 완전한 모방 대위법 보다 명확한 화성적 구조, 화성간의 보다 큰 균등성, 그리고 양식에서 신구요소들의 보다 밀접한 결합 등 16세기 초에 이 형식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2박자가 부르고뉴악파 시대에 더 널리 쓰이던 3박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동시대의 미사곡과 같이 이러한 샹송 중에는 유행하던 선율이나 그 이전의 샹송의 한 성부를 사용한 것이 많이있다. 16세기 초기의 20년동안 파리에 있던 프랑스 궁중과 다소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있던 프랑코 - 플랑드르 작곡가들에 의하여 여러가지 샹송 유형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샹송 중에는 어떤 것은 완전히 창작된 악곡이었고 어떤 것은 이미 있던 선율이 포함된 것이었다. 오케겜과 대조적으로 조스캥은 고정 형식(formes fixes)을 사실상 단념하였다. 그의 가사는 4행이나 5행의 간단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유절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를 오케겜과 구뱔시캬주는 또 다른 점은 다성의 구조가 층을 이루지 않고 모방으로 얽혀짜여 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테너와 칸투스의 쌍이 골격을 이루고 나머지 성부들은 빈 곳을 채우지 않게되었다. 때때로 조스캥은 대중적인 기원을 가진 곡조와 가사를 채택하였다. 돈이 없으면-Faulte d'argent>에서 그는 콘트라 테너와 제5성부 사이의 5도 아래에서 엄격 카논 방식으로 선율을 작곡했다. 이 주위에 다른 3성부는 밀접한 모방 관계를 구성하나 절대로 구조의 명료성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조스캥이 즐겼던 또 다른 방법은 그보다 젊었던 앙투안 드 패뱅(Antoine de Favin, 대략 1470-1511)이 즐겨쓰던 것이기도 한데 같은식으로 차용한 선율을 테너에 두고 이것을 두 개의 외성부로 에워싸는 것이었다. 이 외성부들은 주선율의 동기를 가볍게 희롱하는 듯한 모방적 대위법 즉 정선율 기법의 응용 중 한가지로 불려진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자유로운 4성부 다성음악 구조에 기존 선율에서 나온 독립된 동기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그것의 선율이나 변형된 선율은 최상 성부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방법과 다른 여러 방법으로 1500년에서 1520년 사이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은 대중적인 요소의와 샹송의 궁중풍이며 대위법적인 전통을 혼합시키려하였다.

 

 

                          ■ 조스캥 데 프레 - 샹송 : Mille regretz ■

 

모든 성부는 악곡구성에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더이상 반주가 따린노래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비애감(et paine douloureuse)"이란 가사(예 6.6 20-24마디)에서처럼 때로 한 쌍의 성부가 또 다른 한 쌍의 성부와 응답하거나 "나의 삶이 곧 끝나갈 것만 같다(brief mes jour definer)" 란 가사의 칸투스와 알투스 부분처럼 두 성부가 모방관계에 있거나 또는 전체 성가대가 동일한 악구를 두 번 반복한 다음 끝부분에서 이와 똑같은 가사로 된 코다를 덧붙이는 하나의 이 샹송은 아마 1520년 황제 샤를 5세를 위해서 씌여진 곡인듯 한데 그의 사후에 가장 인기있는 샹송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샹송곡은 모랄레스가 이사곡으로 개작했고 루이스 데 나르바에즈(Luis de Narvaez)가 1538년 <Los sous libros del Delphin>(NAWM 49b 참조)에 편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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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 : 샹송 : Mille regretz ●

 

 

                             나는 너무 심한 슬픔과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나의 인생이

                             곧 저물어갈 것처럼 여겨진다.
                             ⓒ1964 by the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James Haar,

                             cambridge,Massachusetts에의해 편집된「Chanson and Madrigal」로부터

                             허가를 받아 재수록함)

 

 

                          ■ JOSQUIN DES PREZ(조스캥 데 프레) ■

 

조스캥의 경력 : 서양음악사를 통하여 창조활동이 예외적으로 활발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기간동안에는 창작 곡선이 주목할만한 정점에 도달하였다. 16세기 초기가 그러한 시기였는데 1500년경에 활동하던 작곡가 중에는 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조스캥 데 프레였다. 그는 분명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작곡가들 중에는 조스캥만큼 생존시 명성을 떨쳤거나 후배들에게 보다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거의 없다. 조스캥은 동시대인들로부터 '우리시대의 최고의 작곡가' '음악가의 아버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는 '그는 음표의 주인이다. 음표들은 그가 원하는대로 해야만했다. 그러나 다른 작곡가들은 음표가 원하는대로 따라야만했다'. 고 말했다. 피렌체의 문인인 코지모 바르톨리는 1567년 건축과 회화 조각에 있어서 미켈란젤로가 그러하듯이 음악에 있어서는 조스캥에 필적할 만한 자가 없다고하면서 "이 두사람은 이러한 예술에서 기쁨을 느낄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었다" 라고 썼다. 조스캥은 1440년경 신성로마제국 소속이었던 에노(Hainaut)지방과 접경한 프랑스 영토에서 태어났을것이다. 1459년부터 1472년까지 그는 밀라노 대성당 성가대원 그리고 그 후에는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의 공작 예배당 단원이었다.공작이 1476년 암살된 후에는 그의 동생 아시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이 1505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후원을 받았다. 1486년부터 1494년까지는 때때로 로마 교황청 예배당에서 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1501년 부터 1503년까지는 분명 프랑스에 머물고있었는데 루이 12세의 궁정에서 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503년 페라리 궁중의 maestro di cappella로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 이는 아마 후에 오브레히트의 생명을 앗아간 흑사병을 피하려는 신중한 도피인것 같다. 1504년부터 생애를 마친 1521년까지 조스캥은 그의 고향지역인 콩드 쉬르 레스꼬(Conde sur l'Escaut)에 살았는데 그곳 노트르담 성당의 사제장(provost)을 지냈다. 그의 악곡은 16세기의 많은 인쇄본 선집에 발표되었다. 또 당시의 여러 필사본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작품에는 18곡 정도의 미사곡과 모테트 100곡, 샹송 70곡, 그리고 이 밖의 세속적인 성악곡등이 있다. 조스캥의 작품에는 모테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의 미사곡은 여전히 작곡가가 자신의 기교의 우월성을 보여주는데 이용했던 전통적인 매개물이었다. 그러나 전례적인 형식과 일정불변의 가사 그리고 정립된 음악적 전통때문에 미사곡은 실험적으로 써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모테트는 한 층 자유스러웠다. 폭넓은 가사에 맞추어 작곡할 수 있었는데 모든 가사는 비교적 낯설은 것이었으므로 가사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흥미롭고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16세기에는 미사곡보다 오히려 모테트가 종교음악에 있어서의 가장 매력적인 형식이었다.

 

 

                           ■ 조스캥(Josquin des Prez)의 미사곡 ■

 

조스캥의 미사곡 : 조스캥의 작품 중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몇곡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전통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중세와 근대사이의 경계에 서있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니는 보수적인 특징은 예상했던대로 미사곡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미사곡은 세속적인 선율을 정선율로 이용하고 있으며 교묘한 기교가 많이 드러나있다. 조스캥은 미사곡<L'homme arme supervoces musicale>에서 널리 알려진 15세기의 선율을 헥사코드의 각 음 뒤에 연속적으로 조옮김하여 키리에에서는 C음으로 시작하고 글로리아에서는 D음 등으로 순서에 따라 시작하고 있다. 이 미사에는 정량카논 기법도 사용하고있다. 조스캥의 미사곡은 16세기의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기교와 수법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미사곡 <페라라 공작 에르클레스_Hercules dux Ferrarriae>의 주제는 16세기에 '소제토 카바토 달레 보칼리(soggetto cavato dalle vocali)' 라고 부르던것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어 또는 문장의 각 "모음으로부터 추출된 주제" 로서 각 모음이 헥사코드의 각 모음과 일치하도록 하여 만들어진다. 도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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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클레스 혹은 에르클레 1세--이 주제는 그 이름에서 나온것이다--는

                                 1471년부터 1505년까지 페라라의 공작이었다.

 

 

                                          ■ 모 방 미 사 ■

  

모방미사 : 조스캥의 미사곡인 불온이 나를 덥친다-Malheur me ba>는 16세기에 뒤늦게 알려진 기법으로 쓰여진 한 예이다. 이 미사곡은 오케겜이 쓴 샹송에 기초를 두고있는데 하나의 성부만이 아니라 샹송의 모든 성부가 자유로운 환상과 확장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단지 하나의 성부가 아니라 가존하는 샹송, 미사곡, 혹은 모테트의 몇몇 성부--특징적인 동기들과 진행, 또는 일반적인 구조와 음악의 실징적인 내용까지도 포함하는--를 차용한 미사곡을 모방 미사라고 부른다. 그것은 패러디 미사라고 불려졌었는데 이 바람직하지 못한 용어는 1587년에 작곡가인 Jacob Paix가 붙인 missa Parodia라는 드문 용법에 기초를 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작법만을 언급하였고 경멸의 의미는 없었다. 조스캥의 시대에 그의 미사곡은 'Malheur me bat의 음악을 모방한 미사'라고 불려졌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선율을 어느만큼 차용하느냐하는 데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더 중요한것은 차용한 소재를 취급하는데있어서 어느정도 독창성이 있느냐하는 정도도 마찬가지로 큰 폭의 변수가 있다. 극히 간단한 예는 본래의 음악에 새로운 가사만을 붙이는것이 될수있는데 이런 수법은 '콘트라팍툼' 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된다. 테너 성부에 차용선율을 사용하는 정선율 미사곡은 15세기의 전형적인 방법을 예시해준다. 이 관습의 확대로 기존 선율에서 취한 동기는 테너 성부 이외의 다른 여러 성부에서도 들을 수 있을것이다. 모방 미사로 향한 결정적인 한 걸음은 선택된 모델이 더 이상 하나의 선율선이 아니라 대위법적인 성부들의 전체 구조일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의 고립된 예들은 14세기부터 계속 미사곡에서 때때로 나타난다.이러한 경향은 16세기 초기에 매우 가속된다. 음악적인 소재를 심각할정도로 차용할 뿐만 아니라 차용한 동기와 체계적인 모방법을 지니고있는 원래의 대위법적인 구성을 모든 성부 안에서 조합시킴으로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완성된 모방 미사는 마침내 1520년경 지배적인 양식으로서 정선율 미사곡을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12세기와 마찬가지로 16세기에도 작곡가들이 그들 예술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종교적인 전례용 선율을 꾸밈으로써 얼마나 그것에 대한 정의를 보여주길 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왜 세속적인 선율을 사용하였는가 그들이 만일 긴 작품에 음악적 통일을 주기 위하여 한 개의 주제를 필요로 했다면 왜 평성가를 차용하거나 자신의 주제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왜 미사의 엄숙한 가사를 <나의 연인>이나 <무장한 사람> 혿은 그밖의 다른 세속적인--혹은 음란하기까지 한--샹송을 기억나게하는 것들과 혼용하였는가? 작곡가의 입장에서 보면 세속적인 선율은 길이가 긴 다성의 작품을 구성하는 뼈대로서 이점이 있었다. 다시말해 세속음악의 형태는 평성가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뚜렷하며 그 화성적인 구성도 더 명확했다. 예를 들어 무장한 사람-L'homme arme>는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라도 그 뚜렷한 3부 형식과 화성의 명확한 균형때문에 많이 쓰였다. 계속 선율들은 단선성가를 인용하는 것보다 도 다른 이점이 있었다. 그것들은 특별한 통상부 미사나 교회력의 절기와 연관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미사곡들은 절대적인 독창성을 발휘할 필요를 느끼지않았다. 이런 사상은 19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음악에서 중요해졌다. 그들은 선호되고 표준적인 주제를 가지고 작곡함으로써 다른 작곡가들과 우열을 다투며 경쟁하려는 쪽으로 기울여졌었다. 청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수없는 흐름과 복잡한 울림속에서 때때로 친숙한 무언가를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 즐거움은 모든 시대에 교회 회중들이 빠져들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바리아의 부수상이었던 Dr. Seld는 1559년 바바리아의 Archduke Alberecht V에게 자신이 빈에서 들은 미사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곡의 기초가 된 주제가 내 귀에 쟁쟁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즉시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내가 그것을 다시 불러보았을 때 나는 황제의 교회 악장(jacob Vaet)이 오를란도 디 랏소가 작곡한 모테트 'Tityre tu patulae'를 기초로 작곡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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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사와 음악 ■

 

가사와 음악 : 16세기 초기음악을 현대적으로 만들거나 연주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중 하나는 알맞게 가사붙이기, 음표들에 가사의 각 음절을 맞추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필사본과 인쇄된 성부보가 이 점에 관하여 모호하기 때문이다. 인쇄인들과 사보가들은 음절을 그것이 불려져야할 음표(혹은 음표군의 첫번째의) 바로 밑에 적어놓은 일에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음절의 지속기간을 표시하기 위한 오늘날의 슬러같은 기호가 없었다. 그 대신 세 개의 음절로 된 한 단어는 틀림없이 이 단어가 노래불려져야 할 대개 일곱 개나 여덟 개의 음표로 이루어지는 악구 아래나 그 부근에 놓여진다. 여기에는 그 음표들이 각 음절에 어떻게 분배되어야하는가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다. 더우기 가사의 배치가 동일한 작품을 싣고있는 동시대의 서로 다른 필사본이나 곡집에서 동일한 예는 거의 없다. 오늘날의 편집자와 지휘자들은 당시의 합창곡 가사를 곡조에 배치시킬 때 1533년 조반니 마리아 란프란코에 의해 처음 선포되었고 1558년에 자를리노도 언급한 법칙들에 먼저 의거한 후 어느 정도의 추측과 많은 음악적 상식을 복합시켜야한다. 조스캥시대의 많은 성악곡들은 인문주의의 영향과 또 의심의 여지없이 샹송 및 동시대의 대중적인 형식들인 프로톨라와 라우다처럼 작곡가들이 가사가 잘 들리며 단어들이 올바로 강세를 확실히 유지하도록 노력했던 작품들의 영향을 드러내고있다. 이것은 오케겜과 프랑코-프레미시 악파의 초기작곡가들이 사용하던 매우 화려하고 멜리스마적인 양식과 대조적이었는데 그들은 분명 음악에 너무 심취되어있었기 때문에 가사의 분배법에 대한 세부 사항을 기꺼이 가수들의 숙련된 판단에 전적으로 밑길 정도였다. 프로톨라나 라우다와 같은 이탈리아의 대중음악을 들으면서 조스캥은 특히 단순한 음대음 화성의 가능성을 감지했음이 틀림없다.

 


                ■ 조스캥 데 프레-모테트;Tu solus, qui facis milabilia ■ 

 

이 모테트는 이탈리아 양식이 모델이었을 것이고 조스캥의 초기작품임이 분명하다. 4성부 낭독조의 호모리듬적인 음악으로 된 부분들은 짝을 이룬 성부들이 각각 서로를 모방하는 에피소드와 번갈아 나온다. 호모포닉한 부분은 후에 팔소보르도네(falsobordone)라 알려진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즉흥연주로 시편 낭창에 화성을 붙이는 방법을 말한다. 이른바 기본위치 화음이라 불리는것이 유일하게 사용되는데 그 당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각 화음은 베이스 성부에 대해서 3도음과 5도음을 갖는다. 이 작품이 수록된 일부 필사본에서는 계속되는 이런 화음들 위에 페르마타가 붙어있어서 음가가 유통적임을 나타내고있다. 다른 때에 조스캥은 예 6.7에서 인용된 악구에서처럼 말의 억양의 리듬을 주의깊게 따랐다. "Ad te solum confugimus, in te solimconfidimus" 라는 가사에서 성가대를 두 쌍의 성부로 나누는것은 이런 보편적인 수법이 대단히 훌륭히 쓰인것으로 짝을 이루는 가사에 의해 자연스럽게 제시되었다. 모테트의 제2부(secunda pars)는 오케겜의 샹송<(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 사랑하는것은 - D'ung autre amer>에서의 한 인용구로 시작한다. 이 점은 조스캥의 모테트 <당신 홀로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 자신의 미사곡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에 나오는 '베네딕투스'의 대용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의해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대체작업은 특히 조스캥이 1479년까지 작품활동을 했던 밀라노에서 실시되었다. 샹송의 악구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는것은 우리를 현혹케하리라'는 느낌을 강조하고자 라틴어 가사와 결합하였다. 이런 은밀한 언급은 프랑스 샹송의 레퍼토리에 친숙했던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공작의 예배당같은 왕후의 예배당 가수와 예배객들을 즐겁게도하고 자극시키기도 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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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스캥 데 프레 ; 모테트 ; Tu solus, qui facis mirablilia ●

 

                                       당신 안에서만이 피난처를 찾을 수 있으므로 당신을 믿습니다.

 


가사의 곡을 붙이는데는 교묘한 암시, 단어와 억양과 리듬을 올바르게 잡는것 가사가 들리도록 하는일들 이외에도 더 많은 요인(요건)들이 있었다. 이는 조스캥이 경력을 쌓는동안 점점 더 실감하게되었다. 조스캥은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가사에 알맞게 주의를 기울여 음악을 쓴 것에 대해 특별히 찬사를 받았다. 그이 후기 모테트에서는 그 당시의 작곡가에게 알려져있던 가사의 메세지를 명심(각인)시키는데 유효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있었다.

 

 

                         ■ 무지카 레세르바타(Musica Resevata) ■


무지카 레세르바타 : "음악이 가사의 의미에 어울리게하고 각각 다른 정서의 힘을 표현하며 실제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같이 느껴지도록 가사의 내용을 생생하게 만드는것.." 이것은 프랑코-플레미시악파 후기의 어느 작곡가가 음악에 관해서 한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조스캥에게도 적용된다. 저자는 "이런 종류의 음악을 무지카 레세르바타라 부른다". 고 덧붙인다. 이 낯선 용어(글자 그대로 '제한된 음악')는 16세기 중반 이후 바로 그때의 작곡가들의 진보적이고 혹은 '새로운' 양식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듯하다. 당시의 작곡가들은 가사를 강력하고 세세하게 반영하려는 의도에서 여태까지 알려진것보다 한층 더 한 반음계적 수법이나 자유로운 화성, 장식음, 그리고 리듬과 짜임새의 대조를 그들의 음악에 도입시켰던것이다. 또한 이러한 음악은 특정한 후원자의 방들만을 위해 '제한되었다'는 함축적인 의미 또한 갖고있을 것이다. 조스캥을 이런 관습의 시초와 연관짓는것이 타당한 듯한데 그 이유는 그의 제자인 아드리안 페티코 쿨리쿠스가 Compendium musices(Nuremberg, 1552)의 서문에서 이 논문을 쓰는 목적이 '보통 resevata라고 불리우는 음악을 다시 되살리기 위함' 인데 이런 기술은 그가 조스캥 데 프레로부터 배웠던 것이라하였다. 조스캥의 모테트 <오 나의 아들 압살룸-Absalom fili mi>(사무엘 하 18:33에 나오는 다윗의 비가에 기초)은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 중 하나로서 1497년 자신의 아들 후앙 보르기아의 죽음을 슬퍼하는 교황 알렉산더 6세를 위해 씌어진 것으로보인다. 이 곡의 종장 가까이에는 "그러나 흐느껴 울면서 무덤으로 내려간다." 란 가사를 묘사한 비범한 악구가 있다. 여기서 각 성부는 선율적으로만이 아니라 화성적으로도 하행한다. 음악은 5도권을 통해 Bb에서 Gb까지 진행한다. 이것은 곧 조스캥의 대담한 실험자라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일반적으로 16세기 초기에는 결코 Eb을 넘지않았으며 그 음이 나타나는 일 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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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 : Absalom fili mi ●

 

 

                      ■ 조스캥 데 프레 ; 모테트 ; Domius regnavit ■ 

 

교창적인 모방구조의 대가이자 성서가사의 해석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스캥의 일면을 보여주는 후기작품 하나는 라틴어 시편 92편에 기초한 모테트 <주는 다스리신다>이다. 조스캥은 어떤 차용된 선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음악적인 직감으로 가사의 형식, 단어, 내용에 반응할 수 있었다. 교창적인 시편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성가대를 고음부와 저음부의 쌍들로 나눈다. 고음부와 저음부는 가사에있어 중요한 곳에서 혹은 모든 성부를 포함하는 푸가가 쓰일 때 마지막을 향해 쌓아올려져서 합치된다. 예컨대 "Elevavenrunt flumina Domine;elevaverunt flumina vocem suam" 이라는 가사에서 테너성부가 한옥타브 도약한 주제를 부르면 그다음 나머지 성부들이 마치 파도가 일어났다가 가라앉는 것처럼 차례로 단지 빈 마디 간격으로 종지부에서 이 주제를 모방한다. "큰 물이 큰 물결을 높였나이다.(elevaverunt fluminafluctus suis)" 란 가사에서 파도 모양의 음향은 여전히 동일한 동기에 기초하면서 다시 올라간다. 두 번째 부분(secunda pars)에 나오는 주의 증거하심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Testimonia tua credibilia facta sunt nimis;dominumb tuam decet sanctitudo') 라는 시구는 그 증거하심의 설득력을 강조하는 전반부 끝에서 완전종지로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러고나서 서구의 나머지 부분을 1음표 대 1음표 양식으로 경건하게 낭독하기 전에 반 마디의 쉼표가 있게된다.(예 6.9 참조)

 


                            ■ 오브레히트와 조스캥의 동시대인들 ■

 

하인리히 이삭(대략 1450-1517)은 플랑드르에서 태어났지만 1484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 메디치 가의 Lorenzo the Magnificent 아래서 일을 하고있었다. 1497년 비엔나와 안스부르크에서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중 작곡가가 되었다. 1501년부터 151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피렌체에서 보낸 듯하다. 이삭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의 음악적인 영향을 자신의 양식에 흡수시켰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성격에있어서 동시대 다른 어느 작곡가의 작품보다 더 국제적이다.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이탈리어의 가사를 붙인 많은 노래들을 썼다. 그리고 이 밖에 당시의 악보에 가사가 없기때문에 보통 기악적인 앙상블을 위해 씌여진것으로 간주되는 샹송풍의 짧은 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피렌체에 처음 체재하는 동안 이삭은 피렌체의 휴가철, 특히 사육제기간--사순절 직전--과 Calendimaggio--5월 1일부터 세례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까지--를 두드러지게하는 신나는 축제 행렬에서 부르는 몇 곡의 canti carnascialeschi, 즉 사육제 노래를 위해 음악을 작곡한것이 분명하다. 상인조합들은 이동식 무대차 중 몇몇을 후원했고 이 무대차에서 그들의 업무를 광고하는 시구가 노래되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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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nto caranscialesco ; Orsu, car Sinori ●

 

이러한 광고노래의 초기 예에서 플로렌스의 서기들은 그들의 서비스의 질을 자랑하였다. 그것은 경축행렬 속에서 자기들의 조합(길드)에 의해서 후원된 이동식 무대차에서 불려졌을 것이다. 2박과 3박, 6박의 바뀜은 춤곡의 특징이다.성부들은 세 성부가 모방을 하는순간 (5-6마디)만 제외하고 음절을 같이 노래한다. 화음은 항상 3도와 5도 혹은 6도를 포함한다. 종지에는 싱코페이션에 의한 불협화음이 동반된다. 이것은 각각의 시행을 맵시있게 끝낸다. 동시에 울리는 B-D-F의 결합은 무지카 픽타로 교정되지 않고 협화로 취급된다. 단순한 화성의 낭송조 양식이며 대부분 작자미상인 카니발 노래들은 <Innsbruck, ich muss duch lassen>같은 이삭이 곡을 붙인 독일의 대중적 노래들에 영향을 주었다.

 

 

                ● 하인리히 이삭 ; 리트 ; Innsbruck, ich muss lassen ●


이 선율로 된 두 악곡(NAWM 52a, 52b), 즉 초기의 곡과 후기의 곡은 이삭이 네덜란드 악풍으로부어 이탈리아적 호모포니양식으로 발전해졌음을 보여준다. 초기 악곡에서는 테너성부가 선율을 시작하면 알토성부가 이를 카논식으로 뒤따른다. 이 두 성부에 2개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소프라노와 베이스 성부가 첨가된다. 이삭은 이 악곡의 음악을 차용해서 그의 Missa Carminum 중 'Christe'를 작곡했다. 반면 후기작품 (52b)에서는 이 선율은 소프라노 성부에 놓이며 서두에 몇몇 모방적인 도입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성부들은 소프라노 성부에 화성을 붙이게된다. 이탈리아 다성 노래들처럼 쉼표들이 각 악구를 분리시킨다. 이런 호모포니적인 양식은 후에 회중이 노래할 수 있도록 편곡된 코랄 음악에사용된 짜임새와 비슷하다. 이 계속 선호되는 선율은 나중에 종교적인 가사와 결합되어 코랄<O Welt, ich muss dich lassen-이 세상이여 나는 지금 너를 떠나야하네>로 널리 알려졌다. 이삭의 종교적인 악곡으로는 미사 통상문의 30여 악곡과, 전레적인 가사와 미사 고유문의 선율(많은 시퀀스를 포함하여)에 기초를 둔 교회력의 대부분을 위한 모테트들이있다. 레오냉과 페로땡의 <오르가눔 전집>에 비교할 수 있는 이 기념비적인 세 권의 일련의 모테트들은 <콘스탄체 코랄집-Choralis Constantinus> 이라 알려져있지만 두 번째 권만이 콘스탄체의 교회로부터 위촉받은것이고 첫째와 세째권은 합스부르크 궁정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꼭 언급해야 할 다른 동시대인들로는 많은 모테트와 모테트를 쓴 플랑드르의 작곡가 피에르 드 라 뤼(대략 1460-1518) 와 장 무통(1459-1522)이 있다. 무통은 두 왕 루이 12세와 프란시스 1세 직속 국왕 예배당에서 오랜 세월 일하기 전에 프랑스에서 몇 가지 직책을 맡고있었다. 이론가 글라레안이 조스캥의 '경쟁자' 중 하나라고 표현했던 무통은 여러 미사곡과 모테트를 작곡했다. 이 곡들은 선율선이 부드럽게 흐르고 통일성을 주기 위한 여러가지 다른 기법들을 기술적으로 이용했다는것이 특기할만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프란시스 1세가 1515년에 군사를 이끌고 그 곳에 갔을때 무통도 얼마동안 머물러있게되었다.그리고 그는 베네치아 악파가 생성될 때 초기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던 플랑드르이 작고가 아드리안 빌라르트(대략1490-1562)의 스승으로서도 특별한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있다. 글라레안은 무통의 성부선의 놀라운 유려함에 주목하며 이를 '편안한 맥을 따라흐르는 선율(facili fluentem filo cantum)'로 특징지었다.

 

 

                        ● 장 무통 ; 모테트 ; Noe, noe, psalite ●


무통이 모방대위법에 통달했다는 사실은 이 매력적이고 흥겨운 크리스마스 모테트의 도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르카델트는 이 곡에 기초하여 미사를 작곡하였다.(NAWM 43의 키레에와 글로리아 참조), 이 미사에서 미사의 각 악장의 무통의 서주(시작) 주제로 시작되며 나머지 소재의 거의 대부분도 무통의 모테트에서 이끌어낸것이다. 이러한 재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것은 이 모테트의 명료한형식 덕분이다. 가사의 각 구절은 그 당시에 푸가라고 불렀던 모방적 부분들로 작곡되었다. 시작 주제는 (그 선법의 5도인) 4도 아래서, 그 후에 8도 아래서, 그리고 마지막은 옥타브와 4도 아래에서 응답된다. 무통은 4성부 모두가 그 주제를 부를 때까지(제1선법을 4도 위로 이조시킨) 선법의 최종음인 G조로 완전종지를 피하였다. 비록 "Jherusalem gaude et ietare"와 "quia hodie natus est Salvatormundi"라는 가사에 대한 두 개의 주제가 모방에 의해 발전되지만, 그는 문장의 끝까지(역시 그 선법의 최종음으로) 다른 종지를 만드는것을 연기하였다.푸가작법은 이제 덜 형식적이며 후자의 악절에서 성부도입의 연속은 5도권으로 G로부터 Bb까지 하행한다. 이 모테트에서 세 번 나오는 "Noe, noe" 라는 후렴은 짝지어진 성부들로 도입된다.(40-45, 91-97, 104-109마디) 두 가지의 다른 푸가 기법은 다음에서 예시된다. 즉, C-D-E-F가 F-A-Bb-C로 응답되는 선법적 응답(74-76마디)과 두 개의 다른 주제가 동시에 나오는(85-90마디) 이중 푸가이다.

조스캥 이후의 작곡가들은 점점 더 모방미사를 선호하였다. 젊은 시절에 조스캥과 같이 수하했던것으로 여겨지는 야코프 아르카델트는 그러한 종류의 두개 미사를 썼다. 그 중 하나는 모통의 모테트 'Noe, noe(NAEM 34)를 기초로하였다. 라소와 팔레스트리나의 대부분의 미사들도 이 유형으로 되어있다.

 


             ● 야코프 아르카델트 ; 미사 ; Noe, noe, Kyrie and Gloria ●


이 두악장들은 각각--사실 이 미사곡의 모든 악장들과 마찬가지로--무통의 시작주제(NAWM 34)로 시작된다. 키리에의 첫 8마디까지는 거의 똑같다. 그러나 글로리아에서 성부들은 대위법적으로 약간의 조절이 요구되는 다른 순서로 제시된다. 이 악장들의 나머지 소재도 거의 같은 모테트에서 이끌어내었다. 키리에서 동기가 나오는 순서는 모테트의 순서를 따른다. 글로리아는 가사가 길기 때문에 아르카델트는 예를 들어 'Laudamus te(13마디)'같은 곳에 새로운 재료를 도입해야했고 동기들이 나오는 순서를 바꾸어야했다. 그러므로 Domine Deus(32마디)'에 나오는 'et elevamini'에서 차용된 무통의 주제(74마디)는 그 미사의 'Jacet in praesepio(무통, 53마디)'의 주제보다 미사에서(40마디)앞에 나온다. 후렴 "Noe, noe'는 키리에에서는 눈에 띄게 나오지만 글로리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모방 미사에서 보통 그렇듯이 모테트의 마지막 부분(22-25마디)에 차용되었다.

 

 

                                          ■ 참조문헌 : 서양음악사(Grout & C. Palis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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