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 음악 ♡ 2010/03/26 20:27 |
| |
●★ 14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 음악 ★●
■ 일반적 배경 ■
사회적 배경 : 13세기를 안정과 통일의 시기라고 한다면 14세기는 변화와 다양성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크게 이러한 대조를 상징하는것은 교황권의 상태였다. 13세기에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교회의 권위가 신앙과 도덕문제 뿐 아니라 학문과 정치에까지 절대적인것으로서 인정받고 존중되었다. 14세기에는 이 권위, 특히 교황의 절대권에 대한 문제가 광범위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교황들은 로마에 팽배해있는 무질서와 폭동을 피하여 14세기 내내 1305년부터 1378년까지 -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바빌로니아의 노예')에서 살았다. 그후 39년동안(1417년까지) 교황을 참칭하는 경쟁자들이 둘, 때로는 셋씩 생겨나게 되었다. ('대분열'), 고급 성직자들의 불명예스럽고 타락한 생활과 더불어 이러한 상태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실랄하게되어 여러가지 저작물에서 뿐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던 여러분파의 이단적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13세기에는 계시와 이성, 신적인것과 인간적인것,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요구와 현세의 정치적 국가들에 대한 요구들을 화해시켰다. 반대로 14세기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하느님의 계시를 그 자체의 영역 안에 한정되고 그 안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분리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고 국가는 그들의 지상적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들 쌍방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리하여 종교를 과학과 교회를 국가와 분리시키는 관념의 기초가 성립되어 중세 말기 이후로 널리 퍼져오게 되었다. 14세기 사상의 원심적 움직임은 여러 사회적 추세와 병행하고 있었다. 즉 흑사병(1348-50)과 백년전쟁(1338-1453)의 끔찍한 참사들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혼란은 도시민의 불만과 농민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보다 앞선 200년동안 도시의 성장은 중산계급의 정치적 권력을 증대시켰으며 또 동시에 낡은 봉건주의적 귀족사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하였다. 14세기에 이르자 기사도는 살아있는 힘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예의와 의식의 형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럽의 정치적 통일이라는 중세의 이상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세력의 실제로 좌절되엇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절대왕국의 방향으로 발전허였으며 이탈리아반도는 다수의 작은 경쟁국가들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자주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로서 서로 경쟁을 벌였다. 세속적인 관심사가 점차 독립성을 띠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국어 문학이 계속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 단테의「신곡」(1307)과 보카치오의「데카메론」(1353), 그리고 초서(Chaucer)의「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1386)등은 14세기 문학에 있어서 아주 획기적인 사건들이다. 또한 이 즈음에 인문주의가 시작되었고 후기 르네상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고전 라틴과 그리스 문학연구가 부활되었다. 회화분야에서 조토(Giotto,1266-1337)는 공식화된 비잔티움 양식에서 벗어나 사물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경향을 지향하는 첫번째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문학과 교육, 예술은 모두 종교가 그 중심이던 비교적 안정되고 통일된 13세기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변화하는 이 세상 인간 생활의 현상들에 열중하는 움직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이 변화는 속도가 느렸고 강조점의 완만한 변화였으며 갑작스런 가치의 반전은 아니었다. 1300년 이전에도 14세기 고유의 경향과 특징들이 많이 나타났었고 또 13세기의 많은 특징들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 프레스코 벽화(1305년 작품) - Giotto ● 아레나 체플에 있는 이 프레스코 벽화(1305년의 작품)는 예루살렘의 황금문에 서있는 요하임과 안나를 묘사하고 있다.
■ 음악적 배경 ■
음악적 배경 : 'Ars Nova' - '새로운 예술' 혹은 '새로운 기법' - 는 프랑스의 작곡가, 시인이며 Meaux의 주교인 필립드 비트리(Phillippe de Vitry, 1291-1361)가 1322-1323년경에 쓴 논문의 제목이었다. 이 용어는 14세기 전반에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음악형식을 표현하는데 매우 적합했다. 당시의 작곡가들은 비트리의 논문제목에서만이 아니라 무리스(Johannes de Muris)의 <Ars nove musice - 새로운 음악기법> (1321) 같은 다른 프랑스 작품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새로운 길을 의식적으로 개척해 나가고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프랑드르의 이론가 리에주(Jacob of Liege)는 그의 백과 사전식<Speculum Musicae - 음악의 거울>(1325년경)에서 현대인들의 혁신에 대항하여 13세기 말기의 '옛'기법'을 강력히 옹호하였다. 쟁점이 되었던 두 가지 중요한 기교적 문제는 첫째 세개의 동일한(혹은 두개의 다른) 부분으로 나누는 전통적 3분할법 또는 완전 분할법 뿐만아니라 롱가와 브레비스(경우에 따라서는 세미브레비스)를 2개의 동일한 부분으로 나누는 근대의 2분할법 또는 불완전 분할법의 원칙도 받아들일것인가 하는것이고 둘째 브레비스(이미 페트루스 데 크루체의 모테트에서 시작된)에 상당하는 제개 이상의 그리고 그 결과 더작은 음가를 지니게되는 세미브레비스를 사용할것인가 하는것이었다.
■ 프랑스의 아르스 노바(Ars Nova) ■
14세기의 작곡가들은 종교음악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세속음악 작품을 남겼다. 원래 종굑음악형식에서
비롯된 모테트는 이미 13세기말경에 대부분 세속화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프랑스에 남아있는 음악문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필사본(Paris, Bibliotheque nationale, MS fr. 146)으로 남아있는 풍자시인 <포벨의
이야기-Roman de Fauvel>이다 이것은 1310년에서 1314년 사이의 것으로 여기에 167곡 가량의 음악이 삽입되어있다. 이것은
사실상 13세기와 14세기 초기음악의 선곡집이라 할수있다. 포벨에 들어있는 작품들은 대부분이 단성음악 즉, 롱도, 발라드, 샹송, 반복구,
그리고 여러가지 평성가 - 이지만 다성 모테트 역시 34곡이 포함되어있다. 이 가운데는 13세기 후기양식으로 된 다른 예들 중에 브레비스의
새로운 2분할법을 도입한것도 몇 곡 들어있다. 가사는 성직자를 비난하는 내용이 많고 동시대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언급도 많다. 이러한 풍자적인
내용은 14세기 모테트의 특징이자 그 이전 시대의 콘둑투스의 특징이기도 했다. 14세기 모테트는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 아르스 노바에 대한 리에주의 반박 ■
올리버 스트롱크의 「Source Reading in Music History」(뉴욕 노턴출판사 1950)에 번역되어있는「Speculum musicae」ca.1325, Book7,46장에서 인용,pp.189-90.
<포벨의 이야기>에 나오는 3성부 모테트 중 다섯 곡은 비트리가 쓴것이다. 아마도 그가 작곡했을 9곡의 다른 모테트들은 1360년경에 씌어진 Ivera 사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트리는 그 당시 특출한 작곡가이자 시인이었다. 페트라르카는 그를 "프랑스의 단 한 명 뿐인 진실한 시인"이라고 격찬했다. 그의 모테트의 테너는 우이가 이미 13세기 후기의 몇몇 모테트(예3.9와 예3.11 참조)에서 검토한 것과 동일한 원칙하에서 종종 동일한 리듬을 가진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의 몇몇 모테트에서처럼 리듬형은 어느정도 반복후에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든것은 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일어난다. 즉, 테너는 더 길고 리듬은 더 복잡하며 전체 선율이 상성부의 한층 더 빠른 음표 아래서 너무 느리고도 무겁게 진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선율이라고 인식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대신 테너는 곡을 구성하는 토대로 기능한다. 이 점은 비트리가 작곡한 모테트 <Garrit gallus - In nova fert - Neuma>에서 명백히 입증된다.(NAWM 21)
■ 아이소리듬 모테트 ■
아이소리듬 모테트 : 14세기가 지나갈무렵 이론가들과 작곡가들은 대체로 비트리의 영향하에--이러한 모테트의 테노르가 두 가지의 뚜렷한 요소들, 즉 그들이 '콜로르(color)'라고 부르는 선율 음정의 세트와 '탈레아(talea, '절단' 혹은 '부분')'라고 부르는 리듬 패턴으로 이루어지는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콜로르나 탈레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결합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두가지의 길이가 동일하다면 콜로르는 원래 음가의 반으로 줄어든 (도는 다른 방식으로 줄어든) 탈레아와 함께 반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콜로르와 탈레아는 길이가 서로 달라 끝부분이 합쳐지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콜로르의 반복구 중 몇 개는 탈레아의 중간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과 같은 방법의 반복으로 구성된 테노르를 가지는 모테트를 아이소리듬(isorhythm ; 동형리듬) 모테트라 한다. 어떤 경우에는 테노르와 마찬가지로 상성부들도 아이소리듬적으로 씌여졌을 것이며 또 이 기법은 때때로 다른 형식의 악곡에 적용되기도 했다. 몇몇 모테트에서는 콜로르가 탈레아를 중복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혹은 두 개의 끝이 만날 때는 두 번째 콜로르가 음가가 반으로 줄어든 탈레아를 가질수 있었다.이러한 예로는 기욤드마쇼의 모테트 <De bon espoir - Puisque la douce-Sper-avi>가 있다.
● 카리바리(C h a r i v a r i) - 「포벨의 이야기」●
카리바리(Charivari) : 요란한 세레나데가 결혼식 후 잠들어있는 포벨 과 허영(Vaine Gloire)을 깨운다. 게르베 뒤부스(Gervais du Bus) 의 짧은 음악이 삽입된 <포벨의 이야기> - 시의 일부분, 포벨은 비유적인 말, 나귀로 그의 이름을 이루는 글자들은 다음과같은 죄들을 상징한다. 아첨(flatterie) - 탐욕(avarice) - 저열(vilainie) - 변덕(variete) - 비겁 (lachete)이다...............((Paris, Biblitheque nationale, MS fr.146))
■ 필리프 드 비트리:모테트 : from「Roman de Fauvel」■ Garrit gallus - in nova fert - Neuma
예 4.1은 모테트 Garrit gallus 의 아이소리듬적 테노르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테트의 작곡가 비트리는 리듬패턴 혹은 탈레아가 세 번 나오도록 하기위해 네우마의 선율을 세 개의 균등한 부분으로 분할했다. 그 다음 그는 두 번째 콜로르를 위해 다시 그 선율을 반복했으며 똑같은 탈레아들을 이용하였다. <Garrit gallus>는 다른 차원의 복잡성을 지닌다. 본래의 기보법을 보면 테노르는 부분적으로 빨간색음표로 기보되어있는데 이는 가수에게 이러한 색갈이 있는 부분들은 검은색 기보법으로 된 3박자와 대조적인 2박자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자 함이다. 예4.1에서 이런 부분들은 불완전한 괄호로 표시되어 있다. 현대 기보법의 음가로 본다면 앞뒤의 다른 부분이 세쌍의 6/8 단위군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2분할과 3분할의 혼합은 아르스 노바의 새로운 기법중의 하나이다. 이 테노르 부분의 또 다른 특징은 색깔이 있는 부분이 중앙에 있는 쉼표를 중심으로 리듬적 대칭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테트들에서 종종 보여지듯이 아이소리듬적 구조에 의해 미묘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갈등을 이루는 형식을 들을 수 있다. <Garrit gallus>에서 시행의 처음과 끝은 테너의 탈레아 시작과 끝부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듯이 보인다. 오히려 두 개의 상성부는 명백하게 서로 연관되어있다. 두플룸은 언제나 트리플룸보다 한마디 앞섯 그 악구를 끝맺고 쉰다. 이러한 점들은 탈레아의 끝과 맞추는 대신에 색깔이있는 부분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즉 두플룸은 항상 색깔이 있는 부분의 시작 부분에서 쉬고 트리플룸은 그 끝에서 쉬는것이다. 색깔이 있는 부분은 또 다른 중요한 방식으로 트리플룸에 영향을 미쳤다. 즉 그들 중 셋 위에 있는 트리플룸은 아이소리듬적이었다.(마디 32, 57, 82 참조)두 박자 - 세 박자의 이분법은 청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구조적 결정요인이었다. 정신과 물질의 이중성이 이 음악에서 이런 방법으로 매우 명확하게 되었다.
in nova fert - Neuma의 테너
출처 : Hoppin,「Anthology of Medieval Music」pp.120-25.
■ 기욤 드 마쇼(Guillaum de Machut) ■
기욤 드 미쇼 : 프랑스 아르스 노바를 주도했던 작곡가는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ut, ca. 1300-77)였다. 마쇼는 프랑스 북부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위해 교육을 받고 서품을 받았다. 20대 초반에 보헤미아 존와의 비서가 되어 왕의 종군 사제로 유럽의 여러 지역을 수행했고 1946년 크레시(Crecy)전투에서 존 왕이 전사한 후, 마쇼는 프랑스 궁중에 들어가 일하다가 랑스(Rheims)의 성당 참사회원으로 은퇴한 후 그의 일생을 마쳤다. 마쇼는 음악가로서만아니라 시인으로서도 유명했다. 그의 음악 작품에는 당시 유행했던 대부분 형식의 예들이 포함되어있으며 이것은 곧 그가 보수적 경향과 진보적 경향을 겸비한 작곡가였음을 보여준다. 마쇼의 23곡의 모테트 대부분은 전통적 패턴, 즉 기악으로 연주되는 전례용 테노르와 각각 다른 가사를 갖는 두 개의 상성부들로 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더욱 세속화되었고 더 길어지며 리듬적으로 훨씬 복잡해지는 동시대의 경향을 보여주고있다. 아이소리듬적 구조는 테노르뿐만 아니라 상성부들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테트들에서 호케투스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호케투스'라 불리는 마쇼의 유일한 작품은 분명 기악으로 연주되었을 3성부의 모테트같은 작품으로서 이 작품의 아이소리듬적인 테노르 선율은 알렐루야 시행중 'David'라는 단어에 붙은 멜리스마에서 나온것이었다.
● A n d y W a r h o l - The Butterflies ●
세속 작품들 : 마쇼의 단성노래들은 프랑스에서 투르베르의 전통을 이어가는것으로 볼수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시퀀스와 흡사한 12세기 형식인 19개의 '레 lai'와 더불어 더 보편적인 명칭은 '비를레(virelai)'이지만 마쇼가 'chansons balladees'라 부른 약 25곡의 노래로 구성되어있다. 비를에의 특징은 Abba형식인데 A는 반복구를 b는 (반복되는) stanza의 첫부분을 그리고 a는 반복구와 (같은 선율을 사용하는)시절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킨다. 시절이 여러 개 있다면 반복구 A는 매시절마다 반복될 수 있다. 그는 7곡의 2성부 비를레와 한 곡의 3성 비를레도 작곡하였다. 2성부곡인경우 성악 독창은 그 아래에 있는 기악 테노르 성부로 반주되었다. 이러한 비를레에서 마쇼는 가끔 두 선율적 부분의 끝 사이에 음악적 운의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마쇼가 아르스 노바의 진보적 경향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소위 'formes sixes'라 부르는 다성의 비를레와 론도, 그리고 발라드에서였다. 그는 새로운 2분할법의 가능성을 추구하였다. 즉, 큰 세 박자를 분할하거나 운율을 더욱 분명히 들리는 2분할로 구성한것이다. Quant Thesus(NAWM 24)나 미사 중의 아뉴스데이(NAWM 25)에 이러한 예가 나타나있다. 마쇼의 작품에는 여전히 병행5도 와 많은 날카로운 불협화음을 들을 수 있긴 하지만 3도와 6도의 부드러운 음향과 협화음 화성에 대한 일반적인 감각은 그이 작품을 다른 아르스 안티콰 작품과 구별시켜준다. 14세기의 새로운 서정주의는 독창성부의 섬세하고 유연한 선율과 기사도적인 내용을 담은 시행의 양식화된 언어에까지도 부드러움을 더 해주는 섬세한 악센트를 토해서 잘 드러난다. 마쇼 자신도 진정한 노래와 시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Car qui de sentiment non fait / son oeuvre et son chant contrefait") 최상성 혹은 칸투스는 가장 중요한 성부였고 테너는 이를 반주하도록 쓰여졌으며 트리플룸이나 콘트라테너, 또는 가능한 제4의 성부는 테너와 적합한 화성을 이루도록 쓰여졌다. 마쇼가 이루어 놓은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발라드, 즉 '칸틸레나' 양식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 양식은 그의 다성 비를레와 그리고 41곡의 '발라드 노테(Ballade notee)'--음악이 붙지 않은 시적 발라드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렇게 불렀다--에도 나타나 있다. 부분적으로 투르베르에서 물려받은 형식을 가지는 마쇼의 발라드들은 보통 셋 또는 네 개의 절로 이루어졌으며 각 절은 같은 음악으로 불려졌고 각각 반복구로 끝났다. 각 절 안에서는 처음 두 행(혹은 첫 두 쌍의 행)이, 간혹 , 끝나는 부분이 다르긴하지만 동일한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 각 절의 나머지 행들및 반복구는 다른 선율을 가졌으며 그 선율의 끝은 첫번째 부분의 끝과 대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발라드형식은 미네징거의 Bar형식과 비슷하다. 도식적으로 aabC 라할 수 있는데 여기의 C는 반복구를 말한다.
● 기욤 드 마쇼(Guillaum de Machut)의 서재 - miniature ●
기욤 드 마쇼(Guillaum de Machut)가 그의 서재에서 '사랑(Amour)'의 방문을 받고있다.. 사랑은 그의 세 자녀, 달콤한 생각(Doux Penser). 즐거움(Plaisance). 희망(Experiance)을 소개하고있다. 마쇼의 전집 필사본에 수록된 장 방돌(Jean Bandol)의 '아틀리에 작품' 미니어쳐 ((P a r i s, B i b l i o t h e q u e N a t i o n a l e. MS fr.1 5 8 4))
■ 기욤 드 마쇼;이중 발라드;Quant These-Ne quier veoir ■
■ 마쇼의 성모 미사곡(Messe de Notre Dame) ■
마쇼의 <성모 미사곡> : 14세기 악곡 중 가장 유명한 것은 "Ite missa est (가라 해산이다)"를 곁들여 미사통상문을 4성으로 작곡한 마쇼의 <성모 미사곡-Messe de Notre Dame>이다. 이것이 다성으로 작곡된 최초의 통상문은 아니다. 이보다 앞서 완전한 연곡이 최소한 네 곡은 있었다. 그러나 마쇼의 작품은 그 방대한 규모와 4성부 구조(당시로는 드문일이었다)때문에 그리고 음악적 전체로서 명확히 계획된것이고 모든 면에서 일급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12세기와 13세기의 다성음악 작곡가들은 주로 미사의 고유문에서 가사에 주로 흥미를 가지고있었다. 레오냉과 페로땡의 오르가눔에있는 그라두알레와 알렐루야가 그 예이다. 그들 역시 통상문의 일부를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한 예배에서 함께 연주할 때 그 선택과 조합은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Kyrie와 Gloria, Credo, Santus그리고 Agnus Dei가 동일한 선법에 의한 것인지 또는 동일한 주제의 소제에 기초하는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 음악적으로 통일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않은듯 했다. 이러한 태도는 15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다. 14세기와 15세기 초기의 작곡가들이 통상문에 붙이는 곡을 썼다고는 하다라도 그들은 대개 다른 악장들을 음악적으로 관련시키려하지는 않았다. 필사본을 보면 Gloria는 한 곳에 전부 모여있었고 모든 Credo가 그 뒤를 따르는 등 미사의 각 부분이 대체로 분리되어 있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이 곡집에서 통상문 전부를 연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개별적인 부분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쇼가 통상문의 다섯가지 부분을 독립된 악곡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음악작품으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보는 한 그의 성모의 미사곡은 씌어진 시대에서뿐 아니라 그 다음 75년 동안에도 역시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음악적인 통일을 이루게 한 방법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않다. 악장과 악장의 관계는 주제상의 명확한 연속성이라기보다는 분위기(mood)와 일반적인 양식의 유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것이다. 물론 몇몇 주석가들은 이 작품을 통하여 일정한 음악적 동기가 여러번 나타나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 마쇼의 미사 동기 ■
Gloria와 Credo는 둘 다 그 가사의 길이 때문에 실래빅 양식의 콘둑투스적인 음악이 붙여졌다. 병진행과 이상한 불협화음, 반음계적인 화음, 그리고 돌연한 휴지 등으로 가득찬 그 매웅 엄숙한 음악은 매우 눈에 띄는 유사한 종지들에 위해 분절되는 일련의 음악적인 연(stanzas)으로 구성된 자유로운 유절형식(strophic form)이다. 이 미사음악의 대부분은 가사에 함축된 감정적인 암시를 표현하려는 시도없이 고결하고 인간외적인 상태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Credo에는 두드러진 예외가 하나있다. 즉 "ex Maria Virgine(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라는 가사에서 갑작스럽게 느려져 길게 끄는 화음으로 진행된다. 이리하여 이 악구는 아주 두드러지게 된다.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해 씌여진 미사곡에는 "Et incarnatus est(육신을 취하사)"에서부터 "et homo factus est(사람이 되시었다)"까지 Credo의 이 부분 전체를 같은 방법을 써서 두드러지게 하는것이 통례가 되었다. 사도신경의 이러한 중심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더욱 느린 리듬과 더욱 인상적인 양식을 사용하였다. 마쇼의 미사곡이 어떻게 연주되었는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성부는 악기에 의해 중복되었을 것이다. 그것의 일반적인 선율 양식과 필사본들 중에 가사가 없는 것이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콘트라 성부는 노래되었다기보다 악기로 연주되었던것 같다. 적어도 아이소리듬적인 악장에서는 테너성부 역시 악기에 의해 연주되었거나 되풀이되었을 수도 있다. Gloria와 Credo에는 한상 테너와 콘트라테너를 위한 짧은 간주부가 많이 있다. 이것은 악기로 이것은 악기로 연주되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악기가 어느 정도 사용되었는가는 알수 없다. 또 1364년에 프랑스왕 샤를 5세의 대관식을 위한것이었다는 근거없이 계속이어져 내려온 전설이 있긴하지만 우리는 어떤 계기로 이 곡이 씌어졌는 지 모른다. 어떻든간에 이 미사곡은 보기 드문 장엄함과 장대함을 지닌 곡임에는 틀림없다. 마쇼는 그의 종교음악 작품이 전체 작품수에 비해 작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14세기의 작곡가이다. 이 시기의 종교음악의 창작 경향이 비교적 쇠퇴한것은 부분적으로 교회권위의 악화와 모든 예술의 창작적인 세속화에 그 원인이 있다. 더우기 예배에서 음악이 복잡한 악곡을 사용하는것에 대해 교화 자체가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북잡한 음악과 가수들에 의한 기교의 과시에 대해 교회가 반대 의견을 표명한 일은 12세기 이래 여러번 있어왔다.그 두 가지 이유는 이러한 관습이 회중들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미사를 단순한 음악회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전례문이 불명료해지고 전례적인 선율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적인 태도는 이탈리아에서 다성 교회음악의 작곡 활동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미사통상문의 'alternatim' 연주 관습과 관련하여 다성음악이 나타났다. 즉, 성가대가 단선성가의 한 악구를 노래하면 오르간 주자가 성가의 음 위에 화려한 대위법 선율을 추가시켜가면서 다음 악구를 연주했을 것이다. 더우기 경우에 따라서 성가대는 기보된 성가의 음표위에서 디스칸투스 형식으로 간단한 다성음악을 즉흥적으로 불렀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1324년 아비뇽에서 발표된 교황 요한 22세의 교령을 묻자 그대로 따랐다. 이것은 "축일이나 장엄미사, 또는 성무일과에서 성가 그 자체의 고결함을 방해하지않는 방법으로 선율을 풍요하게 하며 단순한 교회 성가 위에서 불려질 수 있는(8도, 5도, 그리고 4도같은)몇 가지 협화음"은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주로 프랑스에서 모테트와 미사의 부분들에 대한 작곡이 발전을 계속했다. 미사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기악의 테너를 곁들인 모테트 양식으로 작곡될때도 있었다. 이 모든 성부에 가사가 있는 합창적인 콘둑투스적 악장으로서 작곡되기도 했다. 마쇼에 의해 사용된바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양식 외에 14세기 후기와 15세기 초기의 작곡가들은 칸틸레나양식--즉 독창 성부에 기악의 두 반주 성부를 두는 양식--으로 미사곡과 찬미가를 썼다. 몇몇 미사곡과 찬미가에서 전례용의 정선율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레고리오 성가의 키리에가 모테트양식으로 된 다성 키리에의 테너로서 개작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다소 장식적인 찬미가가 같은 가사를 발라드식으로 작곡한 것의 상성부로 나터낼 수도 있었다.
■ 14세기(Trecento) 이탈리아 음악 ■
14세기(Trecento)의 이탈리아음악은 동시대의 프랑스 음악과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경향과 정치적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국의 국력이 점차 증대되고 안정되어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탈이아는 도시국가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치권력을 얻으려는 혼란이 그치지않았다. 다성음악은 엘리트 계층에서 성행하였다. 이 때의 다성음악은 기보법과 대위법을 훈련받은 교회와 연관된 음악가가 제공하는 세속적이고 정교한 오락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음악들은 기보되지 않았다. 궁중에서는 13세기 이탈리아트로바토레들(trovatori)이 트루바두르(troubadours)의 뒤를 이어 나타났다. 중세 전체를 볼 때 종종 악기와 무용이 곁들여지는 민속음악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것은 하나도 없다. 이미 언급한바 있는 행렬 노래인 단성라우다(laude)만이 필사본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 교회음악 중 다성음악은 주로 즉흥연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 음악의 주요 중심지는 반도 중부와 북부 특히 볼로냐.파두아. 모데나.밀라노.페루지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14세기부터 16세기를 통해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였던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보카치오의「데카메론」과 조반니 다 프라토(Giovanni da Prato)의「알베르티 가의 낙원-Paradiso degli Albert」과 같은 유명한 문학작품의 출산지이다. 우리는 위의 두 작품과 그 당시의 다른 작품에서 성악적이든 기악적이든간에 이탈리아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활동상과 음악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배울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데카메론」에서 각 모임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와 노래 무용을 뒤섞어 놓은것 같은 경우이다.
■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acio)의「데카메론」중에서 ■
테이블이 말끔히 치워지자 여왕은 악기를 내오게했다. 모든 부인들이 우너무를 출줄알고 있었으며 청년들도 그러했고 그들 중 몇명은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고 노래도 잘 불렀기 때문이다. 여왕의 명으로 디오네오는 류트를 피암메타는 비올을 들고 무용곡을 부드럽게 켜기 시작했다. 거기에 맞추어 여왕과 다른 부인들은 두 청년과 함께 원형을 이루어 느린 발걸음으로 브롤(brawl : 영국의 시골 원무)을 추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식사를 하도록 보내졌다. 이것이 끝나자 그들은 그들은 여왕이 이제 낮잠을 잘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이런식으로 오랫동안 계속했다.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acio「데카메론」첫째날 도입부 C. Palisca 역.
보카치오가 언급하고있는 음악이 다성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다성음악은 아마 기억을 통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든가
연주되었을 것이다. 1330년경 이전에 씌여진 이탈리아 다성음악의 실제 예로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후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부에서 씌여진 몇 가지의 14세기 사본으로 증명되었듯이 더 먾은 작품이 남아있다. 그 가장 풍부한 원천은--비록 불행하게도 후기의 것이며 또
아주 정확한것도 아니지만--장려한 '스콰르치알루피 사본(Squarcialup Codexi)'이다. 이것은 전 소유자였던 피렌체의 오르간 주자
안토니오 '스콰르치 알루피 (Antonio Squarcialupi 1416-80)' 의 이름을 딴 것이다. 142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본은 지금은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밝은 색으로 잘 꾸며진 송아지 피지(vellum)에 기록된 이 사본은 14세기와
15세기 초기의 12명의 작곡가들의 축소판 초상화가 그들의 작품이 시작되는
마드리갈 : 스콰치알루피 사본과 그 이전의 사본에는 이탈리아의 세속적 악곡의 세 유행이 보존되어있다. 즉 마드리갈(madrigal), 카치아(caccia), 발라타(ballata)가 그것이다. 대개 2성부로 작곡된 마드리갈은 2-3연의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며 연가적, 혹은 풍자적인 가사로 구성된 3행시였다. 각 절은 모두 같은 음악으로 되어있다. 각 시절의 끝에는 리토르넬로(ritornello)라고 하는 2개의 시행이 부기되었고 여기에는 다른 박자로 되어있는 다른 음악이 붙여졌다. 마드리갈을 초기 콘둑투스와 비슷하게 만드는 특징이라면 시행의 끝이나 때로는 처음에 오는 장식적이고 멜리스마적인 악구를 들 수 있을것이다.
카치아 : 카치아는 프랑스의 샤스(chace)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생생한 그림처럼 묘사적인 가사에 대중적 경향의 선율을 지닌
것으로 엄격한 카논으로 불려진다. 주로 1345년부터 1370년까지 성행한것으로 보이는 이탈리아의 카치아는 동음상의 카논으로 된 두 개의 성부로
씌여졌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의 예와는 달리 아래에 보다 느린 진행으로 움직이며 받쳐주는 자유로운 악기파트도 보통 가지고 있었다. 시의
형식은 불규칙적이지만 많은 카치아들은 마드리갈과 마찬가지로 리토르넬로가 있었는데 이것들이 반드시 카논양식으로 되는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어
샤스(chace)와 이탈리아어 카치아(caccia)는 똑같은 뜻(사냥하다 또는 몰다)을 가진다. 작곡유형의 이름으로서 이 이름들은 카논을
의미하기도 한다(라틴어의 fuga,도망치다),또 카치아의 경우에는 가사의 주제를 가라키기도 한다. 가사는 전형적으로 수렵이나 낚시회 소란한 시장
꽃을 따는 소녀들의 모임, 화제, 전쟁 등과 같은 생기있는 장면들을 묘사하였다. 생동감있는 사실적인 세부묘사 --외침, 새의 노래, 뿔나팔의
신호소리, 절규, 대화--는 모두 종종 호케투스와 메아리 효과의 도움을 받기도하면서 음악에 있어서의 활기와 유머로 표현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실적인 방법이 프랑스의 비를레에도 체택된 것처럼 이탈리아의 마드리갈과 발라타에 사용된 적도 있었다.
발라타 : 14세기 이탈리아 세속음악의 세번째 유형인 다성 발라타는 마드리갈과 카치아보다 늦게 성행하였으며 프랑스의 발라드 양식에서 다소 영향을 받았다. 원래 발라타라는 단어는 무용(이탈리아어로 ballare는 '춤추다'라는 뜻이다)을 반주하는 노래를 의미하였다. 13세기의 발라타(그 음악적인 예는 남아있지 않다)는 합창 반복구가 붙은 단성 춤 노래였다. 보카치오의「데카메론」에서는 '발라타'나 '발라테타(ballatetta)'가 여전히 무용과 결부되어 있지만 이 형식은 종교적인 라우다에서도 발견된다. 지금까지 보존된 14세기 초의 단성 발라타가 몇 곡 있지만 필사본에 있는 대부분의 예는 2성부나 3성부로 되어있으며 1365년 이후의 것이다. 이런 순수하게 서정적이며 양식화 된 다성 발라타는 형식면에서 프랑스의 비를레를 닮았다.
■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 ■
프란체스코 란디니 : 발라타작곡가 중 선도적인 인물은 14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음악가 프란체스코 란디니(1325-1397)였다. 천연두로 어려서 맹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란디니는 교양있고 마쇼와 드 비트리같이 존경받는 시인이 되었으며 음악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대가가 되었다. 많은 악기에 정통했던 그는 특히 휴대할 수 있는 소형 오르간의 오르가네토(organetto)의 연주기술로 유명했다. 그는 두 눈이 잘 보이는 것처럼 쉽게 또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오르간 주자들과 비교할 때 의심할 여지없이 월등히 빠른 속도(그러나 항상 박자는 지키면서)의 터치와 능숙함 그리고 아름다움" 으로 오르가네토를 연주했다. 란디니는 조반니 다 프리토의「알베르티가의 낙원」에 나오는 주요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책은 1425년 이후에 씌여졌지만 1389년부터의 사건과 회화를 기록하는 취지를 가지고있다.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짧은 이야기(novelle)--보카치오의「데카메론」과 초서의「캔터베리 이야기」와 비슷한 구성으로 짜여진 이야기--들 가운데는 란디니 자신과 관련되 이야기가 하나 들어있다.
■ 조반니 다 프라토「알베르티가의 낙원」중에서 대략 1325 ■
이제 태양은 더 높이 오르고 한낮의 열기는 더 해갔다. 모든 사람들은 기분좋은 그늘에 머물러 있었다. 푸르른 나뭇가지에서 수 많은 새들이 우짖고 있을 때 누군가가 프란체스코 란디니에게 오르간 소리가 새들로 하여금 그들의 노래를 더 부르게 하는지 덜 부르게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오르간을 조금 연주해줄 것을 청했다. 그가 그 청에 응하자마자 매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소리나기 시작하자 많은 새들이 조용해지는 것처럼 보였고 놀라기라도 한듯 주위로 모여들어서 오랫동안 귀를 기울여 듣는것이었다. 그후 새들은 상상할 수 없는 즐거움을 나타내면서 그들의 노래를 다시 시작하여 먼저보다 배로 노래했다. 오르간쪽으로 날아와 프란체스코 머리 위의 나무에 앉은 한마리의 나이팅게일은 특히 더했다.
Il Paradiso degli Alberti, A Wesselofsky 편집(Bologna, 1867) pp.111-13
란디니는 종교적인 가사에는 음악을 쓰지 않았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2성부 발라타 90곡과 3성부 발라타 42곡 그리고 2성과
3성의 두 가지가 모두 남아있는 몇 곡들이 있다. 그외도 한곡의 카치아와 열 곡의 마드리갈이 있다. 2성부 발라타는 분명 초기의 작품이다. 그
곡들의 양식은 선율선이 더 화려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마드리갈의 양식과 비슷하다. 3성부 발라타는 프랑스의 발라드처럼 두 개의
반주파트를 수반한 독창으로 된
■ 란디니 - 발라타 ; Non avra ma'pieta ■
이 발라타는 프란체스코 란디니가 사용했던 전형적인 양식이다. 3행의 반복구(represa)가 7행으로 된 한 연(stanza)의 처음과 끝에서 불려진다. 연의 처음 두 쌍의 시행(piedi라 불렀다)은 독자적인 음악적 악구를 가지고 있고 뒤에 세 쌍의 시행(volta)은 반복구와 동일한 음악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디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란디니 - 발라타 ; Non avra ma'pieta ■
그녀는 결코 동정하지 않는다. 이 나의 아가씨는 아마 그녀의 의지가 [이 불꽃을]
꺼버릴수.. editions de l'Oiseau-Lyre.1958)
연주 : 이 곡이나 14세기 어떤 음악도 그것을 연주하는 일정하고 고정된 방법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 성부에 가사가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기악성부로 간주하게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다른 성부에서는 가사가 붙여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사가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오로지 성악 성부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란디니의 발라타와 마쇼의 발라드의 테노르 성부가 긴 음표를 가지며 넓은 도약을 자주하고 리가투라(여기에서는 단지 한 음절만 불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가사의 음절적 연주를 배제하는 리가투라)를 많이 사용하여 기보되어있다는 점으로 보아 주로 기악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것이다. 콘트라테너의 성부들은 화성적인 음향을 완성시키려는 목적으로, 분명히 수페리우스(superius:최상성부)와 테너 작곡 이후에 씌여졌다. 또 콘트라테너도 종종 기악 연주되었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콘트라테너들은 또한 성악에도 적합하며 가사가 붙어있는것도 많다. 수페리우스는 항상 성악적이며 종종 매우 화려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성부 역시 악기로 연주할 수 있었다. 우리는 노래불려지는 선율이 기악으로 중복될 수 있는 가능성과(아마도 장식음들을 추가해서) 또한 악기와 목소리가 교대로 연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마그리갈의 시작과 끝에 있는 화려한 멜리스마는 악기로 연주했을 것이며 나머지 성부는 육성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다 한 사람의 연주자가 연주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율선에 장식음을 붙여서 완전히 악기로 성악곡을 연주하기도 했다는 증거가 있다. 악기로 장식음을 붙이는 이러한 연주는 주로 즉흥적 연주법의 하나였으나 때로는 이런 작품을 쓸 때도 있었다. 그러므로 1325년경에 씌여진 로버츠브리지 사본(Robertbridge Codex)에는 세 곡의 모테트를 오르간에 맞게 편곡한 것이 실려있으며 15세기초에 씌여진 파엔자 사본(Faenza Codex)에는 미사의 여러 부분에 맞게 작곡된 평성가에 기초를 둔 건반악기곡 외에 마쇼의 발라드와 란디니를 포함하여 14세기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쓴 마드리갈과 발라타를 건반악기용의 장식적인 곡으로 만든것들이 수록되어 있다.
● A n d y W a r h o l - T h e F l o w e r 1971 ●
■ 14세기 후기의 프랑스 음악 ■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이 종교음악보다 세속음악의 더 중요한 중심지였다는 것은 당시의 전형적인 역설이다. 교황청과 남프랑스의 다른 여러 궁중에는 화려한 기사사회가 번창하여 14세기 후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이 작품을 쓰는데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이 쓴 음악은 주로 기악의 테너와 콘트라테너가 반주하는 독창성부를 위한 발라드와 비를레, 론도였다. 가사의 대부분은 작곡가들 자신이 직접 썼을것이다. 발라드에는 그 당시의 사건과 인물에 관련된 것들이 더러있었으나 대부분이 사라의 노래이며 예민한 선율과 섬세한 음색을 가지는 화성을 가진 세련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믾다. 이들은 가장 좋은 의미에서의 귀족예술의 실례들이었다.음악양식은 필사본들의 몇몇 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외관과 조화를 이루고있다. 즉 빨갛고 까만 음표가 뒤섞여있고 교묘하고 복잡한 기보법을 쓰며 경우에 따라 하트 모양으로 사랑의 노래를 쓴다든가(아래그림), 원 모양으로 카논을 쓴다든가 하는식의 기발한 장식들이 그것이다.
Baude Cordier의 론도 'Belle bonne sage'1400년이후 첸틸리 필사본(Musww Conde MS 564)의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가사가 붙은 cantus 성부는 가사없는 테너와 카운터테너로 반주되어진다. 기보법의 모양은 작곡자 이름의 동음이어적 말장난이다(라틴어로 cor는 심장을 의미함)
안토넬로 다카세르타의 론도 "Dame gentil' 모데나 필사본(Bibl. Estense,MS L.568) ca.1410. 첫째줄 끝부분에 있는 #는 C음이 아니라 B음과 관계가 있다.
리듬 : 이 시대의 프랑스 세속음악의 한 가지 특징은 리듬리 두드러지게 유연하다는 것이다. 특히 독창 선율은 가장 미묘한 뉘앙스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박이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세분되고 악구의 악구의 선은 호케투스의 휴지로 분산되거나 길게 계속되는 싱코페이션으로 인하여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마치 작곡가들이 가수의 자유롭고 루바토같은 연주를 기보법 안에 가두어 고정시키려고 노력하는것 같았다. 리듬의 복잡성은 이러한 14세기 후기 모든 프랑스 음악의 구조에 침투하고 있다. 즉 모든 성부는 대조적인 박자로 또는 박 내의 대조적인 음군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화음은 계류음과 싱코페이션으로 인하여 굴절되고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된다. 때로는 기교적인 매혹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가기도한다. 예4.4(제일 아래에 있는 두 개의 보표는 각 성부를 압축한 것일뿐 반주부는 아니다)는 프랑스적 기법에서 프랑스인들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는 14세기 후기의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넬로 다 카세르타(Anthonello da Caserta)기 쓴 론도에서 발췌한 대표적인 악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싱코페이션은 지연된 독창 도입의 효과를 준다. 이 악구에서의 리듬적인 정교함은 20세기 이전의 어떠한 음악과도 비견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모든것은 논리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다. 주목할 만한 것은 둘째 마디에서 6도의 매혹적인 효과와 독창부의 첫번째 쉼표 뒤에 있는 Bb과 B사이의 애교스러운 망설임 , 그리고 콘트라테너가 때로는 테너의 위에서 때로는 아래에서 소리나는 방법이다. 이때 화성의 참된 베이스는 처음에는 이 두 성부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다른것이 되었다 하고 때로는 한 성부가 중단됨으로써 다른 성부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두 저음부에 대조되는 음색의 악기를 사용했을 때 생겨나는 다양한 음향을 상상할 수 있다.
■ 안토넬로 다 카세르타 - 론도'Dame gentil'의 일부분 ■
예4.4에 인용된 악구는 대부분 멜리스마이기 때문에 가사는 생략되었다. 음표아래나 위에 붙은 임시표는 원본에는 없다.이른바 부분적인 조표 (partialsignatures)--성부마다 다른 조표--는 14세기와 15세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 솔라주 론도 ; Fumeux fume ■
이런 매너리즘 양식의 또 다른 면은 작고가 솔라주의 화성적 리듬적 실험으로 대변되는데 그는 베리 공작 장(Jeng)을 섬겼으며, "퓌메르(fumeurs--흡연자들)'라 불리는 문학집단에 소속됐었다. 그가 이 론도에서 그들에 관해 쓴 것은 아마 풍자적인 기질에서였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가운데 성부에서의 지속적인 싱코페이션, 동형진행, 대담한 임시표의 사용, 화성적으로는 길게 끄는 3온음 등이다. 예 4.5는 전형적인 악구를 보여준다.
Willi Apel,「French Secular Compositions of
the Fourteenth century」
남부 프랑스의 궁중에서 사용한 고도로 세련된 음악은 매우 교양있는 청중들과 전문적인 기교를 지닌 연주가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리듬과 기보법의 놀랄만한 복잡성은 14세기 말기까지에는 유행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 편 14세기 후반 무렵 북부 프랑스에서는 더 단순한 다성 세속음악 유형이 유행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트루베르 전통의 계승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음악가들의 길드(guild)에 의해 계발되었다. 그들의 시는 대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었다. 그들은 궁정풍 사랑의 세련된 감정이 아닌 사냥할 때와 시장에서의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때로 새들의 노래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이 음악은 민요처럼 활기넘치며 가식없이 자유로운 리듬과 이에 대응하는 활발함과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더욱 단순한 예술은 14세기 필사본에 보존되어있는 몇몇 실례가 시사하는것 보다 더 널리 유행하였을 것이다.
■ 무지카 픽타(Musica Ficta) ■
프랑스 이탈리아의 14세기 음악에는 기보되었거나 연주 때 집어넣은 반음계적으로 변화한 음표들을 사용함으로써 특별한 풍미가 추가된 것이 많이 있다. 이러한 변화음은 선법의 단6도가 옥타브로 종지할 때 장6도로 만드는 종지에서 자주 나타났다. D은 뒤에서의 종지가 예4.6 a와 b에 나타나있다. 작곡가. 가수. 이론가들은 동음으로 진행하는 3도는 단3도를 그리고 옥타브로 진행하는 6도는 장6도를 선호하였다. 일반적으로 예4.6b에서 볼 수 있는 음형의 마침꼴에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3화음 위의 두 음이 모두 올려져서 우리가 이중 이끔음이라고 불렀던것을 만든다.(예4.6c) G음과 C음위에 있는 종지는 D음위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변화한다. 그러나 E음 위에 있는 종지들은 특별한 경우였다. 끝에서 두 번째 화음의 바깥쪽 음정이 이미 장6도로 어떤 반음계적 변화도 요구하지않기 때문이다.(예4.6d참조)
이러한 반음계적인 변화는 화음의 제일 낮은음 위에서 감5도나 증4도가 소리나느것을 피하기 위해서 항상 사용되었으며 , 선율에서 F.B의 3온음(tritone)음정을 피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선율선을 매끄럽게 하기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때때로 소리가 더 쫗다는 이유만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causapluchritudinis'--문자 그대로 아름다움을 위하여--사용된 것이다.만일 작곡가들이나 사보가들이 샤프나 플랫 그리고 내추럴을 필사본에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14세기 음악의 반음계적 변화가 현대의 연주가들에게 별 어려움을 주지는 않앗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기록했을 때라 하더라도 일관성이 없었다. 즉 동일한 악구의 필사본 마다 서로 다른 임시표가 기록되어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임시표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단지 부주의 탓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음악이 기보되었던 이론적 토대와 일치한다. 세 가지 헥사코드의 체계--각 진동근, 그리고 자연스러운--는 미-파로 발음되는 B와C, E와F 그리고 A와 Bb음 사이의 반음을 허용하였다. 이것은 무지카베라(Musica vera,진정한 음악)혹은 무지카 렉타(musica recta,올바른 음악)의 영역이었다. 이것은 귀도의 손 안에 있는 음 영역이었다. 이 영역 바깥에 나오는 음은 '손'바깥의' '거짓된(falsa)'혹은 '가공된(ficta)' 것들로 간주되었다. 작곡가와 필사자들은 인정된 '진정한' 체계에 있지 않은 음고들을 기입하는 것을 꺼렸다. 반면, 가수들은 매끄러운 선율이나 음정 진행을 만들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음들이 있는 상황을 인지해내도록 훈련받았다.(프로스도치모 데 벨데만디의 논의 참조) 얼마후 전문적인 음악가라면 찾아낼수있는 플렛이나 샤프를 일일이 표기하는 것은 가수에게 모욕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실상 이런 판단의 기준은 전문적인 비밀이 되었다.
■ 프리스도치모 데 벨데먼디「Contrapunctus」1412 ■ ((B o o k 5, Chapter1 - 6))
1.무지카 픽타란 그럴것같지 않은 위치에 음절이 있는것처럼 하거나 배치하는것을 말한다. 즉 미가 없는 곳에 미를적용하거나 파가 없는 곳에
파를 적용하는 등이다. 무지카 픽타에 관한 한 무엇보다도 필요한 곳에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에서 필요하지
않은것은 절대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스도치모 저, 잰 허링거 번역의「Contrapunctcus」ⓒ1984 by the University of Nabraska Press
14세기와 15세기 초기의 사본들 , 특히 이탈리아의 사본들은 임시표가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으나 1450년부터 1550년 사이에는 선법의 이조 외의 임시표 사용은 비웃음을 당했다. 이것이 음향의 실제적 변화--온음계적 선법의 순수성으로 복귀하는 것--를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보법의 문제--이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로서 연주가들은 종전과 같이 반음계적 변화를 계속해서 적용시켰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불확실한 요소들 때문에 오늘날의 주의깊은 편집자는 이러한 음악의 원전에 있지 않은 임시표는 악보 자체에 섭입하지 않고 당시의 연주가들이 적용했다고 믿어지는 것들을 보표의 위나 아래에 제시해 놓을것이다.
■ 기보법 ■
14세기 기보법은 상세히 서술하는 것은 본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는 긴 음을 2분할 또는 3분할하는 새로운 양자택일적 분할법의
기보와 전에 없던 다양한 짧은 음가의 도입, 그리고 14세기말경의 음악을 특징짓는 리듬적 유연성 안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가들을 이끌어
주던 몇 가지 주요 원칙들만을 보여주려한다.
● 중세의 기보법 - Mode - Time - 4Prolation ●
이상은 이른바 중세 음악이론의 '4개의 프롤레리션'이다. 반원C는 오늘날의 4/4박자로 되었으며 알라브레브(alla breve)'라는 명칭을 가지는 오늘날의 ¢는 중세후기와 르네상스 프로포션(proportion) 체계의 흔적이다. 이것에 의하여 진행단위(박)는 지시된 비율에 따라 정상적인 음가에서 다른 음가로 바뀔 수 있었다. 이런경우 1:2의 비율에서 박은 보통 세미브레비스에서 브레비스로 변한다. 1425년경 위에 그려진 모든 형태는 '하얀음표' 즉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리고 가운데는 칠하지않은 음표(□ㅣ □ ◇ ◇ㅣ)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미미님은 ♩(◆)가 되고 그보다 짧은 음표들은 세미미님의 꼬리를 붙임에 따라(♪ 2♪ 3♪등) '임의로(ad libitium)' 고안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사용하는 음표모양과 본질적으로 같은것이며 머리가 다이아몬드형에서 둥근형으로 바뀐것은 16세기말경이었다. 위에서 제시된 기호 외에 프랑스식 기보법은 다른 발법들도 사용하였다. 그들은 점을 사용했는데 이탈리아식 악보에서처럼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것은 아니었다. 붉은음표는 정상적인 독보와는 반대 해석으로서의 완전이나 불완전을 나타냈다. 또 이 음표들이 정상 음가의 1/2(혹은 어떤 더 작은 비율)로 불려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그밖의 많은 목적에도 사용되었다. 하얀음표는 이와 비슷한 특별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서로 다른 성부들은 다른 다른 프롤레이션 기호로 기보될 수도 있었으며 이러한 기호들은 한 성부내에서도 자주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 서로 다른 프롤레이션이 모방성부나 성부들이 유도성부와는 다른 비율로 진행했던 카논을 표기하는 기호로도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선율은 오직 한 번만 기보되지만 여기에는 둘 또는 그 이상의 다른 박자표가 씌여졌다. 이러한 '정량카논(mensuration canon)'은 우리가 뒤에 살펴볼 것처럼 15세기와 16세기에는 한층 더 일반화되었다. 14세기 작곡가들은 또한 싱코페이션을 나타내기 위하여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싱코페이션은 당세기말 몇몇 선율선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고있었다.(예4.4참조)
악기 : 14세기와 15세기 기악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상세히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필사본은 실질적으로, 각 악기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기는 커녕 주어진 성부가 기악인지 성악인지조차 제시하고있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이다. 작곡가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방법에 있어서 관습이나 전통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있었으며 여기에 특별한 지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못했다. 우리는 회화나 문학적 자료로부터 14세기와 15세기 초기의 가장 보편적인 다성음악 연주방법은 대개 한 성부에 단 하나의 성악이나 기악을 가지는 작은 앙상블이었다는 것을 알고있다. 칸틸레나 양식의 작품에서는 음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악기와 독창성부가 동시에 연주되면서 헤테로포니(heterophony)를 이루었으리라는 증거도 어느정도 남아있다. 아이소리듬 모테트의 라틴어 테너와 란디니의 3성부 발라타로 된 가사없는 테너와 같은 어떤 성부들은 성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악이었다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몇가지 추정 외에 어떠한 일정 불변의 규칙도 발견할 수 없다. 연주는 환경과 그자리에 있던 가수 또는 연주자들, 또는 연주자들의 취향이나 변덕에 따라 변화하였다. 야외음악 무용 그리고 특히 축일이나 장엄한 예식에는 보다 큰 앙상블과 보다 큰 소리가 나는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높은(haut)악기'와 '낮은(bas)악기'를 구분하는 14세기적인 관점은 음의 높이가 아니라 소리의 크기에 있었다. 14세기에 가장 많이 낮은 악기로 사용된 것은 하프.비엘.류트.프살테리움(psalterium).포터티브 오르간.플루트와 레코더였다. 높은 악기에는 숌(shawm).코넷.슬라이드.트럼펫과 색벗(sacbut, 역주:중세에 쓰인 트롬본의 옛이름)이 있었다. 팀파니(kettledrums), 작은 벨과 심벌즈를 포함하는 타악기들은 모든 종류의 앙상블에 널리 사용되었다. 음색으로는 맑고 밝으며 날카로운것이 유행하였다. 당시의 미술품으로 미루어보건대 음색이 동일한 계통의 악기(가령, 후대의 비올 콘소트처럼)가 아니라 비올.류트.하프.색벗. 또는 비올.류트.프살테리움.레코더.드럼 등이 대조적 음색의 악기들이 그룹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다성성악이 반주없이 불려진 일은 아마 없었다하더라도 모테트와 몇몇 다른 성악곡들은 때때로 악기만으로 연주되었다. 물론 기악 무용음악에도 많이 있었지만 이 작품들은 대개 즉흥적으로 연주되었거나 기억력에 의존하여 연주되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본존된 예가 많지 않다.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 유형의 건반악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기에 발명되었지만 15세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사용된것 같지 않다. 포터티브 오르간이나오르가네트 외에 '포지티브 오르간(positive drgan)'이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오르간이 교회에 설치되는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14세기말 독일에서는 오르간의 발건반이 붙여졌다. 여러가지 다른 파이프 열을 연주자가 마음껏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스톱기구가 생겨나고 제2건반이 덧붙여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15세기 초기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마치의 행렬 : 많은 음악가들이 이를동반하고있ㄴ다. 이들은 하프, 류트, 또는 숌을 연주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생애에 대한 로망스를 나타낸 축소화(miniature) (Paris, Bibliotheque nationale MS, fr 22547.fl.245v)
■ 요 약 ■
14세기에는 음악적 자원이 더욱 다양해졌다. 이것은 특히 종교음악에서 세속음악으로의 현저한 전환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리듬의 다양함과 자유였다. 이것은 몇몇 후기 작곡가들에서는 거의 연주불능의 극단에까지 이른다. 14세기 동안 화성적 구조에 대한 감가가이 자라나고 있엇던 것은 확실히 조성적인 테두리 안에서 대위법을 구성하였던 것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불완전한' 협화음 즉 3도와 그보다는 덜 하지만 6도가 약박에 뿐만아니라 강박에 자주 쓰이기 시작한다. 물론 끝맺는 음향은 여전히 항상 1도 8도 혹은 공허한 5도였다. 병행3도나 6도의 악구가 나타나고 반면, 병행5도와 8도는 드물어진다. 무지카 픽타는 종지점을 더욱 강조했으며 선율선은 더욱 유연해졌다. 각 성부의 음역은 서서히 위로 확대된다. 13세기 모테트의 추상적인 겹쳐진 양식은 작곡가들이 칸틸레나 구조의 선율적.화성저. 어법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감각적인 매력을 촉구하려는 경향이 늘어감에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작곡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모테트가 계속 사용되었는데 그 기능에 있어서 더 이상 전례적이 아니라 더욱 정치적이며 예식적으로 되어갔으며 구조적으로 한층 더 복잡해졌다. 또 악곡의 새로운 장르들이 나타났다. 카치아와 아마도 마드리갈같이 어떤 것들은 대중적인 음악 관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것 같다. 발라타나 반복구를 지닌 다른 노래들과 같이 13세기로부터 물려받은 것들도 더 멀리는 민요적인 모델들로 되돌아갈 수 있다. 앞서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고도로 세련된 유형의 '정형시 형식(formes fixes)'은 음악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장르다. 즉 비를레와 발라드, 그리고 당세기 말에 사랑을 받으며 성행하다가 보다 복잡한 형식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던 론도가 그렇다. 1400년까지는 전에는 분명히 구분되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양식이 합쳐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최초의 국제적인 양식은 15세기의 다른 원천 , 즉 영국과 네덜란드 지역으로부터의 영향으로인해 다양하게 되었다.
■ 문헌자료 - 서양음악사 제공(Grout & Palisca 공저) ■
● Courtesy : Peter's P h o t o Odyssey ●
| ||
| ||
'서양음악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음악문화(1) (0) | 2015.07.10 |
---|---|
오케겜에서 조스갱까지 (0) | 2015.07.10 |
다성음악의 시작과 13세기 음악 (0) | 2015.07.10 |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0) | 2015.07.10 |
포스트 20세기적 현상 (0) | 2015.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