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고대음악문화사(2)

미뉴엣♡ 2015. 7. 10. 19:56
♡ 고대 음악문화사(II) ♡    2010/01/0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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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z Belingar - l e R o u g e ●

 

 

                                 ●★ 고대 말기의 음악양상 ★●

 

 

                                       ■ 고대 로마의 음악 ■

 

고대 로마의 음악 : 우리는 로마인이 음악 이론이나 실제 음악에 얼마나 중요한 공헌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예술 음악을 그리스에서 물려받았다. 특히 기원전 146년 그리스기 로마의 영토로 된 후 더욱 그러하였는데 수입된 이 문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에트루리아(역주:이탈리아 서부에 있던 옛나라) 이탈리아의 고유 음악을 대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식의 아울로스인 티비아와 이 악기 주자인 티비시네스는 종교의식, 군악, 그리고 극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몇 가지 금관 악기가 두드러졌다.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길고 곧은 트럼펫인 '투바(tuba)'도 역시 종교, 국가, 군사적인 행사에 사용되었다. 가장 독특한 악기들로서는 큰 G자형의 원형 호른인 '코르누(cornu)'와 그보다 작은 동류인 '부치나(buccina)'가 있다. 음악이 거의 모든 공공행사에 쓰여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개인적인 즐거움과 교육에도 음악의 역할이 있었다. 키케로(Cocero)나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 또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는 교양있는 그리스어로 쓰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듯이 음악이나 적어도 음악 용어에 정통하는 것이 교양있는 사람이 받아야할 교육의 일부라고 생각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부분이 많이 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그리스도 기원 처음 2세기)동안에 예술, 건축, 음악, 철학, 새로운 종교의식 그리고 다른 많은 문화적인 산물들이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로마로 들어왔다. 유명한 연주자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대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유행했으며 웅대한 음악제와 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음악을 보호하였으며 네로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으려고까지 하였다. 3세기와 4세기에 걸친 제국이 경제적으로 쇠퇴해지자 이전처럼 거창하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음악활동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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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미테르에서 나온 석관의 장의행렬 부조(기원전 1세기말) ●

 

                                      아미테르에서 나온 석관의 장의행열 부조 : 기우너전 1세기말 맨

                                      윗줄의 2인의 코트루 연주자와 1인의 리투스 연주자가 있다. 이

                                      두 악기는 에트루리아 로마의 관악기이다. 아래 줄에는 그리스의

                                      아울로스와 비슷한 티비아연주자 4인이있다.(Aqulia Museo Civico)

 


요약하면 세부적인 면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것이 많지만 고대 세계가 음악에 관한 몇 가지 기본 개념을 중세에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음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자유로운 선율로 이루어졌다는 개념, (2) 특히 리듬과 박자에 있어서 선율과 가사와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한 생각, (3) 본질적으로 즉흥연주 -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약속과 어떠한 전통적인 음악형식을 이용하는 범위내에서일지라도 고정된 악보없이 연주자가 매번 새로 창조하는 음악-에 기초한 연주 전통, (4) 음악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정신적 사회적 공백(vacuum) 안에서의 '아름다운 소리의 유희'로서가 아니라, 자연계의 체계와 일맥상통하는 질서정연한 체계로서 또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줄수있는 힘으로서의 예술로 간주하는 음악철학, (5) 과학적인 기초 위의 확립된 음향학적 이론, (6) 테트라코드에 기초를 둔 음계 형성체계, (7) 음악용어 , 이러한 유산의 일부(5,6,7)는 특히 그리스적이었고 그 밖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고대세계에 공통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관한 지식과 사상들은 성전제사와 관련된 악기와 무용은 들어오지 않았을지라도 초기의 종교 의식과 음악을 대부분 유대교에서 취해온 그리스도교 교회와 교부(敎父)들의 저작물들 그리고 다른 여러 주제들과 함께 음악을 다룬 초기 중세의 학술 논문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나마 서양으로 전해졌다.

 

 

                                     ■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
 
그리스도교 교회가 대두하기 시작한 처음 2-3세기 동안, 그리스 또는 지중해 동부에 이웃한 오리엔트와 핼레니즘(Oriental-Hellenistic)이 혼합된 사회의 음악이 그리스도교 교회에 어느정도 수용되어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고대 음악생활의 몇 가지 면모들은 분명하게 배척을 당했다. 한 예로 순전히 즐거움만을 위한 예술로서의 음악을 장려하는 사상을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연회에 더 어울리는 음악이나 축제 혹은 경기, 연극등 대규모 공공행사와 관련된 형태와 종류의 음악은 교회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음악 자체에 대한 반감에서라기 보다는 늘어가는 개종자들을 이교도로서의 과거와 결부된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태도에 모든 기악에 대한 불신감마저 내포되어 있었다.

 

유대의 유산 : 오랫동안 음악역사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의 시나고그 예식에 근거하여 예배 의식을 만들었다고 믿어왔다. 이제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것을 뒷받침 할 만한 문서상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실제로 그들의 신앙과 의식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유대 예배의식을 모방하는 것을 기피했던 것 같다. 성전(Temple)과 시나고그(synagogue)의 종교적 기능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전 - 예루살렘의 두번째 선전으로서 기원전 539년에 지어졌던 솔로몬의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해 기원후 70년 파괴된 이후 그자리에 세워진 - 은 공공예배가 행해지는 장소였다. 이 에배는 주로 어린양의 희생제로 구성되었으며 사제가 집전하고 레위인들이 그를도왔는데 레위인들 중에는 음악가들도 있었으며 평신도 유대인들은 그 예배를 지켜보았다. 종종 사제가 때로는 평싱도들도 이 불에 태운 동물을 먹기도 하였다. 이러한 희생제는 매일 아침과 오후에 거행되었으며 안식일이나 축일에는 추가로 공공의 희생자가 있었다. 이러한 희생제 중간에 레위인들의 성가대 - 적어도 12명으로 이루어진 - 는 시편을 불렀는데 주일의 각 요일에 적합한 시편을 불렀으며 이것은 현악기로 반주되었다. 중요한 축일, 예를 들면 유월절 저녁의 경우에는 알렐루야 후렴구가 있는 시편 113편에서 118편이 회중들이 사적인 희생제를 드리는 동안 불리워졌으며 아울로스를 닮은 목관악기가 현악 반주에 합류하였다. 개인들도 성전에서 또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가정에서 혹은 실외에서 기도를 드렸다. 성전의 희생제와 기독교의 미사간에는 확실한 유사점이 있다. 미사는 사제가 포도주의 형태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경배자들이 빵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취하는 상징적인 희생제이다. 그러나 미사가 최후의 만찬의 기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면 시편창 형태의 음악이 수반되는 유월절 식사와 같은 축제적인 유대교의 식사를 모방하였다. 시나고그는 성찬과 기도보다는 낭독과 설교를 위한 장소였다. 회합이나 예배를 드릴때 여기에서는 성서가 낭독, 토론, 또는 설명되었다. 몇몇 낭독은 안식일 아침과 장날인 월요일과 목요일에 지정되었다. 반면 고유문의 낭독은 순례와 관련된 축제, 작은 규모의 축일, 금식일들, 또는 새달의 날에 이루어졌다. 성전(Temple)의 파괴 이후 시나고그 예배에는 사원의 희생제를 대체할 만한 요소들이 편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1세기 혹은 2세기에나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모델이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매일매일의 시편창은 그리스도시대 이후에나 수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집회소에서 교회력의 특정시기에 맞춘 낭독의 관습과 그에 대한 공적인 설명이라는 관습들에서 시나고그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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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y Warhol - T h e L a s t e r S u p p e r ●

 


초기 그리스도교가 소아시아를 거쳐 서쪽의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음악적인 요소는 여러 곳으로부터 조금씩 축적되었다. 시리아의 수도원과 교회들은 '시편창법'의 발전과 찬미가의 사용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음악의 이 두가지 형태는 시리아에서 비잔티움을 경유하여 밀라노와 다른 서방 중심지로 퍼져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찬미가를 노래하는것은 그리스도교회의 음악활동으로 기록되어있는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마태복음 26:30, 마가복음 14:26) 소(少)플리니우스(Plinius, 역주:로마의 웅변가로 62-113년경)는 112년경 소아시아의 비티니아(Bithinia)고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마치 신인것처럼(to Christ as if to a God)'노래를 부르는 관습을 갖고있었다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노래는 그들 서로가 서약을 통하여 하나로 묶은 행위와도 연관되어 있다.

 

 

                          ■ 비잔티움 - 콘스탄티노플 - 이스탄불 ■

 

비잔티움 : 동방의 교회들은 강력한 중심적인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각 지역에 따라 다른 전례들을 발전시켰다. 9세기 이전에 동방 예식에 쓰였던 음악사본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지만 초기 동방 교회음악에 관한 몇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비잔티움(혹은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재건되어 330년 재통일된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395년 로마 제국이 동서로 영구 분열된 후 1453년 터키군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1000년이 넘도록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비잔티움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의 소재지였으며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요소를 혼합한 빛나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비잔티움의 음악적 관습은 여덟 가지 선법으로 음악을 분류하는 점, 그리고 6세기와 9세기 간에 서방이 동방으로부터 빌어온 수많은 성가들에 그 흔적을 남겼다.
중세의 비잔티움 음악으로 가장 뛰어나고 특유한 것은 찬미가였다. 중요한 유형주의 한 가지는 유절형식의 콘타키온(kontakion)이었는데 이것은 성서원문을 시적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콘타키아(역주:콘타키온의 복수)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는 6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했던 개종한 시리아 유대인인 성 로마누스(St.Romanus the Melode)였다. 다른 유형의 찬미가들은 시편의 시행들 사이의 짧은 응창(troparia)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서 빌어온 선율이나 선율 유형등의 음악에 붙여져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삽입 응창 부분들은 점차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그 중 몇몇은 독립된 찬미가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스티케라(stichera)와 카논(kanones)이 그것이다. 스티케라는 성무일과의 평상 시편의 시행들 사이에 삽입되어 불리웠다. 카논은 9개의 성서적 칸티클(canticle) 또는 오드(ode)에 기초한 9부분으로 이루어진 장식이었다. 이 부분들은 각각 오드의 각 부분에 상응하였고 같은 선율로 노래되어지는 몇몇 연(stanza)이나 트로파리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오드의 첫번째 연은 그 고유의 헤이르모스(heirimos) 혹은 모범 연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은 헤르몰로지아(hermologia)라는 책에 수록되어있다. 10세기 경에 이르면 두번째 오드가 보통 생략되어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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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 l u e D a n c e r s - J o y - Unknowned ●

 

 
비잔티움 카논의 가사는 완전히 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문구들을 짜맞춘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율 역시 완전 창작이 아니었다. 이들은 모든 동방 음악의 공통된 원칙인 센토나이제이션(centonization)에 따라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서방의 성가 중 몇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성의 단위는 음계를 이루는 일련의 음들이 아니라 짧은 동기 혹은 음형들이 기본 단위였다. 여기에서 선율의 창작자는 몇개의 동기를 선택하고 이들을 조합하여 선율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동기 중 몇몇은 시작부분에 몇몇은 곡의 중간부분에 그리고 몇몇은 선율의 끝에 쓰여졌으며 또 다른 것들은 그 사이를 연결하는데 쓰였다. 표준적인 장식 음형(멜리스마-melisma) 역시 있었다. 이러한 음형의 선택의 여지가 어느만큼이나 각 가수들에게 있었는지, 혹은 한 '작곡가'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는지는 확실하지않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선유리 점차 기보된 필사본으로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음형의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었다. 선율 음형이나 선법들은 각 음악 문화에 따라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있다. 예를 들면 힌두음악의 라가(raga), 아라비아의 마캄(maqam), 비잔틴 그리스의 에코(echos)등이다 이들은 히브리어로는 모드(mode)로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어로 알려졌다. 라가.마캄.에코.모드등은 사용할수있는 음고들과 선율 동기들의 축적을 일걷는 말이었다. 같은 그룸의 동기들은 다소간 같은 감정을 표현한다거나, 선율과 리듬이 일치한다거나, 또는 같은 음계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가지고있다. 특정 라가나 모드는 노래불려지는 가사의 성격, 특정한 상황, 계절, 그리고 때때로는(힌두음악에서와 같이) 하루중의 시간에 따라 선택되었다. 비잔티움 음악은 여덟 개의 에코이(echoi)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카논을 위한 선율들은 모두 이체계에 따라 분류되었다. 여덟 개의 비잔티움 에코이는 네 쌍으로 그룹지어졌으며 그 네 쌍은 각각 D.E.F.G 음의 종지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8-9세기 경의 서방 성가에서도 역시 여덟 개의 선법이 인식되었으며 서방 선법의 종지음들 역시 에코 종지음과 일치한다. 따라서 서방 선법 체계의 기초는 동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서방의 8선법 체계의 이론적 발전은 보에티우스에 의해 전해진 그리스의 음악이론에 의해 상당히 큰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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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y twombly b.(1928) - Four Seasons:Summer 1994 ●

 

  

서방의 전례 : 동방에서와 같이 서방에서도 처음에는 지방 교회들이 각기 독자성을 띠었다. 물론 일반적인 관습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공유했지만 서방의 각 지역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동방의 유산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초기의 차이점이 지역의 특수한 조건과 맛물려서 5세기와 8세기 사이에 몇몇 다른 전례와 성가의 체계를 만들어내었다. 결국에는 암브로시오 성가 하나를 제외하고 이 모든 지역적 변형이 소멸되거나 로마가 그 권위의 중심이 된 하나의 통일 체계안에서 흡수되었다. 9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론면에서나 실제면에서 서방 교회의 전례는 점차 로마화 되었다. 7세기에서 8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서부유럽은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고트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의 고유한 성가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었다. 대략 현대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는 갈리아식 성가가 있었다. 남부 이탈리아에는 베네벤트식(Beneventan), 로마에는 고대 로마식(Old Roman)성가가, 스페인에는 서고트적 혹은 모사라빅 성가가, 밀라노주변에는 암브로시우스식 성가가 있었다(후에 영국이 자신의 그레고리아 성가의 지역적 방언을 발전시킨 후에는 '세럼-Sarum'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중세 후기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갈리아식의 전례에는 켈트족적이고 비잔티움적인 요소 모두가 혼용되어있었는데 8세기 말경까지 프랑크족 사이에서 쓰인다. 8세기 말에 이르러 피핀과 그의 아들 샤를마뉴가 그 자신들의 영토에서 로마의 성가를 부를것을 요구하게 된 후 이 전례는 억압되었다. 이 전례가 어찌나 철저하게 억압되었던지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반면에 거의 모든 고대 스페인의 가사와 선율들은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 악보로 전사할 수 없는 기보법으로 되어있다. 성가들이 보표선으로 기보되기 이전에 이미 이런 체계들이 전례에 쓰이지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633년 톨레도 공의회가 열린 후 스페인식의 성가는 더 명확한 형태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8세기경 이슬람교인들의 침입 이후 이 전례에는 모사라베식(Mozarabic)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음악에 아라비아가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만한 이유는 없다. 스페인의 전례는 1071년 이전까지 로마 전례로 공식 대치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톨레도.살라망카.바야돌리드 등지의 몇몇 교회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우스식 오퍼토리와 이에 해당하는 스페인의 사크리피시아(sacrificia)간에는 음악적 유사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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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리아 성가 - 성아리외(St. Arieux)의 성가집에서 발췌 ●

 

                                         갈리아성가 갈리아 전례를 포함하는 성 아리외(St. Arieux)의

                                         11세기 성가집에서 발췌한 일면 - 이 페이지에 실려있는 복음

                                         사가인 성 마가 축일의 연도(蓮禱 L i t a n y)이다.


 

고대 로마식은 로마에서 11세기와 13세기에 만들어진 사본에 보존되어 있는 성가 레퍼토리이지만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은 북부의 프랑크적 양식이 성행하고 지속적으로 발달한 오래된 관례로 믿어진다.(55면참조). 샤를마뉴(742-814)가 건립한 프랑크 왕국은 현재의 프랑스 스위스와 독일 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에서 프랑크왕국으로 건너온 선율이 무엇이었겠는가?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낭송음, 시편곡조 그리고 단순한 다른 유형의 노래들은 매우 오래된 것들이며 아마도 그 당시로부터 실제로 본래 모습으로 보존된 것들일 것이다 30내지 40곡의 안티폰들은 성 그레고리오 시대에 생긴 곡들일 것이다. 더 복잡한 대부분의 선율들 - 트락트.그레두알.오퍼토리.알레투야들 - 은 아마도 북부로 전해지기 이전에 로마에서(좀더 단순한 형태였을 테지만) 사용되었을것이다. 초기 선율중 몇몇은 고대 로마 성가의 사본에 보존되어 있을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이 수입된 음악중 몇몇은 마침내 우리가 지금 볼수있는 오래된 북부 필사본에 적히기이전까지 변화를 계속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9세기 이후로는 상당수의 새로운 선율들과 새로운 성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대부분의 성가는 프랑크 출전에서 나온것이며 이들은 아마도 로마의 원판에 기초했을 것이다. 프랑크 출전에는 각 지방의 필사자와 음악가들이 추가한 것과 조금 다른 판들이 들어가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필사본들이 프랑크 왕국에서 축적되고 편찬된 성가의 레퍼토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대부분의 성가가 북부의 종교적 중심지에서 작곡되고 그 최종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최근 프랑크와 고대 로마의 버젼을 비교해본 결과 고대 로마의 것이 원래 성가의 기본 재원이며 이것이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 약간만 변화했을 뿐이라는 믿음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렇게 본다면 프랑크의 주요 필사본에 보존되어있는 성가는 교황 그레고리 1세(190-604)와 그이 주요 계승자인 교황 비탈리안(657-72)의 지휘하에 재편성되었던 레퍼토리를 전해주고있다.그레고리의 역할이 중요했었다고 알려져있기때문에 이 레퍼토리는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불리운다. 샤를마뉴가 800년 신성 로마제국의 왕위에 오른 후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그레고리오 레퍼토리를 널리 전하고 다른 지방의 성가들 ; 예를 들어 켈트, 갈리아, 모사라베, 암브로시우스의 성가들을 억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지방의 성가들을 없애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의 베네딕트의 수도사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원전들을 주석과 함께 영인본으로 만들어서 Paleographie musicake라는 연속물 출판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수행해왔다. 또한 그들은 다양한 범주의 성가들을 위한 각각의 권들로 된 네우마 양식의 기보법으로 된 현대적 악보 출판을 기획하였다. 이것은 1903년 교황 비오 10세가 공식 바티칸 판이라고 공표하였던 것들이다. 두번째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결의된 자국어 미사의 장려와 함께 이 책들은 근대식 예배에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또한 정기적으로 출판되지도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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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 사 라 베 성 가 - 모사라베식 전례미사 경본에서 발췌 ●

 

                                      성인들의 축일을 위한 미사를 포함하는 모사라베식 전례의 미사

                                      경본에서 발췌한 모사라베 성가. 이 페이지에는 성 세르반두스와

                                      성 게르마누스 축일에 드리는 성무일과의 한 부분이 포함되어있다.

                                      (L o n d o n B r i t i s h L i b r a r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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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브로시우스 성가 - 12세기 암브로시우스 기도서에서 발췌 ●

 

 

12세기의 암브로시우스 기도서에서 발췌한 암브로시우스 성가. 이 페이지에는 세례 요한의 참수 축일에 드리는 성무일과와 미사의 일부분이 수록되어있다.


로마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서방 교회의 중심지는 밀라노였다. 이곳은 비잔티움 또는 동방과 밀접한 문화적 연관을 맺고 번성한 도시중 하나였다. 이곳은 4세기 경에는 서방 황제들의 주요 거주지였으며 그 이후에는 568-744연까지 번영했던 북이탈리아의 롬바르트 왕국의 수도였다. 374-397년 까지 밀라노의 주교였던 사람은 바로 성 암브로시우스로서 그는 서양에 응창적 시편창(responsorial psalmody)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 후에 교황 체레스틴 1세가 이를 로마에서 미사에 도입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시편창에서는 독창자 혹은 리더가 시편 시행의 첫부분을 부르고나면 회중이 나머지 부분을 부름으로써 그에 응답하였다. 밀라노의 중요성과 성 암브로시우스의 개인적 명성으로 인하여 밀라노식의 전례와 음악은 프랑스와 스페인 뿐 아니라 로마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밀라노 에배의 성가들은 후에 암브로시우스식 성가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음악 중  어떤 음악이 정말 성 암브로시우스 자신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것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암브로시우스식의 전례와 그 성가들은 여러 차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밀라노에서 어느정도 유지되어 오고있다. 지금 남아있는 형태를 보면 많은 성가들이 로마 교회의 성가와 비슷하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 상호 영향을 미쳤거나 혹은 같은 우너천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내준다. 그 두가지 중 같은 선율이 있다면 그것이 장식형(ornate type)인 경우(알레루야와 같이) 보통은 암브로시우스식 성가가 로마 성가보다 더 정교하다. 또 단순한형(plain type)이라면 (시편창과 같이), 아므버로시우스식 성가가 로마 성가보다 더 단순하다.

 

 

                                          ■ 로마의 우세 ■

 

로마의 우세 : 근대 시기의 첫 몇세기 동안 로마는 제국의 수도로서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본거지였다. 그들의 비밀리에 만나고 비밀리에 예배를 올렸다 313년 콘스탄키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가 제국 내의 다른 종교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인가하여 주었다. 그래서 교회는 즉시 지하생활(역주:종교 탄압으로 인하여 카타콤 생활을 해왔었다)에서 벗어났으며 4세기에는 라틴어가 로마 전례의 공용어로서 그리스어를 대신하게되었다. 로마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게되자 로마의 주교가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신앙과 교육에 관한 로마의 지도적인 권위가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라들이 개종을 하고 부가 늘어감에 따라교회들은 큰 바실리카(역주:볍정 교회등으로 사용된 로마시대의 장방형 회당)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예배는 이제 더 이상 초기의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열리지않게 되었다. 5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황들이 전례와 음악의 개정에 관심을 두게되었다. 수도원 운영의 지침서인 성 베네딕트 규칙(The Rule of St. Benedict,ca 520)에는 칸토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의무가 무엇인가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몇 세기 동안 수도원의 칸토르는 음악 프로그램 도서관과 필사실 등의 유지, 전례의 연주 지휘등을 맡은 중요한 사람이었다. 8세기경 로마에는 스콜라 칸토룸(Scohola Cantorum)이 있었다. 이것은 성인남자와 성인들을 교회음악가로 훈련시키는 일을 위탁받은 가수들과 교사들의 모임이었다. 6세기에 이미 교황합창대가 있었으며 590년부터 604년까지 교황의 자리에 있었던 그레고리오 1세(The great)는 전례 성가를 표준화하려했다는 점에서 칭송되어 왔다. 9세기 중엽, 교회에서 부르고있는 선율은 모두 그레고리오 자신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전설이 나올만큼 그의 업적은 컸다. 그러나 그의 실제적인 업적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한 전설이 전하고있는 것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의 업적으로 알려진 것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전례집을 새롭게 편찬하고 스콜라 칸토룸을 다시 조직했다. 그는 1년 동안 갖가지 예식에 알맞게 전례의 특정한 항목들을 배정하였는데 이것은 16세기까지 본질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왕국 전체의 통일된 성가 레퍼토리를 확립하기 위한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물론 이렇게 위대하고 광대한 업적들이 겨우 14년 동안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교회의 성가는 서양 문명의 커다란 보배중의 하나이다. 로마네스크 건축과 같이 그레고리오 성가는 중세인들의 신앙심에있어서 하나의 기념비와도 같았으며 16세기까지의 모든 서양음악의 원천이며 영감이었다. 또 지금도 불려지는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노래들 중 한가지이며 창조된 가장 고상한 선율적 표현들도 몇 곡 포함된다. 그러나 이곡들을 순수히 듣기 위한 음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데 그것은 이 곡들이 그 전례상의 맥락이나 목적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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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an Miro - P o r t r a i t of M r s. M i l l ●

 

 

교회의 교부들 : 이러한 견해는 음악이 영혼으로 하여금 신성한것을 사색하도록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교부들의 믿음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음악이 그것을 듣는 사람의 성격에 좋은 혹은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중세 초기의 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생각 즉 심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만 또 아름다운 음을 연주할때의 순수한 쾌락을 위해서만 음악을 듣는다는 생각을 강조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음악 소리가 유쾌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즐거움은 다음과 같은 플라톤의 원칙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원칙에 의하면, 아름다운 사물들은 우리에게 신성(神性)과 완전한 미(美)를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향락이나 소유욕만을 고취하는 세상의 외견적인 미(美)는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몇몇 신학자들의 저서에서)의 저서주의 음악에 관한 발언은 이러한 입장에 그 근거를 두고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철학은 음악이 종교의 하인이라는 것이었다. 음악은 그 매력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고 신성한 생각을하도록 해줄 때만 교회 안에서 들려질 가치가 있었다. 가사가 없는 음악은 이와같은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공식적인 예배에서 기악의 사용을 금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가정이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찬미가와 시편을 노래할 때 리라의 반주는 허용되었다. 이 점에서 교부들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구약성서 특히 시편을 보면 프살테리움과 하프, 오르간 그리고 그밖의 다른 악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많이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였겠는가? 다음과 같은 비유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혀는 주의 프살테리움이다.. 하프는 채(plectrum)가 연주하듯 성령이 진동시키는 입술이라고 이해해야 하며.. 오르간은 우리의 몸이다." 이런 류의 많은 설명들은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데서 기쁨을 느꼈던 시대에는 전형적인 것들이었다.
초기 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일정한 종류의 음악을 배제한 데에는 실제적인 동기도 있었다. 정교한 창법, 대규모의 합창단, 기악 그리고 무용 등은 오랜 관습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마음에 이교도적인 광경을 연상시켰다. 이러한 종류의 음악에서 연유하는 즐거운 감정이 극장이나 시장가를 떠나서 교회로 옮겨오기까지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음악에 회의적이었다. 즉 '악마적인 합창'과 '음탕하고 해로운 노래' 에 몰두하기보다는 '악기의 소리에 대해서 귀머거리'가 되는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케루빔(아홉 천사중 두번째 천사로서 지식의 천사)의 신비스런 음성을 들은 자가 방탕한 노래와 극장의 화려한 선율에 귀기울이다니 터무니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약점을 불쌍히 여기시고 종교의 가르침에 선율의 감미로운 맛을 혼합시켰으며.. 시편의 조화로운 선율을 주시어, 어린 아이들조차 단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영혼을 실제로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내가 내 찬미가의 선율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유혹했다고 주장하는 사라들이 있다"고 말하고 덧붙여서 자랑스럽게 "나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음악을 멸시하고 또 실제로 모든 예술과 문화가 종교에 해로운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교회에 더러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가하면 이교도적인 예술과 문화를 옹호할 뿐 아니라 그 미에 매우 민감하여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음악경험의 즐거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딜레머를 표현하고있다.(아래 인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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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음악의 즐거움과 위엄성 ■
 
내가 맨처음 믿음을 되찾았을 때 주님 교회의 노래에 흘리던 눈물을 돌이켜보고 한편 지금도 부드러운 목청이 척척 장단을 맞추어 노래하는것을 들을 때 가락보다 가사의 내용에 감동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관습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됩니다. 이와같인 나는 음악의 위험성과 유용성의 체험사이에서 의견이 오락가락하지만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다는 점에 더욱 마음이 쏠리는 것입니다(결정적인 의견을 말하는것은 아닙니다만) 여린 마음이 음악을 통하여 경건한 정서로 승화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오나 내 경우에 있어서 가사의 내용보다 곡조에 더욱 끌려갔다면 벌받을 죄를 지은것으로 고백합니다. 따라서 노래를 아니듣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지금 나의 상태! 자기 마음을 잘 가다듬을 줄 알아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하는 그대들, 나를 위하여 나와 함께 울어다오.. 그러나 내 주님이시여 굽어살피사 들어주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낮게 해주소서 주님의 눈앞에 저 자신 알지못할 수수께끼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곧 저의 병이로소이다.

 

세인트 오거스틴의「C o n f e s s i o n s」X. Ch. 33. 휘트니 J. 오츠「Basic Writings of saint Augustine」(뉴욕 1948) 중 J.G.Pilkington 역(랜덤하우스)


38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음악에 관하여-On Music」라는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6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우선 음악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내리는 서장에 이어 첫 다섯 장은 박자와 리듬의 규칙들을 다루고 있다. 409년에 개작된 제6장은 음악과 리듬의 심리학, 윤리학, 미학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 선율에 관한 6권의 책을 더 계획했었다. 예술에 있어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갈등은 중세에만 있었던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은 항상 몇몇 종류의 음악은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에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었다. 교회나 사회 또는 시대에 따라 비록 그 선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경계가 다르게 설정되어져왔다. 초기에 때때로 이 선율 금욕적인 극단에까지 끌어올리게 되었던 것은 역사적 상황을 맡은 소수의 단체였다. 이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사회를 주위의 이교도적 사회로부터 고립시켰고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해서 세상의 모든것을 영혼의 영원한 복락에 예속시키는 일의 급박함을 선포할 수 있도록 조직하였다. 따라서 다수 의견에 의해 교회는 전투에 나가는 군대와 같이 그 임무에 꼭 필요하지 않은 음악이라는 불필요한 짐을 운반할 여유가 없었다. 토인비의 유명한 비유에 의하면 교회는 '우리의 서방 사회가 생겨난 번데기'였다. 음악의 영역에서 음악의 창조력의 배종(胚種)은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비롯되었다. 중세초 고대 로마의 도로를 여행하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이 선율을 서유럽 모든 지방으로 전파하였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이 선율들은 서양음악이 발전해 나온 원천의 하나가 되었다.

 

 

                ■ 보에티우스 - Anisius Manlius Severinius Boethius ■

 

보에티우스 : 고대의 음악 이론과 철학은 - 로마 제국의 멸망과 야만족의 침입 이후 남아있던 수집요약, 변형되어 기원 후 첫 몇 세기동안 서방에 전해졌다. 이러한 과정중 특기할만한것이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의 백과전서적 저서인「머큐리 신(역주:웅변의 신)과 언어학의 결혼-The Marriage of Mercury and Philology」(5세기초)과 아니시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ca 480-524)의「음악의 원리-De institutione musica」이다. 마르티아누스는 기본 교과목으로 문법.변증법.수사학.기하학.산술.천문학과 화성학의 일곱 학예(Seven liberal arts)를 순서대로 제시하였다. 언어적 기술과 관련된 처음 처음 세 과목은 트리비움(trivium)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나중의 네 과목에는 보에티우스가 퀴드리비움(quadrivium)이라 이름붙였는데 이 과목들은 수학적 기술로 구성되어있었다. 마르티아누스는 이 과목들에 대한 도입설명을 머큐리 신과 언어학간의 결혼식의 들러리의 말로 교묘히 위장하고 있다. 화성학에 대한 설명은 대개 4개의 절충적 그리스 저자인 아리스토티데스 퀸틸리아누스(Aristides Quintilianus)에 근거하고 있는데 퀸틸리아누스 자신의 이론적 개념은 아리스토제누스(Aristoxenus)에 바탕을 두고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가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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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 에 티 우 스 - 피 타 고 라 스 - 플 라 톤 - 니 코 마 쿠 스 ●


                                   보에티우스와 피타고라스 그리고 아래쪽에는 플라톤과 니코마쿠스를

                                   상상하여그린 초상들.보에티우스는 모노코드로 음들을 측정하고있다. 

                                   피타고라스는 헤머로 종을 치고있다. 두 그리스의 저자인 플라톤과

                                   '니 코 마 쿠 스' 는 존 경 받 는 음 악 의 권 위 자 로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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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 a u l B r e n t -- D a i s y F u c h i a B o r d e r ●

 

 
보에티우스는 중세의 가장 권위있는 음악 석학이었다. 6세기 초반 젊은 시절에 쓰여진 그의 논문들은 다른 수학적 교육들과 함께 철학공부의 준비 과정을 이루는 교양 4과(quadrivium)내에서의 음악 개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보에티우스 자신의 사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그가 가지고있던 책들 - 주로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니코마쿠스(Nicomachus)의 긴 논문과 프톨레미(Ptoemy)의 화성학 제1권 - 을 편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산술과 기하학, 천문학에 관해서도 이와 유사한 저술들을 남겼는데 산술 저서만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뿐 다른 저서는 남아있지 않다. 그는「오르가논-Organon」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논문 4권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중세의 독자들은 그의 저서가 다른 저자들의 작품에 의거했는지는 몰랐지만 그리스 수학과 음악이론이 보에티우스 이론의 배경을 이루고있다는 것은 이해하였다. 그들은 'De institutione musica'의 모순에도 그다지 고민스러워하지 않았다. 실상 이 책의 처음 세 권은 주로 피타고라스적이며 네 번째 권은 유클리드와 아리스토제누스적 요소를 담고있다. 반면 제 5권은 프톨레미 사상에 근거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반(反) 피타고라스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로부터 알 수 있었던것은 음악이 수의 과학이며 수적 비율이 선율에 허용된 음정이나 협화음정, 음계 악기들의 조율 등을 결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서장들로 여기에서 보에티우스는 음악의 세 종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무지카 문다나(musica mundana,우주의 음악)는 행성의 운동, 계절의 변화, 원소들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정연한 수적 관계로서 대우주(macrocosm)의 조화를 의미한다. 무지카 후마나(musica humana, 인간의 음악), 육체와 영혼 및 그들의 각 부분들, 즉 소우주(microcosm, 역주:즉, 인간을 의미한다)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musica instrumentalis)는 인성을 포함한 악기로 연주될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는 음악인데 특히 음악적 음정의 숫자 비율로 질서의 원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보에티우스와 다른 고대 저술가들이 무지카 문다나와 무지카 후마나 등을 논하면서 그려내었던 우주의 상(象)은 중세 후기의 예술과 문학, 특히 단테의 신곡 마지막 편에 나오는 낙원의 구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무지카 후마나의 원리는 르네상스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점성술의 형태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보에티우스는 성격과 품행에 미치는 음악의 영향력 또한 강조하였다. 그 결과 음악은 고급 철학 수업에 대한 입문서로서뿐 아니라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의 일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음악 예술이라고 이해하고있는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를 세 번째 범주, 추측컨데 가장 낮은 범주에 넣은 것으로 보아 보에티우스는 음악은 감정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지식의 대상이라는 개념으로 보았던것 같다. 그는 음악을 "이성과 감각을 사용하여 수많은 높고 낮은 소리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기술" 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진정한 음악가라고 하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떠한 것인지 그 뜻도 모르면서 노래들을 만드는 가수나 연주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해 타당하고 적당한 사변과 이성에 따라 선법과 리듬, 노래의 종류(genus),협화음정 그리고 이 모든것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철학자와 평론가들을 의미한다.

 

 

                                ■ 문헌자료 - 서양음악사(Grout & Palisca 공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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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 Mozart:Symphonie No.41 in C K.551 ■

                                                       「J u p i t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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