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전기바로크(1)

미뉴엣♡ 2015. 7. 11. 06:02
♡ Early Baroque(I) ♡    2009/08/2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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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an Miro - Personage et Oiseaux ●

            

 

 

                             ●★ 바로크 시대의 일반적 특징 ★●

 

  

                                                  ■ 초기 바로크를 중심으로 ■


  1750년경 많은 여행경험이 있는 [프레시당 샤를 드 브로스(President Charles de Brosses)] 는 로마에 있는 '팜 필리 궁'의 정면이 건축물 보다는 식기에 더 적합한 섬세한 장식으로 고쳐진것을 보고 불만을 표시하였다. 현란한 언어를 즐겨썼던 그는 이것을 바로크라 불렀다. 그래서 19세기말과 20세기 예술사가들이 이 용어를 예술과 건축의 전 시기의 특징을 포괄하는것으로 사용한 이 단어가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브로스 이전에도 이 용어는 예술비평에 도입되어 쓰였는데 익명의 음악비평가가 1733년에 초연된 라모의《Hippolyte et Aricie》의 음악을 '바 로 크'라 불렀다. 여기서 그는 전조, 반복, 박자 변화에 있어서 소란스럽고 비선율적이고 변덕스럽고 터무니 없다고 했다.

 

'바로크'라는 용어가 18세기 음악 비평에서는 다소 경멸적으로 쓰였지만 19세기에 야코프 브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와 칼 베데커(karl Baedeker)의 예술비평을 통해 17세기 회화와 건축의 현란하고 장식적이고 표현적인 경향을 의미하는 다소 나은 일반적인 의미를 얻게되었다. 이 용어는 예술 비평으로부터 1920년대에 음악사에 도로 전해졌다. 오늘날 예술사가들이 '바로크'라 부르는것은 대략 16세기 말부터 1750년경까지의 시기를 지칭한다. 이 용어는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 같은 시대에 전형적이었다고 여겨지던 음악양식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쓰였다. 그러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데 이 용어를 사용하는것은 시대를 지칭하는것보다 적절하지않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너무나 다양한 많은 양식들이 한 용어로 포용해 낼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바로크라는 용어가 양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 시대 전체의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문화를 환기시켜주므로 시대를 지칭하는 것으로서는 유용하다. 다른 시대 구분들이 그러하듯 바로크 시대 또한 그 경계가 불확실한데 바로크 음악이 지니는 많은 특징들이 1600년 이전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또 많은 것이 1730년 이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를 음악적 소재를 구성하는 특정한 방법과 음악적 음향에 대한 특정한 관념, 그리고 그 시작은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었지만 일관성있게 특정한 관습들을 받아들이는 작곡 방법으로까지 발전시킨 특정한 종류의 음악적 표현들의 대략적인 한계로서 이해하는 것은 편리하며 또 가능한 방법일것이다. 그런데 바로크 음악의 특징이란 어떠한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음악과 그것이 태어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1600년부터 1750년까지의 음악을 가리켜 '바로크'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것은 이 음악의 특성이 몇 가지 점에서 동시대의 건축과 회화, 문학 혹은 과학이나 철학과 비슷하다고 보는 역사가들의 견해를 암시해주고 있다. 그것은 17세기만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서도 음악과 인간의 다른 창조적인 활동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말할수있다. 어떤 시대에 생겨난 음악일지라도 동시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되고있는 것과 같은 개념의 경향을 음악만의 고유한 특성에 적합한 방법으로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순수하게 음악적인 특징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명칭 '바로크'나 '고딕' '로맨틱' 같은 일반적인 용어가 음악사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말들은 잘못 생각(이해)되기 쉬운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불규칙적인 형태의 진주' 라는 뜻을 가진 포루투갈어에서 유래하는 '바로크'는 오랫돈안 변태적인, 기괴한, 과장된, 천박한, 괴상한 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이 단어는 아직까지도 이런 식으로 사전상에 정의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미중에 적어도 몇 가지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600년과 1750년 사이에 작곡된 음악을 전체적으로 다른 어떤시대의 음악과 비교하더라도 더 기괴하다거나 더 환상적 혹은 변칙적이라 할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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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적 문화적 배경 ■

 

 이시기의 음악적 사고는 이탈리아적인 마음가짐에 의해 지배되었다. 16세기 중기부터 18세기 중기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유럽음악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국가)였다. 국가라기 보다는 지방이라고 해야 적당할것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반도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교황령및 여섯개의작은 독립국가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은 독립국가들은 때때로 유럽의 더 큰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 있으면서도 상호간에는 서로 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병이 예술의 건강함까지 해치는것 같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던 베네치아가 음악적으로는 17세기 내내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18세기엔 나폴리가 그러했다. 로마는 종교적인 음악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17세기의 얼마 동안은 오페라와 칸타타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피렌체는 17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로크시대의 다른 유럽국가를 살펴보면 1630년대의 프랑스는 100년 넘게 받아온 이탈리아 영향에 반발하는 민족적인 음악 양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16세기에 이미 악화된 음악문화가 30년 전쟁의 전화로 말미암아 더욱 쇠퇴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분열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들에서는 강력한 재흥이 일어났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 시대의 영광이 시민 전쟁과 공화정치(1642-60)로 점점 시들어갔다. 당세기 말경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부활의 기미가 엿보였으나 그 후로는 이탈리아 양식으로 거의 완전히 흡수되고 말았다. 바로크시대 동안 이탈리아의 음악적 지배가 절대적인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독자적이고 민족적인 어법을 발전시켜서 유지해온 여러나라에서도 이탈리아의 영향을 피할수는 없었다. 이런 현상은 17세기 전반기 내내 프랑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660년 이후 프랑스의 민족적 양식을 확립하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는 이탈리아 태생이었다. 당세기 후기 독일에서의 이탈리아 양식은 독일 작곡가들을 뒷받침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바흐의 에술까지도 이탈리아 양식의 힘을 많이 입었으며 헨델의 작품도 독일적인 만큼이나 이탈리아적이었다. 실제로 바로크시대 말기에 유럽음악은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하나의 국제 언어가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식민지화 되었던 1600년부터 1750년에 이르는 기간은 유럽에있어서 절대 정치의 시대였다. 유럽의 많은 궁중들이 음악문화의 중심지가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프랑스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궁중이었는데 이것은 17세기 후기와 18세기 초기에 그 보다 작은 궁중들이 건립되는 본보기가 되었다. 이밖의 음악 후원자들 중에는 교황, 황제, 영국과 스페인의 국왕 그리고 이탈리아와 독일의 소국가 영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베네치아나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들과 같은 도시국가들도 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 간에 음악 기관들을 지지하고 조정하였다. 물론 교회도 음악을 후원하였으나 바로크 시대에 있어서 음악에 대한 교회의 역할은 그 이전 시대보다는 덜 중요하였다. 귀족이나 시만 혹은 교회의 후원과 함께 여러 도시에서 개인들로 구성된 '아카데미'가 음악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것 같이 입장료를 받고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상업적인 연주회는 드물었다. 이러한 연주회는 1672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후 1722년과 1725년 각각 독일과 프랑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18세기 중기가 지나서야 널리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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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y Twombly b - The Four Seasons:Summer 1994 ●

 

 

                                                           ■ 문학과 예술 ■ 

 

 바로크 시대에는 음악과 함께 문학과 이밖의 다른 예술도 꽃을 피웠다. 서양 문화사에서 이 시대의 장려함을 이해하려면 17세기에 활동했던 몇 명의 위대한 저작가와 예술가들의 이름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듯하다. 영국에는 존 던(John Donne)과 밀턴,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 그리고 프랑스에는 코르네이유와 라신, 몰리에르가 있었다. 음악적으로 비교적 잠잠하던 네덜란드에서는 루벤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거의 이들만큼 유명했던 다른 많은 예술가들이 미술작품을 내놓았다. 다소 고립되어있고 또 음악적인 면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스페인은 벨라스케즈와 무리요의 작품이 큰 자랑거리였으며 이탈리아에는 조각가인 베르니니《성녀 테레사의 황홀경 1647》건축가인 보로미니《로마의 성 이보성당 1645》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17세기에는 철학과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시기의 하나였다. 철학에 있어서 베이컨과 데카르트, 그리고 라이프니츠, 과학에 있어서 갈릴레오와 케플러, 뉴턴 그리고 그 중요성에있어서 두지지않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업적은 현대사상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로부터 2세기와 1/4세기가 지나 오늘에 이르는 동안 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누려왔던 지적인 삶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모자람이 없는 묘사를 하자면 그들은 17세기 천재성이 제공한 축적된 사상의 자본 위에서 살아왔다고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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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니니 - 아빌라의 성녀(Avila) - 테레사의 황홀경 ●

 

 

 

                                       ■ 새로운 음악사조 ■

 

사상이 이렇듯 근본적으로 동요되던 세계에서는 음악어법 역시 그대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마치 17세기 철학자들이 세계에 관한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보다 충실한 다른 이론적 해석을 확립하고 있었듯이 동시대의 음악가들은 감정의 새로운 영역과 이에 대처할 수 있는 확장된 어법을 추구하였다. 또 철학자들이 처음에는 낡은 방법의 토대 안에서 새로운 이념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듯이 음악가들도 감정의 영역을 더 넓히고 그 내용을 보다 강렬하게 하기위해 우선은 르네상스로부터 물려받은 음악형식에 더욱 감동적인 자극을 불어넣으려하였다. 이러한 점은 제수알도의 마드리갈이나 조반니 가브리엘의 모테트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전반기의 많은(전부는 아닌) 음악에서는 의도와 형식 사이에 가로 놓여진 어떤 불일치를 느낄수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실험적인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가서는 화성과 음색, 그리고 형식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확고한 어휘와 문법 및 문장 구조법을 갖춘 하나의 공통 언어로서 작곡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진행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 두가지 작법 ■

 

계속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음악적 특징들은 바로크 시대 내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여러가지 작곡양식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한 구분이었다. 이 구분이라는 것은 하나의 공통적인 양식 안에서의 개별적인 어법의 다양성을 말하는것은 아니었다.. 또 16세기에 있었던 것과 같이 보다 단순한 작품과 보다 복잡한 작품 유형사이- 예를들면 한편으로는 프토롤라와 발레토 다른 한편으로는 마드리갈 - 에 존재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인정되고 있던 오래된것과 새로운 작법상 즉 광범위한 기능적 범주간의 차이점이었다. 몬테베르디는 1605년에 '프리마 프라티카(prima pratica)'와 '세콘다 프라티카(seconda pratica)'혹은 제1 작법과 제 2작법 사이를 구분하였다. 그가 '프리마 프라티카'라 부르는것은 빌라르트의 작품에 나타나며 자를리노의 이론서에 집성되어 있는 다성 성악양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세콘다 프라티카'는 로레, 마렌치오, 몬테베르디 자신과 같이 새로운 생각을 가진 이탈리아인들의 양식을 뜻한다. 몬테베르디에 있어서 이 구분의 기초가 된것은 제1 작법에서는 음악이 가사를 지배하고 제2 작법에서는 가사가 음악을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낡은 규칙들은 새로운 양식안에서 수정되어야 했으며 특히 음악이 가사의 감정표현에 적합하도록 하기위해 불협화음이 더욱 자유롭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두 작법을 스틸레 안티코(stile antico 구양식) 스틸레 모데르노(stile moderno 신양식) 혹은 스틸루스 그라비스(stylus gravis 간결한 양식)와 스틸루스 룩스리안스(stylus luxurians 장식적이고 화려한 양식)이라불렀다. 좀 더 복잡하고 포괄적인 양식 분류의 체계들은 17세기 중기에 나타났다. 그 중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에클레지아스티쿠스(ecclesiasticus 교회)양식과 쿠비쿨라리스(cubicularis 방 혹은 연주회) 그리고 테이트랄리스(theatralis) 혹은 세니쿠스(scenicus 극장)양식의 광범위한 세부분으로 나누는것이었다. 이러한 범주 안에 혹은 그것들을 포함하는 여러가지 세분법들이 있었다. 이론가들은 그당시의 강한 경향에 따라 그것들을 기술하고 체계화 하려고 노력했는데 모든 음악양식은 각각 별개의 것으로 그것만의 특별한 사회적 기능과  기교적 특징을 지닌다고 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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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llower Dancers(Joy) - Unknowned ●

 

 

 

                                        ■ 관용적인 서법 ■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그 이전 시대의 작곡 방식이었던 성악이나 기악 혹은 성악과 기악의 거의 모든 어떤조합으로도 연주되는 음악 보다는 오히려 바이올린이나 독창같은 특정한 매개체를 위하여 음악을 쓰는데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선 바이올린 족이 옛 비올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작곡가들은 관용적인 바이올린 양식을
발전시켰다. 한편 프랑스 작곡가들은 비올을 선택하였는데 '비올'은 17세기 후반의 수십년 동안 프랑스에서 가장 선호되던 현악기가 되었다 또 관악기들이 기술적으로 개량되었으며 그 독특한 음색과 음질 때문에 자주 쓰이게 되었다. 건반악기를 위한 관용적인 양식이 계속 발전해나갔으며 음악의 강약을 표시하는 기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명한 교사들과 대연주자들에 의하여 노래의 기교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기악양식과 성악양식이 구분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작곡가들이 기악 작법에 의식적으로 성악 어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그 반대로 사용하기도 할만큼 그 구분이 명확하게 되었다.

 

 

                                        ■ 감정(emotion) ■

 

바로크가 모든 작곡가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그들이 음악을 통하여 아주 생생하고 열정적으로 관념과 감정의 넓은 영역을 표현하거나 묘사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어떤 의미에서 '무지카 레세르바타'의 이념을 확대시킨것이었다. 작곡가들은 16세기 후기 마드리갈에서 이미 드러난 특정경향을 지속시키면서 분노 흥분 웅대함 장렬함 존귀함 묵상 경이 혹은 신비스러운 영혼의 상태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적인 표현을 찾아내는 일과 또한 격렬한 대조를 이용하여 이러한 음악적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므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예술가 개인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감정을 재현하기 위하여 작곡된 것이었다. 이러한 감정들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 즉 음형의 어휘들이 점차적으로 생겨났다. 1600년 초에 일부 음악이론가들은 이것의 용도를 분류하고 체계화시켰으나 이것은 실제 경우들을 모아 그에 따라 이루어진 작업이다. 특히 독일 이론가들은 수사학적 비유나 파격적인 개념을 빌어 이것들을 논의하고 분류했다. 음악 작곡과정은 수사학의 규칙에 비유하여 세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인벤치오(invetio:주제 혹은 음악적인 기본 아이디어의 '발견')와 디스포지치오(dispositio:부분이나 소제목의 설계나 배치) 그리고 엘라보라치오(elaboratio:소제의 세부 마무리 혹은 공들여 다듬기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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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nri Matisse - la Danseuse Creole ●

 

 

                                        ■ 리듬(Rythm) ■

 

다양한 양식과 관용서법은 대상과 관념, 그리고 감정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노력과 함께 다소 상 반 되는 요소들을 음악에 도입하였다. 어떠한 예술 작품에나 항상 잠재해 있는 표현의 자유와 작곡상 규율 사이의 긴장은 바로크 음악들에 의해 표현되었으며 의식적으로 탐구되었다. 이러한 긴장은 몬테베르디의 두 가지 작법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그것은 (1) 마디줄을 써서 규칙적으로 나누어진 리듬과 (2) 레시터티브나 즉흥적인 독주 기악 작품에서 사용되는것으로 박절이 없는 자유로운 리듬이다.. 규칙적인 무용곡의 리듬은 르네상스에서도 알려져있었다. 그러나대부분의 음악은 17세기가 진난후에야 '마디' - 강박과 약뱍의 분명한 형태-에 맞추어 작곡되고 감상되었다. 처음엔 이러한 박자의 형태가 일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마디줄에 의해 구분되며 화성과 악센트 패턴의 규칙적인 연속에 상응하는 단일박자 기호는 1650년경 이후에야 비로소 널리 쓰이게 되었다. 바로크 작곡가들은 엄격하게 박자가 정해진 리듬과 함께 불규칙적이며 일정치않고 유동적인 리듬도 기악 토카타와 성악 레시터티브를 작곡할 때 사용하였다. 이 두 가지 리듬은 동시에 사용될 수는 없었지만 '토카타와 후카' 혹은 '레시터티브와 아리아'가 관습적으로 한 조를 이루듯 의도적인 대조를 위해 연속적으로 사용되는 예가 자주있었다.

 

 

                              ■ 바소콘티누오(bassocontinuo) ■

 

르네상스에서 이상으로 하였던 기본적인 음향은 독립된 성부로 이루어진 다성음악이었다. 한편 음향에 대한 바로크의 이상은 거슬리지 않는 화성에 의해 함께 결합되는 확고한 저음과 화려한 상성부였다. 반주 성부들의 지지를 받으며 단선율로 이루어지는 음악 구조에 대한 생각은 그 자체가 새로운것은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14세기 칸틸레나 양식과 부르고뉴 악파의 샹송, 그리고 초기의 프로톨라, 16세기의 류트노래,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에어'에 사용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새로운 점은 베이스를 강조하는것, 구조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두 선율인 베이스와상성부를 분리시키는것 그리고 내성부의 선율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무관심한 태도는 바로크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통주저음' 또는 '바소콘티누오'라 불리우던 기보법의 체게에 모두 나타나 있다. 즉 작곡가는 상성부와 베이스를 작곡하였다. 베이스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통주악기(클라비어, 오르간, 류트)로 연주되며 대개 베이스 감바(bass gamba)나 첼로 혹은 바순과 같이 지속음을 낼수있는 악기의 지원을 받았다.. 건반악기 주자나 류트 주자는 베이스 성부의 음 뒤에 필요한 화음을 채워넣었는데 이 화음은 별도로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음들이 근음 위치의 일반적인 3화음 이외의 것이거나 계류음과 같은 비화성음이거나 또는 추가된 임시음이 연주되어야 한다면 작곡가는 '베이스 성부'의 음표 위나 아래에 작은 숫자나 기호를 기입하여 그것을 지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숫자 붙은 베이스의 실현' - 실제 연주 - 은 악곡의 성격과 작곡가가 설정해 놓은 기본 골격 안에서 즉흥적으로 연주하는데 많은 재량권을 가진 연주자의 기호 및 숙련도에 따라 변하였다. 다시 말해서 연주자는 단순한 화성을 연주하거나 경과음들을 넣거나 아니면 상성부나 베이스 성부를 모방하여 선율적인 동기를 혼합시킬 수도 있었을것이다.(베이스 숫자가 붙어있는 악곡의 현대판 악보에서 편집자는 대개 적당한 음이라고 생각되는것을 조금 작은 음표로 표시한다.. 카치니 작품의 영인본 NAWM 66에 제시되어 있는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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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치니 - 마드리갈(Perfididissimo volto) 악보 ●

 


이 통주저음의 실현이 항상 긴요한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충실항 화성을 내기 위한 모든 음표들이 이미 기보된 성악 선율이나 기악 선율에 제시되어 있다하더라도 많은 악곡들이 '통주저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4셩부나 5성부 모테트 혹은 마드리갈에서 통주악기는 실질적으로 여러성부를 중복하거나 지시하는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창이나 이중창에 있어서는 보다 충실한 음향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화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대체로 통주저음이 필요했다. 이러한 채워넣기는 때때로 리피에노(ripieno) : 즉 요리에서 속을 채우는 것이라는 뜻의 용어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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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대위법 ■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은 16세기와 그 이전에 작곡된 대위법적 작곡 기법을 완전히 배제한것 같이 생각될것이다.
사실상 통주저음이 독창의 반주로만 사용되며 작곡가가 베이스 선율 자체에 어떤 선율적인 의미를 주려고하지 않는 한 이것은 이것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통주저음은 그 이전의 모든 작곡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고한 베이스와 화려한 상성부가 바로크 시대의 유일한 음악구조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랫동안 작곡가들은(이따끔 통주저음을 첨가시킴으로서 현행 관습에 맞추기는 했지만) 무반주 모테트와 마드리갈을 계속 작곡해 왔다. 그러나 건반악기와 류트의 모든 독주곡 뿐 아니라 몇몇 기악합주곡들에는 통주저음을 이용하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통주저음이 사용된 합주곡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위법은 여전히 작곡의 기초였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새로운 대위법이 점점 옛 방식을 대신하게 되었다. 과거의 대위법과는 달랐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선율선들이 섞여있었다. 이제 모든 선율선은 통주저음으로 제시되거나 숫자에 의해 명백히 일련의 화성진행의 기본골격과 들어맞아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화성의 지배를 받는 대위법으로서 그 개별적인 선율은 화성의 연속에 종속되어 있었다.

 

 

 

                                    ■ 불협화음과 반음계주의 ■

 

 

이렇게 한정된 화성적 배경안에서 작곡가들은 불협화음을 단순히 두 성부 사이의 음정 간격으로 인식한것이 아니라
화음에 맞지 않는 개별음들로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순차적 경과음 외의 다른 불협화음 패턴들도 보다 쉽게 용납
되었다. 17세기 초에는 많은 패턴의 불협화음들이 장식적,실험적으로 시도되었다. 당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불협화음의 통제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졌다. 한 작품에서 조성적 방향을 명확히해주는 불협화음의 역할은 특히 코렐리와 17세기 말경의 다른작곡가들의 기악음악에서 아주 두드러졌다. 반음계주의도 이와 비슷하게 실험적인 형태로부터 규칙적인 체계 내에서의 자유로운 것으로 발전되었다. 17세기 초에 제수알도가 사용했던 반음계적인 화성은 선법의 범위를 존중함으로써 연결되어진 부분들의 느슷한 연속 안에서의 표현적인 일탈이었다. 17세기 내내 반음계는 프레스코발디나 프로베르거의 토카타와 같은 즉흥적인 악곡이나 극단적인 표현수단이가사에 음악을 붙일 때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작곡가들은 불협화음과 마찬가지로 반음계주의를 조성적 방향의 거시적 안목과 작품의 규모에 의해 조절되는 음악적 어휘 안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이 거시적 안목은 17 18 19세기 음악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장,단조의 조성체계이었다. 즉 악곡의 모든 화성은 으뜸음 상의 3화음과 연관되어 조직되었으며 이 으뜸화음은 그 딸림음과 버금딸림음상의 3화음에 의해 뒷받침 되었고 이것들에 종속되는 다른 화음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으뜸조의 우월함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른 조로의 일시적인 조바꿈도 허용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조성 조직은 르네상스의 음악 특히 16세기 후반에 작곡된 악곡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왔다. 라모의 화성론《Treatise on Harmony 1722》은 적어도 이 저서가 나오기 반세기 전부터 실제로 사용되어 왔던 체계의 이론적인 계통적 서술을 완성한 것이다. 중세기 선법 체계와 같이 장, 단조체계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음악의 실제를 통하여 발전해왔다. 4도나 5도의 근음의 진행, 종지적인 진행으로 향하는 부화음의 연속 그리고 가장 밀접한 조로의 조바꿈 등의 습관적이며 오랫동안 지속된 사용은 마침내 하나의 일관된 이론을 낳게되었다. 중세 초기의 몇가지 특징적 선율형을 계속해서 사용한 것과 선가분류의 필요성이 교회 선법의 이론을 이끌어내게 된것과 마찬가지로 17세기에 사용된 몇몇 특징적인 화성적 선율적 연속들은 장, 단조 조성에 관한 이론을 이끌어내었다. 통주저음은 이러한 이론의 발전 단계의 후반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것은 통주저음이 화성진행을 선율선의 기보법과 다른 기보법을 써서 독립시킴으로서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통주저음은 음악이 대위법에서 호모포니로 선적인 선율구조에서 수직화음적인 화성구조로 옮겨가기 위해 거치는 것과 같은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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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thony Morrow - Pink Rose ●

 

 

 

 

 

                                             ■ Girolamo Frescobaldi : T o c c a t a ■
                                         

 

                                                Mstislav Rostropovich(Cello 1927-)

                                         Herbert Tachezi(Organ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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