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 Musorgsky -
Pictures at an exhibition ●
●★ 러시안 민족주의
★●
「강력한
소수」
19세기 음악에서 하나의 힘이었던 민족주의는 복잡한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그 현상의 성격은 자주 왜곡되어왔다.
언어와 문학에서 긍지를 느낀것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일시키는 민족적 의식 속에서 한 요소가 되었다. 바그너나 베르디의
주제, 재료 선택에는 어느정도 애국적 감정이 반영된 것이었으나 둘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베르디는 민족적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오페라의 특징 이외의 또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이들은
종족학적으로 독일과 이태리가 구별될수있는 양식을 만들지는 않았다. 브람스는 독일 민요를 편곡하고 민요와 닮은
선율을 만들었다 하이든, 슈베르트, 슈만, 슈트라우스, 말러 등의
모든 작곡가들이 민속어법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였으나 자기 나라의
민요 어법만을 강요한것은 아니었다. 쇼팽에게는 폴란드적인 요소나 브람스와 리스트에게는 헝가리
집시적인 요소는 대부분 근본적으로 국제적 양식에 대한 이국적인
장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의 음악에서 민족주의는 진정한 이슈가 아니었다.
독일음악의 지배가 자기나라의 고유한 음악을 창조하는데 하나의 위협으로 느껴졌던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동유럽국가 에서 독립을 추구하고
자국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것은 민족주의
일면이었다. 민족주의 또 다른면은 오스트리아 - 독일 괘도
속에서 그들과 동등하게 인식되고자 했던 작곡가들의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인정을 받는 최상의 법은 특히 고국에서 외국
작곡가를 모방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언어로 경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방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수출 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자국의 고유한 민요나
춤을 사용하고 그것들의 특징을 모방함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양식을 발전시킬수있었지만 전통적인
전통적인 청중과 유럽 대중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민족적 색갈을 갖는 음악은 새로운 이국적 요소때문에
매력적인것으로 여겨졌다.
19세기러시아 세속음악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프랑스, 혹은 독일에서 들어온 작곡가들의 손
안에 있었다. 유럽인과 러시아인 모두에게 진정한 러시아의
목소리로 그리고 서구의 당대 사람들과 동등하게 인식되었던 한 명의 작곡가는 미하일 글린카(Mikhail Glinka 1804-57)였다 글린카는 1836년에 애국적 오페라인 《황제에게 바친 목숨-A
Life for the Tsar》으로 그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비록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에서 많은 요소들을
빌려왔지만 레시터티브와 선율 서법은 개성적이고 러시아적인 특징을 가지고있다. 글란카의 두번째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Russlan and Lydmila 1842》는 온음음계, 반음계주의, 불협화음과 민요에 적용된 변주기법을 매우 대담하게 사용하고있다.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시스키(Alexander Dargomizhsky 1913-1969》의
오페라《루살카-Rissalka》는 러시아의 특징적인 억양에 대한
탐구를 지속시키고있는데 부분적으로 민요에서 발견되는 패턴의 모방을 통해 시도하고있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는 '푸쉬킨'의 《석상의 손님-The
Stone Guest 1872》에 붙인 곡으로 표현적인 표현적인
선율, 낭송은 무소르그스키에 영향을
주었다.
● Pyotr Tchaikovsky(1840-1890) ●
우리에게 대부분 교향곡으로 알려진 차이코프스키는
배경음악과 발레음악 그리고 오페라등 많은 무대용
음악을 작곡하였다. 《예프게니 오네긴- Eugen onegin
1879》은 열정적인 등장인물의 성격을 간파해 내는 것과 관현악 서주에서 처음에 선포된 발아-동기로부터 수많은
주제를 끌어내는 방법으로 인해 주목할만 하다 《스페이드 여왕 - The Queen of
Spade 1890》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잔인한 푸슈킨의 이야기의 분위기를 맞추고 18세기 캐더린
여제(Catherrine the great) 시기의 러시아 정신을 재 창조하기 위해 당시에 쓰이던
음악적 악상을 빌어왔다. 세기의 전환기에 있었던 주요한 러시아
작곡가들은 '강력한 소수'(moguchay kuchka 러시아
5인조)로 알려진 그룹 속에서 서로 단결하였다.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9),
아랙산더 보로딘(Alexander Borodin 1833-87),
세자르 퀴(Cesar Qui 1835-1918),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orgsky 1839-81),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colay Rimsky-Korsakav 1844-1908),등이 그 일원이다.. 발라키레프를 제외한 작곡가들은 전통적인 음악교육을 받지않았으나 이들을 아마츄어라고
할수없다.. 그들은 서양 음악에 감복했지만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
1829-94)에 의해 설립된 페테르부르그 음악원(St.
Petersburg Conservatory)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있었다. 그들은 아카데믹
음악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그들이
수여하는 시험과 상에 개의치않았다. 전통적인 음악이론을 배우지
않았기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길을 발견하지 않을수없었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있는
재료, 즉 민요를 이용하게된다.
그들이 한 주제를 만드는데 있어서 민속재료를 모방하거나 실제적으로 자주 사용하는것은 "문학과 병행하는 현상으로 푸슈킨과
고골리가 대부분의 특징적인 이야기의 기초로 민담을 차용하는것과 같다."
● Alexander Borodin(1833-1887) ●
'강력한 소수'중 유일한
직업 작곡가였던 발라키레프는 교향시《러시아-Russia
1887》와 피아노 환상곡《이슬라메이-Islamey
1869》에서 민요 선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있다. 화학자였던 보로딘은 초기에 멘델스존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발라키레프
설득으로 러시아 음악으로 전환한 후에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b단조 교향곡 2번(1876), D장조 현악 4중주(1885),《rygidwjr tmzcp - 중앙 아시아에서
1880》그리고 4막 오페라《이고르 공 - Prince
Igor》등이 있다. 《이고르 공》은
보로딘이 죽은 후에 림스키콜사코프에 의해 완성되어 1890년에 초연되었다.. 보로딘은 민요
선율을 거의 인용하지 않았으나 그의
선율에는 민요적인 요소가 내재해있다. 그의 교향곡과 4중주는
민족주의자들의 절대음악에서 외국 작곡가들과 경쟁하겠다는 의지가 명백한 곡이다. 보로딘은 주제의
개성과 투명한 관현악 구성(글린카에서 유래) 선법적인
색채를 띠는 섬세한 화성, 시작에서
선포되는 하나의 함축성 있는 주제악상에서 전 악장을 엮어가는
독창적인 방법(2번 교향곡 1악장)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2곡의
교향곡에서 나타나는 조의 설계는 이례적인 조 관계를 러시아인의 취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있다. Eb장조의 1번 교향곡은 3(느린)악장에서 D장조로 시작하지만 중간 부분에서 Db장조로 변하고있다. 2번 교향곡의 네악장들은 각각 b단조, F장조, Db장조,B장조로
되어있다. 멘델스죤처럼 보로딘의 재능은 주로 서정적이고 서술적인면이 탁월하다. 《이고르
공》은 극이라기보다 아름다운
그림같은 장면들을 엮어놓은 것이라할수잇다. 이 오페라의 2막에
나오는 'Privetian
Dance'는 무지개 빛깔의
화성과 밝은 색상, 우아한 선율선, 그리고 글린카의《루슬란과
루드밀라》이후에 많은 러시아 음악의 특징이 되어온 세련되고 이국적인, 동양적인 정취를 보여주고있다.
● Alexander Borodin - Polovstian Dance ●
세자르 퀴(Cesar Qui) : 세자르 퀴, 러시아의 '강력한
소수'에 대하여 우리들은 젊은 작곡가들의 아주 가까운 서클을 이루었다. 배울곳이 없었으므로(음악원이 없을때)
우리들의 독학이 시작되었다. 이는 모든 작곡가들의 모든 작품을 연주해 본
후 그 작품들에 대하여 모든 기술적
창조적인 측면을 비평, 분석하는 일로 이루어져있었다. 우리들은 젊었기에 우리의 판단은 혹독했다.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불경스러웠다. 멘델스존에 대해 우리는 슈만을 대립시켰는데 그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무시 당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에 대해 열광적이었다. 우리들은 쇼팽과
글린카를 숭배하였다. 우리는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그동안 우리는 잼과 함께 너댓잔의 차를 마셔댔다) 우리는 음악형식, 표제음악,
서악음악, 그리고 특히 오페라 형식에
대해 논의하였다..
● M. Musorgsky(1839-1881) ●
■ Modest
Musorgsky(1839-1881)
'강력한 소수'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무소르그스키는 행정 사무를 보는 사무원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으며
대부분의 음악 훈련을 발라키레프에게 받았다.. 그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적 환상곡《민둥산의 하룻밤 1867》피아노 모음곡《전람회의 그림 1874 : 후에
라벨에 의해 관현악 편곡》가곡집《햇볓도 없이 1874》, 《죽음의 노래 1875》,《어린이 방
1872》, 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 1874년 초연 》,《호반사치나 》등이 있다. 《호반사치나》는 림스키콜사코프에 의해 완성되고 1886년에 개별적으로 연주되었으나
1892년까지는 공개적으로 연주되지 않았다.
무소르그스키 독자성은 그의 음악에 모든 면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그는 가사 처리에 있어서 다르고미시스키의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자연스런 말의 억양에 가능한 한
가까워지려하고있다. 따라서 그는 성악곡에 일반적으로
서정적인 선율선과 대칭적인 악구법을 피하고있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가곡들로 평가되고 있다.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
Musorgsky:「Boris Godunov」원작품을 1874년 페테르부르그
(레닌그라드)에서 상연할
당시의 한 장면, 리투아니아 국경
부근 한 여관에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관리가 당황하여 서
있는가운데 술에 취한
바를라암(Varlaam)이 가짜 드미트리로
행세하는
그레고리(오른쪽에서 세번째 농부로 변장,)의 체포
영장을
읽고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실제적인
민속 선율을 간혹 인용할 뿐이지만(〈보리스 고두노프의 대관식 장면같이〉) 그의 음악성 안에 보로딘 보다 더 깊게 러시아의
민요가 뿌리 내리고 있음을 말해 준다. 러시아
민속선율은 좁은 음역 안에서 움직이고 하나나 두개의 동기를 집요하게 반복하거나 불규칙한 리듬의 악구가 하행
4도의 종지로 끊임없이 하강하려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러시아 민요와 무소르그스키의
선율이 갖는 또 다른 러시아적인
현저한 특징은 선법적인 성격에 있다. 이 선법은 무소르그스키의 화성적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브람스 역시
선법 화음과 진행을 사용하였으나 유럽의 일반적인 음악어법 속으로 선법성을 도입하는데 앞장 선 사람은
러시아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초 음악에 미친 그들의 영향은 중요한것이었다. 《햇빛도 없이 》의 연가곡 중의 하나인《축제의 나날은 끝나고》에서 무소르그스키의 비 기능적인 화성
진행은 드뷔시의 주목을 끌었다..
드뷔시는 그의 《구름-Nuages》에서 위 작품의 반주
형태 하나를 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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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orgsky - Boris Godunov End of Act II ●
화성면에서 볼때 무소르그스키는 모든 작곡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사고의 전통적인 관습에 표준적인 방식의 수법에 익숙치
않은 무소르그스키는 피아노 앞에서 "대담하고 새롭고 거칠지만 이상스럽게도 올바른 화성"을 만들기 위해 고되게 작업해야 했다. 그는 리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화성적인 면에서도 다성적인 민속노래 부르기에 많은 영향을 받고있었다. 그의 화성적 어휘에는 진보적 성격을 갖는것이 거의 없으나 (글린카나 다르고미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온음음계를 일부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외견상 단순해 보이는 화성진행에서 그가 원하는 효과가 정확히 전달되고 있으며 정상적인 교과서적인 원리로 분석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저항에 부딪히게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사실주의는 다르고미시스의 오페라《석상의 손님》의
음악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에서 단지 말의 억양을 모방하는것 뿐만아니라 제스처(보리스 2막 끝장면), 군중들의 떠드는 소리(〈보리스〉와 〈호반사치나〉의 합창 장면)와 그림(〈전람회의
그림〉)의 살아있는듯한 음악적
묘사에서 까지도 그 반향을
찾을수있다. 노래에서 작은 규모로 나타나고 있는 심리적 통찰은 오페라에서 보리스 황제의
성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같은 수법으로 적용되고있다. 다른 러시아 자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무소르그스키는 정점으로 향하는 주제적
발전기법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의 인상을 반복하고 축적하는것으로서 효과를 만들어낸다. 19세기 위대한 비극
오페라중의 하나인 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에서조차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줄거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중심 인물 보리스와 장면들의 서사적 성격에 의해, 그러나 주로
무소르그스키 음악이 갖는 순전한 극적인 힘으로 인해 용접된 일련의 에피소드이다. 무소르그스키
그의 예술에는
바그너에게서의 영향이 거의 없다. 그가 유도동기를 사용한 점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의 관현악은 매우
효과적으로 극을 뒷받침하면서도 독립적인 교향악적인 삶을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
무소르그스키 -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 밤' ●
■ M.
Musorgsky : A Night of Bald(민둥산의 하룻 밤)
이 곡은 시원하기보다 으시시한 음악이라고 해야할것이다. 꼭 여름철에 TV에서
납량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하는것처럼 클래식 음악에도 요괴들이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음악인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음악이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이라는 곡이다.
유럽과 러시아에서는 6월 24일이 우리나라의 하지에 해당하는 '성 요한제'로
러시아에서는 그날 밤 산에서 요괴들이 내려와 온갖 장난을 한다고한다.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은 그것을 묘사한 음악이다. 악보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지하 정령들의 소동.. 먼저 어둠의 혼령이 나타나고 이어 체르노보크(암흑의
신)가 등장한다. 혼령들이 체르노보크에 대한 찬미와 어둠의 제전, 그리고 성대한 지옥의 향연, 그 시끄러운 잔치가 한창일때 들려오는 마을 교회의
종소리, 어둠의 혼령과 체르노보크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면 어느새 동이 튼다."
월트
디즈니에서 클래식 음악을 에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영화 「환타지아 」에서 에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민둥산의 하룻밤'을 볼수있는데 이것을 보면 더욱
실감나게 이 곡을 감상할수있다.
무소르그스키의 교향시《민둥산의 하룻밤》은 원래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소르친스크의 시장》에서 사용될 예정이었던 《젊은이의 꿈》이라는 음악을 림스키콜사코프가 무소르그스키 사후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며 1886 10월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교향악 연주회에서 림스키콜사코프 지휘로
초연되었다.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속에서 이 곡은 3막 1장과 2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데 오페라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꿈속에 나타난 악마의 향연을 묘사하고있다. 《젊은이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던 이 곡이 나중에
림스키콜사코프에 의해 편곡되면서 《민둥산의 하룻밤'》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것은 본래 이 작품이 무소르그스키가 1867년에 완성한
관현악곡《민둥산의 성 요한 축일 전야》에서 유래되고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남부 키에프에 있는 '트라고라프' 라는 산 위에서는 매년 6월 24일
성 요한의 제사를 지내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전 날밤에 악마들의 잔치가 벌어진다고 한다. 이런 전설에 따라 성 요한 축일 전야의 모습을 묘사한
곡이 바로 《민둥산의 성 요한 축일 전야 》이다. 무소르그스키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한 밤의 영혼들이 지하에서 아우성치며 어둠의 영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탄이 나타나 악마를 숭배하는 의식이 벌어져 절저에 달할 무렵 멀리서 작은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혼령들이 사라지면서 아침 하늘이 밝아온다.
"
무소르그스키는《민둥산의 축일 전야》를 발라키레프에게 헌정할 생각으로
작곡했으나 발라키레프는 이 작품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결국 얼마 동안 이 작품은 출판되지 못한 채 성 페테르부르크의 공공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가
1968년 모스크바의 출판사인 '무지카'를 통해 출판되었다. 그래서 현재 무소르그스키의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가 직접 오케스트레이션을 붙인 원전
판인 《민둥산의 축일 전야 》와 림스키콜사코프에 의해 편곡된 《민둥산의 하룻밤》의 두가지 판본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대개는 거칠고 과격한
원전판 보다는 림스키콜사코프에 의해 잘 다듬어진《민둥산의 하룻밤》이 보다 자주 연주되고 있다.
■ Nicolay
Rimsky-korsakov(1844-1908)
림스키콜사코프는 위에서 언급한 첫 세대와
20세기 초의 러시아 작곡가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고있다. 그는 발라키레프
모임의 보호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
민족적 어법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다 넓고 절충적인 방법과
수단에 기초한 양식으로 향하려는 1880년대의
러시아 음악가들 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민족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선율과
화성적 특징, 그리고 민족 선율을 자주 사용는것 뿐만아니라 민요들 편곡하고 모음집 편집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고있다.그는 초기의 해군에서 사직한 후 1871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러시아에서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발라키레프에게서 받은 초기 음악교육을 보충하기위해 독학으로 대위법
과정을 공부했다. 림스키콜사코프
작품에는 교향곡, 실내음악, 합창과 노래가 있지만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시와 오페라를
들수있다.
무소르그스키의 강렬하고 극적인 사실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림스키콜사코프의 음악은 쾌활한
환타지와 밝은 관현악 색채로 특징지워
진다. 《스페인 기상곡-Capriccio espagnol 1887》,교향
모음곡《세헤라자데-Scherazade 1888》, 그리고 《러시아
부활제 서곡-Russian Easter Overture 1888》은 관현악법에 대한 그의 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그의 교수법은 1913년에 출판된 논문에서 체계화되었다. 그의 15개
오페라 중 가장 중요한 2개의 오페라《사드코-Sadko
1897》와 《금계-The Golden Cokerel 1909년 초연》에서 그는 온음계적인 종종 선법적인 양식을
가볍게 반음계적이고 몽상적이면서도 이러한 작품 줄거리의 무대가 되고있는 동화세계를 제시하는데 가장 적합한 양식과 번갈아 쓰이고있다. 림스키콜사코프의 지도적인 제자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민족주의자인 교향곡 작곡가 알랙산더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 1875-1936)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2)가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품 《불새-The
Fire Bird 1910》는 림스키콜사코프의 양식과 관현악 기법을 계승하고있다.
●
Rimskykorsakov - Sheherazade ●
차이코프스키와 같이 라프마니노프(Sergei Rakmaninov 1873-1943)는 민족적인 특성과 후기 낭만주의
어법을 혼합하고있다. 수많은 노래와 피아노 작품 외에 그의 가장
주목 할 만한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 2번(1901)과
3번(1909), 교향시 《죽음의 섬-The Isle of the Dead 1907》등이다.
■ Alexander
Scriabin(1872-1915)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 무소르그스키의
색채적인 화성은 알렉산더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 음악에서 절정을
이룬다. 콘서트 피아노 주자인 스크리아빈은 쇼팽의 방식으로
녹턴과 프렐류드, 에튀드, 마주르카등을 쓰기 시작했다.
리스트나 바그너 반음계주의에 영향을 받고 어느 정도는
인상주의의 방법에서도 영향을 받은 그는 점차로 고유의 복잡한
화성적 어휘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어법의 성장은 그의 10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1곡마다 단계적으로 나타나고있다.
이 중 1912-13에 작곡된 마지막 5곡은 조 기호가 없으면서 가끔씩 무조성에 도달하는 화성적
모호함을 나타내고있다. 전통적인
조성구조는 이례적인 음정으로 만들어진
화음체계로 전환된다(특히 반음계적인 변화를 동반한 4도관계 예 19.8) 전통적인
형식상의 구분은 기이하면서 색채적이고 때로는 장려한
음향의 흐름 안에서
분해된다.
●
A.Scriabin-Clavier a lumieres(keyboard of light) ●
스크리아빈의 가장 전형적인 작품으로는 두개의 관현악
작품《법열의 시-Poem of Ecstasy 1908》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1910》가 있다. 후자에서 작곡가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색이 가미된 조명으로 가득 채워진 음악회장을
원하였다 그는 이루 말할수없는 신비적 황홀상태를 끌어내기 위한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종합 이론을 점차로 발전시켰다. 그의 양식과
방법은 너무도 개성적이고 그의 미학적 목표는
후기 낭만주의 이념에 너무 묶여있었기 때문에 한
악파를 키워내는 기초가 되지는 못했다. 중요하지 않은 러시아 작곡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가 키운 후계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성적 어법이 20세기 초 반조성적인 경향의 급진적인 예로서 그 시기의
작곡가들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듯하다.
● A. Scriabin - Jenufa & Prometeus ●
♡프린세스
미뉴엣..*♬♡
(Classical Music
Critic)
문헌참조 :「서양
음악사」
(Grout & Palisca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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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orgsky - A Night of Ba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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