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고전양식의 근원(1)

미뉴엣♡ 2015. 7. 11. 06:50
♡ 고전양식의 근원(I) ♡    2009/10/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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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양식의 근원 : 18세기의 소나타 * 교향곡 * 오페라 ★●

 

 

 

                                          ■ 계몽주의 ■

 

"음악은 무해한 사치품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제론 불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청각을 크게 발달시키고 만족시켜준다, "찰스 버니(Charles Burney)는1776년 런든에서 출판된「일반 음악사(General History of Music)」제 1권에서 이렇게 단언했다.이보다 80여년 전에 안드레아스 베르크마이스터(Andreas Werckmeister)는 음악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 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가지 정의 사이의 차이는 18세기 동안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의 변화를 보여주고있다. 계몽주의라고 알려져있는 복합적인 운동은 정신적 반항으로 시작되었다. 즉 초자연적인 종교와 교회에 대한 반동과 자연적인 종교와 실제적인 도덕에 대한 지지,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과 상식, 경험심리학, 응용과학, 사회학에 대한 지지, 인습의 거부와 자연스러움에 대한 지지, 권위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것, 그리고 특권을 거부하고 평등한 권리와 보편적인 교육에 대해서는 찬성하는것 등이다. 계몽주의 성향은 그러므로 세속적, 회의적, 경험적, 실제적,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적, 진보적인 것이었다. 계몽주의 초기지도자들로는 영국의 로크(John Locke)와 흄(David Hume), 프랑스의 몽테스키외(Mountesquieu)와 볼테르(Voltaire)를 들 수 있다. 계몽주의 초기양상은 주로 부정(不定)적인 것이었으나 파괴적인 비판으로 생겨난 진공상태는 곧 새로운 이념으로 채워졌다. 즉 자연의 자연적인 본능 혹은 감정은 참된 지식과 올바른 행동의 원천이라는 사상이었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1760년경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러한 단계의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주창자였으며 이 밖에도 계몽주의는 시인이며 철학자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과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그리고 '질풍노도(Sturm und Drang)'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문학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사상의 두가지 기본이념 - 응용된 실험적 지식의 유효성에 관한 신념과 골통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치있게 여기는 신념 - 은 개인을 연구의 출발점이자 행동의 최종적인 기준으로 본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하고있다. 종교, 철학체계, 과학, 예술, 교육, 사회 질서들의 모든것은 개인의 행복에 어떻게 공헌했느냐에 따라 평가되었다. "각자의 내면생활 안에서 마음껏 즐기는 개인.. 이것이 계몽주의 세대의 특징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결과의 견해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18세기 특징적인 윤리체계에서 개인이 지니고있는 천부적인 능력은 조화있게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최상의 선이라고 단정한 것이라든지 아니면 공리주의자들에서 볼 수 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하는 신조에서 윤리적 이상을 발견한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경향이 예술 특히 음악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려고한다. 18세기도 철학자들이 다른 시대보다 더 생활을 주도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사상체계는 생활조건에 영향을 주는것 만큼이나 그것에 좌우되고 또 영향을 받는다. 그 일부가 미국의 독립 선언문과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개인의 권리에 대한 원칙은 유럽대륙의 서민과 특권계급 사이에 가로놓여있는 극심한 불평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사회적 비판은 프랑스 혁명을 앞둔 수년동안 프랑스에서특히 첨예하게 나타난다. 과학의 발견이 실생활에 응용되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한편으로는 감정철학의 발전과 '자연적인' 인간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중산계급의 부각과 때를 같이하여 나타났다.

 

 

                                       ■ 18세기의 양상들 ■


18세기 생활 양상들 : 18세기는 세계주의(cosmopolitan)적인 시대였다. 인류 공통성의 인간성에 견주었을때 민족적인 차이는 극소화되었다. 외국 태생의 통치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영국, 스웨덴, 폴란드에는 독일 출신의 왕들이 있었고 나폴리에는 스페인 출신의 왕이 토스카나에는 프랑스의 공작이, 그리고 러시아의 여제로는 독일 출신의 공주(카타리나 2세)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볼테르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 궁정에그리고 이탈리아 시인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는 빈의 독일 황제궁에 머물고있었다. 18세기 생활과 사상에 있어서 이러한 국제화는 이 세대 음악에도 반영되었다. 빠리에서는 독일출신의 교향곡 작곡가들이 활동하고 독일, 스페인, 영국,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과 가수들이 활약하고있었다. 콴츠는 베를린에서 쓴 저서(1752)에서  이상적인 음악양식은 모든 나라의 음악으로부터 가장 뛰어난 특질들을 모아 만든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음악이 있을뿐이다..우리 대륙의 이 공통언어", 샤바농은 1785년에 이렇게 선언하였다. 18세기는 자연적으로 먼곳 뿐만아니라 시간적으로 먼 옛날로부터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고전주의 운동은 고대 세계의 예술과 문학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 예를 취했다. 18세기 말기에 이르러 낭만주의가 시작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중세에 관심이 모아졌고, 한편으로 음악가와 시인들은 모두 민요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계몽주의는 세계주의적인 동시에 인도주의적이었다.군주들은 예술과 문학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개혁 과정에 직접 관여하였다. 18세기는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 러시아의 카타리나 대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그리고 프랑스(제위 초기)의 루이 16세 등 개명된 전제 군주시대였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기를 기원하는 인도주의 이념은 프리메이슨(Freemasonry)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운동은 18세기 유럽에 빠르게 파급되었으며 이 운동의 지지자들에는 군주들(프리드리히 대제), 시인들(괴테), 그리고 작곡가들(모차르트)도 포함되어있었다. 모차르트의 <마적-Magic Flute>, 쉴러의 <환희의 송가-Ode to Joy>,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등은 18세기 인도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중산계급들이 영향력있는 지위에 올라서게됨에 따라 18세기에는 예술과 학문을 대중화시키는 첫 단계를 밟게되었다.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주제에 관한 문제들 뿐만아니라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도 새로운 수요에 따라 변화되어야했다. 철학, 과학, 문학 그리고 미술 모두는 전문가와 감정가들의 한정된 집단 대신에 일반 대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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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han Johacim Quantz(1697-1773) ●

 

 


                  ■ 혼합된(다국적) 양식의 우수성에 관한 콴츠의 고찰 ■ 

 

오늘날 독일의 양식이 그렇듯이 서로 다른 민족적 양식이 혼합되어있는 양식에서는 각 나라가 자신들이 선호하고 그림으로써 자신들을 결코 불쾌하게 하지않는 무언가를 찾아낸다. 양식들의 차이점에 관하여 앞에 언급한 모든 사상과 경험들을 돌이켜 보자면 순수한 이탈리아 양식이 순수한 프랑스 양식보다 선호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전자는 더 이상 전과 같이 굳건한 기반이 되어주지 못하고 점점 분방하고 기묘해지며 후자는 너무 단순한 상태로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양쪽에서 훌륭한 요소들을 취하여 섞어놓은 양식이 분명히 더 보편적이고 더 만족스러울 것이라는데에 모든 이가 동의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 한 지역, 특정 국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음악양식 - 위의 이유들로 승인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음악양식 - 은 그것이 건전한 판단과 건강한 감정에 기반을 두고있는 한 최상의 것임에 틀림없다.

 

요한 요하임 콴츠(Johan Johachim Quantz) 「플루트 연주지침-On Playing the flute」R. Reilly역 (뉴욕, 1966) XVIII, 89,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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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 저서들이 모든이에게 손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했고 소설과 희곡들은 일상적인 지닌 평범한인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예절과 의복에도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초엔 중산계급의 시민들이 귀족을 흉내냈던것이 1780년 무렵에는 귀족들이 하층계급을 모방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중화 경향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운동이 전개되고 문학과 예술에서 감정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강력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음악 역시 다른것들과 마찬가지의 영향을 받았다. 개인적 후원의 손길이 약해졌으며 근대적인 음악 청중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여러 계층의 청중들을 위해 기획된 공개 연주회가 종래의 개인적인 연주회나 아카데미와 어깨를 겨루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연주회, '영적인 연주회(Concert Spirituel)'가 생겨나게 되었고 1763년 힐러(Johann Adam Hiller)에 의해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또 다른 연속 공개연주회는 1781년 이후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었다. 이와 비슷한 연주회 조직들이 1771년 빈에서 그리고 1790년 베를린에서 설립되었다. 1672년 이후 런든에서는 연주회 단체들이 산발적으로 번창했으며 1741년 더블린에서 문을 연 음악회장(Music Hall)에서는 헨델의 《메시아》가 초연되기도 했고 옥스포드에서는 연주회용 강당이 1748년 홀리웰(Holy well)에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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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인쇄가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출판물의 대부분은 애호가를 겨냥하여 만들어졌고 많은 음악들이 정기 간행물로 출판되었다. 애호가들은 이해하기 쉽고 연주하기 쉬운 음악을 요구하고 구매했으며 둥시에 음악에 관해 읽고 토론하는데 흥미를 가지게되었다. 음악 언론이 뒤따르게 되어 당세기 중기 이후에는 음악에 관한 소식과 평론 그리고 비판을 전적으로 다루는 잡지들이 출판되었다. 음악사가 처음으로 쓰여졌으며 중세음악 논문집이 최초로 출판되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산문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최고의 문학은 산문이었으며 좋은 산문을 쓰는데 요건이 되는 명확성, 생기, 좋은취미, 균형, 그리고 우아함등은 모든 예술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시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었던 바로크시대의 신비주의, 엄숙함, 장대함, 육중함, 정렬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비판적인 기질로 인해 큰 규모의 장식들은 제약을 받았다. 18세기 초의 미학은 음악의 과제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모방하고 듣는이에게 유쾌하게 소리나는 실제의 상(image)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음악은 자연계의 실제 음향을 모방한것 이라기 보다는 목소리 특히 영혼의 느낌을 표현했을 때를 모방한 것이라고 믿어졌다. 루소와 그밖의 몇몇 사람들에 의하면 음악은 인간의 자연적인 언어(natural language)라고 생각되어지는 원초적인 말과 같은 노래(speech song)를 모방해야만 하는것으로 다시 말해서 음악은 반드시 말을 모방할 필요는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 그 자체를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론가들은 점차로 음악이 음향의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직접 움직일 수 있고 음악작품이 어떤한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발전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그시기에 이르러서도 모방 개념은 지속되었다. 즉, 음악은 모방적인 그러므로 장식적인 예술로서 '버니'가 언급한대로 무해한 사치였다. 더욱이 계몽주의 음악은 듣는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강요하지않고 있는 그 대로의 청자를 만족시켜야만 했다. 그것은(유쾌한 음향과 합리적인 구조로) 즐거움을 주고(감정을 모방함으로써)감동을 주어야하지만(지나친 기교로써) 너무 자주 놀라게하거나(너무나 복잡한 방법으로) 어리둥절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유쾌한 소리들의 연속과 결합으로 즐거움을 주는 예술"로서 음악은 몇몇 사람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던 대위법적인 복잡함을 피해야만했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문필가들이 작곡을 "선율을 창안해내고 적절한 화성으로 거기에 반주를 곁들이는 기술" 이라고 정의하고 "두개의 선율을 동시에 노래하는 것은 보다 많은 효과를 내기 위해 두 언어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것" 이라고 단언한 루소나 혹은 "이 전의 작곡가들은 음악적 기교에 너무나 집착하여 그것을 지나치게 사용함으로써 감동과 즐거움을 주도록 되어있는 음악의 가장 핵심적인 면을 거의 간과했다"고 느꼈던 콴츠처럼 극단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버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비판하면서 그가 오르간 작품들에서 "자연스러움과 이해하기 쉬운것들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새롭고 어려운것만을 끊임없이 추구했다"고 했으며 이 위대한 작곡가가 작품을 쓸떄 모든 무의미한 고안과 기교를 버리고 보다 더 대중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즐거운 양식으로 쓰는 법을 배울 수 없었던 것은 유감으로 생각했다.

여기에서 버니는 자연을 미학적 규범으로서 상찬하였다. '자연'은 계몽주의시대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여러가지 모호하고 상충된 의미를 지니는 용어이다. 버니가 그 이후에는 바흐 음악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언급해두는 것이 공정할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의견들은 당 세기 중반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지니고있던 생각으로 18세기 음악은 감상적이며 순진할 때가 많았다.

 

  

                                       ■ 18세기 음악의 이상 ■

 

18세기 음악의 이상 : 따라서 18세기 중기와 후기에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음악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을것이다. 즉 그 어법은 국가간의 경계로 인해 제한을 받지 않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했고 재미가 있는 동시에 품위있어야 하며 단정함의 범위 내에서 표현이 풍부해야만 했다. 그것은 또한 불필요하게 복잡한 기교를 사용하지않고 정상적인 감수성을 지닌 청중이라면 누구나 즐거움을 느낄수있는 의미에서 '자연스러워야' 했다. 이러한 공식은 18세기 모든 음악을 설명하는데 적용되기 보다는 특히 당세기 마지막 30년 동안에 작곡가들과 청중의 양쪽의 마음을 다소간 의식적으로 지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떤 공식으로든 17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작곡된 모든 음악의 다채로운 면모들을 설명해 낼 수 없다. 구양식은 단지 서서히 새로운 양식들에 서서히 길을 내주었으며 옛 것과 새 것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전형적인 작품들 - 예를 들어 페르골레지의 코믹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와 사마르티니의 교향곡, 서곡, 그리고 협주곡들 - 은 바흐의 <b단조 미사>와 <골드베르그 변주곡> 혹은 헨델의 <메시아>와 같은 시기인 1730년대와 1740년대에 작곡된 것들이었다. 우리가 본 대로 18세기는 세계주의적인 시대이긴 했지만 여러 다양한 민족적인 양식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프링스 혁명 전야까지 계속되었다. 게다가 1750년 이후에는 모든 나라에서 낭만주의 시대의 전조로서 새로운 민족적 형식의 오페라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18세기의 인주의적 이상주의 물결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음악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민족적 오페라의 발생과 민요에의 관심 증대와 함께 전 낭만주의 적인 경향으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이다.. 17세기 후기의 작곡가들을 때때로 단순히 바흐와 헨델의 선구자 정도로 보듯이 18세기 중기의 작곡가들을 글루크, 하이든, 그리고 모차르트의 선구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특히 18세기의 경우에 더 심한데그 이유는 18세기 중반의 오페라와 교향곡들은 거의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구자' 라는 그릇된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새 것으로 옛 것을 대신하는 것이 진보라고 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말과 마차는 자동차에게 자리를 내주었지만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슈타미츠의 교향곡을 대신했다고 했을때 그것은 단지 후자가 연주 목록에서 빠졌다는 것을의미 할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두 작곡가의 작품들은 음악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찾아볼 수 있으며 학생들은 연구 과정에서 작곡가가 이전의 작곡가로부터 물려받은 특징들과 동시에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유용하고 자극제가 되어준 특징들을 찾아내는 한편 작품의 본래적 성격과 그 시대에 지녔던 의미에 따라 하나의 음악 작품을 판단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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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코코 양식(Archives National-Hotel de Sousise) ●

 

 

               ■ 기악음악(Instrumental Music):소나타, 교향곡, 협주곡 ■

  

전 고전주의 시대의 용어 : 1720년경부터 시작하여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융성했던 양식을 기술하는 데에는 몇가지 용어가 사용되고있다. 로코코(rococo)라는 용어가 전 고전주의 음악에서 사용되고는 있지만 정확한 의미를 갖고있지는 않으므로 피하는것이 좋다. 물론 프랑수아 쿠푸랭(Fransois Couperin)의 오페라 발레(opera-ballet)와 성격 소품들은 건축에서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로코코라는 용어는 17세기 말 굴곡진 아라베스크(아리비아풍의 장식양식, rocallie 혹은 조가비 세공)로 이루어진 르네상스 다음 시대의 모가 나고 네모난 형태들을 부드럽게 만든 건축을 지칭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었다. 또 다른 용어 갈랑(glant)은캉프라의 오페라 발레 <우아한 유럽-L'Europe galant 1697>의 경우에서처럼 연애의 우아함을 암시하는 제목들과 문학에서의 귀족적이고 우아한 양식을 나타내는데 널리 사용되었다. 갈랑은 현대적이고 단정하며 멋지고 부드러우며 간편하고 또한 세련되게 생각되는 것에는 어디에나 적용되는 슬로건이었다. 그들의 저서에서 '칼 필리프 에마뉴엘바흐', 마르푸르그(Narpurg) 그리고 그 이후의 키른베르거 등은 대위법적 작법의 엄격한 혹은 학습되어진 양식과 보다 자유롭고 덜 선적인 갈랑양식을 구별해 놓았다. 갈랑양식은 짧은 숨으로 이루어져있고 종종 반복되는 동기들이다. 보다 커다란 악절로 결합되는 둘, 셋, 그리고 네마디의 악구로 짜여져있는 선율들이 강조되는데 이들은 잦은 종지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7화음과 감7화음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단순한 화성으로 가볍게 반주되고있다. 이런 양식은 레오나르도 빈치(Leonardo Vinci 1690-1730), 페르골레지, 그리고 하세의 오페라풍의 아리아와 갈루피의 건반음악 그리고 사마르티니의 실내음악에서 일찌기 발견되고있다. 18세기 중반의 음악과 관련된 또하나의 용어가 엠핀트잠카이트(Emfindsamkeit)이다. 그것은 감상성(sentimantality) 혹은 예민한 감수성(sensibility'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일련의 느린 악장들과 특히 오블리가토 레시타티브(obligato recitative)들의 특징인 정제된 정열과 우울함을 뜻한다. 화성의 예기치 못한 변화, 반음계주의, 긴장된 리듬 음형, 랩소디풍으로 자유로움 말과 같은 선율로 표현되고 있는 이것은 비발디의 후기 콘체르토들 페르골레지의 <성모 애상-Stabat Mater>와 같은 작품들, 그리고 칼 필립 에마뉴엘 바흐의 건반 소나타들에서는 갈랑양식과 함께 발견된다.

 

 

     ■ 요한 키른베르거(1721-83)의 갈랑과 엠핀트잠머 양식에 관하여(1760) ■

 

지난 세기에는 오페라와 콘체르토가 나타남으로써 음악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화성 기법들이 쏟아져나왔고 보다 멜리스마적인 장식들이 노래에 나타고있다. 이로 인해 이른바 갈랑 혹은 자유롭고 가벼운 양식과 훨씬 다양한 박자와 악장이 점차적으로 출현하게되었다. 그럼으로써 정서표현의 선율적 언어가 급작스럽게 증가했다는점을 부인할수없다...확실히 새로운 선율을 많이 만들어내고 심지어 엄격한 화성규칙을 솜씨좋게 위반함으로서 열정과 생명력 그리고 그밖의 감정의 음영면에서 많은것을 얻을수있게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대가만이 그것들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있다. 최근의 음악은 유쾌하고 매우 유연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탈리아인들의 정교한 감수성(Emfindsamkeit)에 고마워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또한 바람직한 취향을 망치고있는 대부분의 것 또한 이탈리아에서 생겨난것으로 특히 아무뜻도 없이 단지 귀만 간지럽히는 선율들이 많은것이 문제이다.

 

J.G.Shulzer의「미술 일반이론-Allgemeine Theorie der schonen Kunste」(비엘 1777) - 요한 필립 키른베르거(Johan Philippe Kirnberger) 'Musik' 항목에서 3:438-39. C. 펠리스카의「바로크 음악-Baroque Music」에 영역(Englewood Clifs.1981) p.169


선율과 화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 18세기의 새로운 양식에서 선율을 강조한 것은 이전의 지속적인 동기 변주와 그것의 통주저음 반주 모두에 뚜렷하게 대조되는 선(linear)적인 구분을 가져오게 했다. 예를들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정상적인 작곡 기법으로는 한 악장의 악상 - 기본적인 감정을 구체화하는 선율적 리듬적 주제 - 은 처음에 오도록 되어있다. 이 소제는 그런 후에 실을 잣듯이 전개되는데 종지는 드물게 그리고 보통 눈에 띄지 않게 나타나며 악구의 동형 진행적인 반복은 악절 구조를 나누는 주요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 예리한 대조가 없는 고도로 통합된 진행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비발디의 콘체르토에서처럼) 주제를 담당하는 총주 부분과 비 주제적인 독주부분 사이의 대조로 이루어지는 형식 패턴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악구의 구성은 보통 매우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악구의 주기성 악구와 악우의 전후 대응 관계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한편으로 관계조를 근간으로 해서 하나의 악장을 구성해가는 방법은 유지시키면서 18세기의 새로운 양식은 선서히 하나의 기본 감정을 중요시하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나의 악장의 여러 다양한 부분들 사이의 혹은 심지어 주제 내부나 주제 상호간의 대조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계속 얼키고 설키는 전개방식 대신 선율들은 일반적으로 길이에 따라 두 마디 혹은 네 마디(3마디 5마디 혹은 6마디일때도 자주 있었다) 로 이루어진 구분이 명확한 악구로 조직되고 그 결과 주기적인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선율 자체의 본질은 경과음, 돈꾸밈음, 전타음 등등에 의해 장식되기도 하는 단순히 화음을 풀어쓴 음형일수도있다. 혹은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서 차용한 선율형으로 악구가 쉽게 바뀌거나 반향되는 경쾌한 파를란도(parlando)이거나 때때론 심각한 오페라 아리아양식에서 부분적으로 파생한 노래하는 알레그로(singing allegro)일때도 있다. 장조 선율이 일시적으로 단조로 변하면서 색채가 더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모든 선율 특별히 느린 선율은 오랜동안 어느 정도의 장식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음악 대부분은 옛 양식과 비교하여 화성적 리듬은 느리고 화성 리듬은 덜 무거웠다. 분주한듯이 많은 선율의 움직임이 비교적 느리게 움직이는 전통적인 화성위에서 이루어지며 중요한 화성변화는 거의 언제나 마디줄로 표시되어있는 강한 악센트와 일치하고 있다. 베이스와 화성이 선율의 단순한 반주 역할로 선율에 종속되어 있음은 18세기 중반 건반음악에서 널리 사용된 기법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도메니코 알베르티(Domeniko Alberti 1710-40)의 이름을 딴 알베르티 베이스(Alberti bass)가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기법은 근간이 되는 화음들 각각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순한 음형의 짧은 음으로 분배함으로써 배겨의 미묘한 음의 굽이치는 흐름을 만들어 선율을 돋보이게 해준다. 이 알베르티 베이스는 매우 유용하여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까지도 이 베이스를 경시하지 않았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한참 동안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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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menioco Scarlatti(1685-1757) ●

 

 

               ■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 ■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 18세기 이탈리아의 주요 건반음악 작곡가, 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인 재능을 가진 작곡가 중 하나가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이다.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아들로 바흐 헨델과 같은 해에 태어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1738년에 출판된 <에쎄르치 연습곡-Esserzi-연습곡, exercises or diversions> 하프시코드 소나타 제 1권이 나오기 전까지는 후세에까지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 작품을 한 작품도 쓰지못했다. 그는 1720-1721년에 포루투갈 왕정에서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의 제자였던 포루투갈의 공주가 1729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왕자와 결혼하게 되자 스카를라티는 그녀를 따라 마드리드로 가게되고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스페인 궁정에 재직했다. 그의 소나타 555곡 대부분은 그 곳에서 작곡되었다. 스카를라티 소나타는 모두 조성관계를 통하여 구성된 무곡과 그밖의 다른 형태의 악곡에서 사용되어지는 바로크 후기와 고전주의 초기의 표준적인 두 도막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두 개의 부분은 각각 반복되는데 제1부분은 딸림조나 관계장조(대부분)에서 종지하고 제2부분은 보다 먼 조로 조바꿈했다가 다시 으뜸조로 돌아온다. 18세기의 기악곡과 독창 성악곡의 형식은 그 대부분이 이 기본적인 도식에 바탕을 두고있다.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에서는 제1부분의 종지 부분이 제2부분의 마지막에서 으뜸조로 반드시 재현된다. 1745년 이후에 작곡된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대부분은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런 쌍(2)은 사실상 2개의 악장으로 된 하나의 소나타로서 항상 동일한 조(하나는 장조, 다른 하나는 단조의 경우가 있지만)로 되어있으며 때로는 비슷하면서도 대조되는 분위기를 갖는다. 2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소나타가 알베르티와 그의 많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되긴 했지만 그들이 스카를라티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스카를라티가 자신의 건반악기 어법을 어떤 모델없이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몇몇 작곡가들을 제외하면 그이 뒤를 따르는 후계자도 없었다. 1738년에 쓴 '연습곡'과 이 밖의 몇몇 소나타는 18세기 영국에 알려져 높이 평가를 받았으나 프랑스에서는 스카를라티의 음악이 거의 알려져있지 않았고 특히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전혀 알려져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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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menici Scarlatti:Motive from Sonata in D K.119 ●

 

 

                       ■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 소나타 D장조 K.119 ■

 

K.119. 혹은 Longo 415.로 분류되는 1749년 경에 작곡된 단 악장 소나타는 이 장르의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 소나타는 각각 반복되는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반부는 105마디 후반부는 111마디로 되어있다. 6마디에 걸쳐 D장조 화음으로 된 화려한 제시부가 나온 후에 여러 악상이 제시되고 각 악장은 반복된다. 초기 고전주의 음악의 특징이기도한 이러한 반복은 코믹 오페라에서 여러 악구를 반복하고 그림으로써 기지가 넘치는 교묘한 대사를 최대한 활용하는 관습에서 유래한듯하다. 이러한 반복은 스카를라티의 소나타에서도 비슷한 기능을 지니는데 이러한 매력적인 악장의 상당수가 재현되지 않으며 최초 반복이 이 악상들을 좀 더 잘 감상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악상이 비슷한 중요성이나 어떤 기능을 갖지는 않는다. 두 옥타브에 걸쳐있는 분산화음 동기인 제1악상은 도입부의 역할을 하지만 이 악상의 단편적인 부분은 소나타의 전 - 후반부의 각각을 종결시키기 위한 또 다른 악상(예 13.l-e)에 포개어져있다. 그리고 대담한 주제가 곧바로 반복되거나 결코 되돌아오지는 않는다.(예 13.1-a) 제3악상(예 1-b)은 순수하게 종지적이며 제4악상(예 13.1-e)은  케스터네츠의 리듬과 효과를 모방하며 여기에서는 조바꿈의 기능을 갖지만 소나타의 전 - 후반부를 종결시키고자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그 후에 딸림단조로 된 중심 악상(예 13.1-d)이 나온다. 이 악상은 손가락에 따라 아무렇게나 치는 개방현처럼 거의 지속적으로 a소리를 내는 스페인 기타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작품 전체를 통해 가장 많이 발전되고 또 후반부에서 한 음을 제외하고는 그 조의 모든 음들이 같이 연주하는 기타풍 화음들이 거대한 음군(cluster)이 될 때까지 힘을 축적시켜 강렬한 절정에 이르는것이 바로 이 주제 요소이다.(예 13.1-e) 그 다음에 스카를라티는 전반부를 딸림종지로 인도했던 종결부 음악을 다시 나오도록 하는데 여기에서 이것은 후반부를 으뜸조로 이끌어간다. 이 같은 소나타곡들에서 스카를라티는 자신의 주변 세계의 소리와 인상(풍경)을 받아들여 이를 변형시켰다. 이런 연유로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단어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모호함의 의미는 없다. 18세기 중기와 후기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을 많이 작곡했지만 그 가치에 비하여 널리 알려져있는 것은 미미히다. C.P.E. Bach와 그 밖의 다른 독일 작곡가의 그것 만큼 음악적으로 덜 친숙하다는 의미로 다소 과소 평가되는 경향인 듯 하다. 이탈리아 작곡고가와 독일 작곡가들은 18세기의 건반악기용 소나타에 갖가자 형태의 형식을 시도하는 점에서는 다같이 의욕적이었다. 그중의 몇 가지는 바로크 후기의 콘체르토 그로소와 관련이 있으며 바로크 시대 모음곡의 무곡형식과 관련된것도 있다. 어떤 악곡형태라도 당 세기 중반 이후까지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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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나타 :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고전 소나타(교향곡과 대부분의 실내음악도 마찬가지)는 분위기와 템포가 대조를 이루는 3개 혹은 4개(2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악곡이다.하인리히 크리스토퍼 코흐(Heinrich Christoph Koch 1749-1816)는 그의 작곡입문-Versuch einer Anleitung zur Composition 1787)에서 지금은 소나타형식(sonata form),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sonata allegro form), 혹은 1악장 형식(first-movement form)으로 알려져있는 첫악장의 형식을 각각 반복이 가능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형식으로 규정했다. 전반부는 하나의 중심되는 악절(period)을 갖고 후반부는 2개의 악절을 갖는다. 첫번째 주 악절에서 주조는 딸림조(단조의 경우는 관계조)오 전조할 때까지 우세하며 딸림조로 전조한 후엔 새로운 조의 으뜸음에서 휴지부를 갖게된다. 첫 악절의 나머지 부분은 새로운 조로 도어있다. 두번째 악절은 종종 제1주제가 딸림조로 시작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또 다른 악상이나 조로 시작하기도 하며 또한 또 다른 선율악상에 의해 으뜸조로 다시 전조되어 온다. 마지막 악절은 흔히 그 악장의 조에서 제1주제로 시작한다. 첫 악절에서의 선율 악상이 다시 나오는데 종종 버금딸림조로 이동한다. 이 때 버금따림조로 종지하는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딸림조 내지는 관계조로 되어있던 첫 악절의 종결부는 이제 으뜸조로 반복된다. 교향곡들에서는 다양한 선율 부분들이 강력하고 힘이 넘치는 성격을 띠고 보다 확장되고 흐르는듯한 경향을 지니며 지각할수있는 악구의 끝과 종지가 더 적다. 반면에 소나타에서는 정교한 감정의 뉘앙스 보다 자주있는 악구의 마침, 그리고 보다 발전된 선율이 개인적 표현욕구의 징후가 되어준다. 소나타 - 알레그로에 대한 코흐의 견해가 당연히 소나타 형식의 교과서적 정의와 일치하진 않지만 그것을 배제하지 않을 만큼은 유연하다. 그가 글을 쓴것은 1770년대로 그 때는 현재 인정되고있는 기준들을 공식화했던 1830년대의 이론가들과 분석가들이 생각했던 만큼 그 형식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들은 또한 악장을 세부분으로 나누고있다. (1)제시부(반복형이 일반적)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으뜸조에 의한 제1주제 혹은 주제군, 그리고 흔히 종지적인 딸림조나 관계장조의 종결주제 - 각기 다른 주제들은 적절한 경과구나 연결부에 의해 연결된다. (2)전개부에서는 제시부의 동기나 주제들의 새로운 양상과 조합을 이루며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비교적 먼 조로의 조바꿈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3)재현부에서는 제시부의 소재가 원래의 순서대로 나타나는데 단 모든 주제들이 으뜸조로 재 등장한다. 재현부의 뒤를 이어 코다가 올수도있다. 이러한 소나타 형식의 윤곽은 소나타 형식이 지니는 조성체계와 선율적 - 주제적 요소들에만 특별히 중점을 둔 추상적인 개념이다. 위와 같이 이해할때 이 정의는 고전주의시대 후기와 19세기에 작곡된 훌륭한 많은 소나타 악장들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오직 어색하게 들어맞을 뿐인 작품들(대부분의 하이든 작품을 포함해서)이 더 많이있다. 예를들어 형식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주제'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제 그 자체는 항상 명확한 윤곽을 갖는 선율이 아니다. '제2주제'가 없을수도 있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격에 있어 '제1주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수 도있다. 또한 새로운 주제는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다. 전개부는 코다를 포함해서 악장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 혹은 코다가 없을 수도 있다.

 

 

                             ■ 초기 고전주의 교향곡과 실내음악 ■

 

초기 고전주의 교향곡과 실내음악 : 18세기초 건반악기용 소나타와 비슷한 형식의 관현악곡은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신포니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은 1700년경 빠르게-느리게-빠르게 순서를 지닌 3악장 구조 즉, 알레그로, 짧은 서정적 안단테, 그리고 미뉴에트 또는 지그와 같이 무곡의 리듬을 가진 피날레등의 3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서곡은 뒤따르는 오페라와 어떤 음악적 연관성도 갖지 않았던 만큼 연주회에서 독립된 악곡으로 연주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1730년경에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오페라 서곡의 일반적인 구성을 이용하여 연주회용 교향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이들중 가장 초기의 것들은 구성, 구조 그리고 주제 양식등의 세부적인면에 있어서는 바로크 후기의 콘체르토와 트리오 소나타의 전통을 거의 같은 비중으로 따르고있다. 이 장르로 된 초기 작품중 하나가 밀라노의 사마르티니(G.B. Samamrtini 1701-75)가 작곡한 F장조 교향곡(1744)으로 두개의 바이올린 비올라 베이스를 위해 작곡된 프레스토 - 안단테 - 알레그로 - 아사이 3악장으로 구성되어있다.

 

● 조바니 바티스타 사마르티니(Giovanni Barttista Sammartini):Symphony No.32 in F. mouvement1. ●

 

이 프레스토는 개시부의 으뜸조와 종결부의 딸림조를 완전히 재현하는 두도막 형식으로 되어있다. 제2주제는 없으나 짧은 종결부를 준비하는 부속화음(dominant of dominant)으로 된 종지로 이끌어가는 경과구가 버금딸림조로 향하는 악구에 의해 흉내내어진다. 다른 면에서는 정적인 순간에 전진적인 움직임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기법은 이후의 고전주의 작곡가들이 자주 채택한 방법이었다. 사마르티니 외에 교향곡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을 쓴 일련의 이탈리아 작곡가들로 오페라 작곡가인 리날도 디 카푸아(Rinaldo di Capia 1710-80), 발다사례 갈루피(Baldssare Galuppi 1706-85), 그리고 니콜로 욤멜리(Nicolo Jommeli 1714-74)등이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작곡가들은 곧 이탈리아 작곡가 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에 1740년경부터는 점차로 교향곡이 콘체르토 대신 합주 기악음악의 주도적인 형식이 되었다.

 

                              ■ 감정과다 양식(Emfindsamkeit) ■

 

감정과다 양식 : 18세기 중기에 들어 기악음악에 감정과다 양식(Emfindsamer stil)이 도입된것이 전적으로 독일 작곡가들의 공뿐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J.S. Bach의 두 아들이 이 점에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된다.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Willhelm Friedeman Bach 1710-84)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였지만 성공적인 음악 경력을 위해 당시에 요구되었던 적응하지 못한 탓에 실의와 가난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중 일부는 그의 위대한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대 바흐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양식으로 되어있고 어떤 작품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갈랑양식을 따르고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서 가장 뛰어난 특징은 화성 선율 그리고 리듬의 세부적인 면에서 보이는 일종의 자유로움, 심지어 변덕스럽기까지 한 점이다 분위기의 돌연한 대조,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극도로 개인적인 거의 낭만적인 정서는 19세기를 예감하고있다. 빌헬름프리데만 바흐와 비슷한 기질의 요한 쇼베르트(Johan Schobert 1720-67)는 18세기 중엽 파리에 거주했던 많은 독일의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이다. 쇼베르트는 건반음악에 관현악을 도입시킨 사람으로 믿어지고 있는데 이 기법은 후대 작곡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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