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요한세바스티안 바하~*

미뉴엣♡ 2015. 7. 11. 08:45

♡ 음악의 아버지 J.S. Bach~* ♡    2009/06/27 09:11

 

  

 

                                    %B9%B0%B9%E6%BF%EF4.jpg

                                                ● 김 창 렬 - 물 방 울 과 알 파 벳 레 터 ●

 

                                        

                       ●★ 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

 

 

                                                       200606030021.jpg

                                                         J.S. BACH(1685 - 1750)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특기 할 만한 일이 없는 인생여정은 루터파 독일에서의 그 당시 성공한 많은 음악 기능인들의 그것과 유사한것이었다. 바흐는 아른슈타트(1703-07)와 뮐하우젠(1707-08)에서 오르간 주자로 봉직하였으며 바이마르 공작의 개인 예배당(1708-17)에서는 궁정 오르간 주자와 후에는 악장으로, 쾨텐(1717-23)지방 영주의 궁정에서는 음악감독으로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라이프찌히(1723-50)에서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칸토르(cantor)에 임명되었는데, 이 자리는 루터파 세계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직위였다..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오르간의 명인으로 박식한 대위법 음악의 작곡가로서 얼마간의 명성을 가지고긴했지만 당시 유럽에서 바흐보다 더 널리 알려진 작곡가가 적어도 5~6명은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상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동료들의 즐거움과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는 성실한 직업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0년이 흐른 뒤에도 그의 음악이 곳곳에서 연주되고 또 연구되며 그의 이름이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더 깊이 존경받는다는 것 안다면 그는 분명히 놀랄것이다.

 

                              P1010002a[4].jpg

                                  ● J.S. Bach - Choral Prelude(오르간 소곡집) 자필 악보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북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의 뿌리를 둔 대 바흐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이 집안은 1560년경부터 19세기까지 6대에 걸쳐 많은 훌륭한 음악가를 배출하는데 그 중 몇명은 매우 유명하다. 그는 아이제나흐 바흐(음악가)라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처음 음악을 배웠으며 169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파헬벨 제자로 오르간 주자였던 형 '요한 크리스토프'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사보하거나 편곡하는 당시의 관습을 통해서 음악공부를 했는데 그는 일생을 통해서 이런 식으로 그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류 자곡가들의양식에 친숙하게 되었고 각각의 뛰어난 점을 흡수할수 있었다. 바흐의 음악적 성장은 다섯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수있다. 즉 '장인'(craftsmanship)으로서의 가문의 전통, 총보를 사보함으로서 모든 자료들을 자기것으로 만들수있게 해준 힘들지만 유익했던 방식, 18세기식 후원체계(개인, 교회, 시 당국) 예술의 기능과 예술가의 의무에 대한 그 자신의 종교적인 사고방식, 그리고다른모든것의 기초가 되는것으로 -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 요소등이 그것이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형식으로 작곡했다. 그는 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 작곡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거기에 따라 분류할수있다. 그러므로 오르간 연주를 위해 고용 되었던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에서 쓴 작품들의 대부분은 그 악기(오르간)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교회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쾨텐에서 쓴 곡들의 대부분 클라비어나 기악 합주음악으로 교육용과 가정오락또는 궁정오락을위해 만들어졌다. 다른 건반악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완숙기의 작품들이 더러 라이프치히 시기에 작곡되긴 했지만 칸타타와 그밖의 교회음악이 제일 많이 쓰여진 시기는 라이프치히 초기였다.

 

 

                              P1010003a[8].jpg

                               ●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집 1번(체르니 & 비쇼프 버젼) ●

 

 

                        ■ 요한 아돌프 샤이베의 바흐 양식비판 1737 ■

 

 

만약 그가 편안함(Annehmlichkeit)을 가지고있다면, 과장(schwulstig)되고 혼란한 양식을 통해 작품에서 자연스런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만 없다면, 그리고 과다한 기교의 사용으로 작품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지만 않는다면 이 위대한 인물은 온 나라의 칭송을 받을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들에 의해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연주하기가 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클라비어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지 가수와 악기 연주자들이 그들의 목소리와 악기로 연주할수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장식, 모든 짧은장식음, 연주기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것을 그는 전부 음표들로 표현하고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작품들에서 화성의 아름다움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곡 전체를 통해 선율을 감추어버린다. 모든 성부들은 똑같은 정도의 어려움을 가지고있고 서로서로 작용을 해야하기 때문에..그 어느 성부도 주요 성부로 인지될수없다. 간단히 말해 그는 음악에 있어 시(poetry)에 있어서의 폰 로엔슈타인(Von Lohenstein)씨 같은 인물이다. 과장은 작품들을 자연스러움에서 인위적인것으로 고결함에서 암담한것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자연에 상반되므로 헛된 수고가 되고만 그 성가신 작업과 보기 드문 노력에 감탄한다. 

 

                  샤이베의 정기 평론잡지「Der critische Musikus Stlick」6 may 14.

                  1937년에 실린'an able traveling Musikant' 중 익명의 편지에서

                 〔The Bach Reader〕Hans T. David and Arthur Mendel(뉴욕 1945)

                  편저 P.238

 

 

                                  %25008%5B14%5D.jpg

                                    ● Cy Twombly - The Four Seasons : Summer 1964 ● 

 

 

매장과 부활은 어느정도 바흐의 역사를 기록하고있다고할수있을것이다. 바흐 생존시에 출판되었다가 혹은 바흐에의해 준비가 되고있던 작품으로 《클라비어 연습곡집》,《쉬블러 코랄집》《하늘 높은곳에는-Vom Himmelhoch》에의한 변주곡,《음악의 헌정》그리고《푸가의 기법》등이 있다 바흐의 작품은 그의 사후 꽤 빠르게 잊혀져갔는데 그것은 18세기 중반에 음악 취향의 급속한 변화 때문이었다. 바흐가 가장 그의 중요한 작품들을 준비하고있던 1720년, 1730년대에 이탈리아 오페라하우스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양식이 독일과 유럽 전역에 침투하였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바흐의 음악을 낡은것으로 생각하게끔 하였다. 작곡가이자 비평가인 '요한 아돌프 샤이베'(Johann Adolf Scheibe 1708-76)는 한편으로는 탁월한 오르간주자이자 건반악기 작곡가로 여기면서도 그이 나머지 많은 음악은 지나치게 장식적이며 혼란스럽다고 보았다.(인용문) 그는 오한 고틀리프 그라운 (Johann Gottliebe Graun 1703-71)과 아돌프 하세(Johann Adolph Hasse)의 보다 가락스러우며 단순한 양식들을 더 선호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바흐의 존재가 완전히 잊혀졌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1752년부터 1800년 사이에 완전하게 출판된 대작은 없었다하더라도《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 실려있는 전주곡과 푸가는 더러 인쇄되어 나왔으며 전곡은 헤아릴수없이 많은 사본들로 유포되었다. 하이든은 바흐의《b단조 미사》를 가지고있었다. 모차르트는 《후가의 기법》을 알고있었고 1789년 라이프치히를 방문했을때 모테트들을 연구하기도했다. 당시의 음악 작품에는 바흐의 것에서 인용한 것들이 많이 있었고 중요한 정기간행물『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은 바흐의 초상화를 첫 출판물의 표지(1798)에 실었다. 그러나 바흐의 완전한 재발견은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즉 1802년 중요한 최초의 전기가 출판되었으며 (포르겔-J.N.Forkel에의하여),《마태수난곡》이 첼터에 의해 부활되어 1829년 멘델스존의 지휘로 베를린에서 연주되었고 1850년에는 바흐협회(Bach Gesellschaft)가 창립되었다. 이 협회에서는 바흐의 전 작품을 1900년에 이르러 완간하였다.

 

 

                              P1010006a.jpg

                               ● 바흐가 봉직한(칸토르-음악감독)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 ●

 

  

우리는 바흐가 18세기 전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다양한 장르, 양식, 그리고 형식을 그의 음악에 흡수하여 그 어느것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생각할수없었던 가능성을 끄집어내었고 더 나아가 그의 음악에서는 화성과 대위법, 선율과 다성음악(polyphony)의 갈등을 이루는 요구사항들이 상호간에 기장을 이루면서도 만족 할 만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들을 실감할때 비로소 음악사에 있어 바흐가 차지하고있는 중요한 위치를 이해할 수 있게된다. 그의 음악이 지니는 지속적인 생명력은 몇 마디로 쉽게 설명할수는 없지만 그 중 두드러지는 특성들을 살펴보면 집중적이면서 개성적인 주제, 풍부한 음악적 창의성, 화성적인 힘과 대위법적인 힘의 균형, 힘있는 리듬, 명확한 형식, 장대한 규모, 회화적이며 상징적인 음형을 사용하는 상상력, 지배적인 건축적 악상에 항상 조절되는 표현의 강도, 그리고 모든 세부 묘사에 있어서의 기술적인 완벽함을 들수있다.

 

 

                                 %25006%5B1%5D.jpg

                                              ● Licio Fontana - Spatial Consep 1962 ●

 

 

                                           ■ Bach-French Suite No.4 in Eb BWV 815 ■

 

                                          
                                     

'서양음악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시대의 종말(1)  (0) 2015.07.11
Ludwig von Beethoven  (0) 2015.07.11
장 필립 라모  (0) 2015.07.11
고전양식의 근원(2)  (0) 2015.07.11
고전양식의 근원(1)  (0) 2015.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