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양식의
근원(II) ★●
■ Carl Phillip
Emanuel Bach (1714-1788) ■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Carl Phillip Emanuel Bach 1714-88)는 그의세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중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한테서 음악수업을 받은 그는 1740년 부터 1768년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대제의
궁정에서 봉직했으며 그 후에는 함부르크의 5개 주요 교회를 총괄하는 악장이 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오라토리오, 가곡, 교향곡, 그리고
실내악곡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수가 많고 중요한것이 클라비어를 위한 작품들이다. 1742년 그는 6곡의 소나타를 묶어 출판하였으며(프러시안
소나타집), 1744년에는 또 다른 6곡의 소나타집(뷔르텐베르크 소나타집)을 출판하였다. 앞의 것은 양식면에서 매우 새로우며 후대 작곡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에마누엘 바흐가 즐겨 사용하던 건반악기는 하프시코드가 아닌 보다 부드럽고 친근감을 주는 클라비코드로 이 악기는 섬세한
강약의 차이를 표현해 낼수있었다. 클라비코드는 하프시코드와 함께 서서히 피아노 포르테로 교체되기 전인 18세기 중엽 무렵에 독일에서 다시 인기를
되찾게 되었다. 에마누엘 바흐의 마지막 5개의 소나타곡집(1780-87)은 프리데만 바흐의 많은 후기 건반악기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피아노
포르테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단순함이나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의 의미는 18세기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그 이상(理相)은 결코 장식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작곡가들은 적당한 범위 안에서 장식을 유지하고 악구의 악구의 전체적인 표현 내용안에 그것을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마누엘 바흐는 그의 기악작품에 음악적 대화 부분들과 레시터티브 풍의 악절을 도입하였다. 청중들은 그의 건반악기 즉흥 연주를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즉흥연주의 특성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의 환상곡에 어느정도 보존되어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J.S. 바흐의
환상곡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모차르트의 환상곡과 베토벤 소나타에 나오는 즉흥 악절을 예시해 준다. 에마누엘 바흐는 또한「올바른 건반악기 연주기법에
관한 시론 1753-62」으로 음악에 적잖이 공헌하였다. 이 저서는 장식에 관한 18세기 중기의 가장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로 콴츠의 플루트
주법에 관한 시론과 함께 당시의 음악사상과 실제에 관해 많은 것을 밝혀주고 있다. C.P.E. Bach와 그의 동시대인들의 감정과다 양식은 때로
갑작스런 화성변화, 뜻밖의 전조, 특이한 선율진행, 긴장된 휴지, 짜임새의 변화, 돌연한 스포르짠도, 악센트 등등의 사람을 놀라게하는 요소를
사용하였다. 감정과다(Emfinsamkeit)의 이러한 주관적 정서적 성격은 1760년대와 1770년대에 그 절정에 달했다. 이 양식은 때때로
깊은 같은 시기의 독일문학에 적용되는 '질풍노도(Sturm und Drang)'라는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후의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통해서 이러한 主情주의(emotionalism)를 극복하였다.
● Carl Phillip Emanuel Bach(1714-88)
●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가 대표적 인물의 하나였던 '감정과다(Emfindsamer stil)' 양식의
기법상 중요한 특색은 1779년에 출판된「전문가와 애호가를위한 소나타집-Sonaten fur Kenner und Liebhaber」4번째곡의
2악장 포코 아다지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선율적 탄식, 즉, 약박에서 해결되는 아포지아투라에서 끝나며 그 뒤에 휴지부가 따라
나오는 동기를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모든것은 모르덴트(mordent), 스카치 스냅(Scotch snap;강박의 짧은 음 뒤에
긴 음이 따르는 음형), 그리고 트릴 한 마디로 소위 갈랑테리(galanterie)로 장식된다.(예13.2) 신경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양한 리듬형들 - 짧은 부점 음형들, 셋잇단음표, 5잇단음표와 13잇단음표의 비대칭적인 음의 연속 - 은 음의 불안정하고 들뜬 특성를
부여한다. 관계장조 조성 영역으로 전조가 이루어지는 마디 6-10은 바흐양식의 전형이라고 할수있는 감상성(sentimentality)와
갈랑테리(galanterie)와의 결합을 보여준다. 반음계적 진행은 그것의 조성적 목표를 향해 섬세하게 시퀀스적인 반복을 추진해나가며 한편으로
비화성적인 음들, 특히 아포지아투라는 긴장과 흥분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해준다. 이런 식으로 장식은 유용하며 감정표현의 단순한 보조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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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Phillip Emanuel Bach:Sonata No.4 in A Wq. 55/4 ●
■ 독일의
교향곡 작곡가 ■
독일의 교향곡 작곡가 : 1740년이후 독일의 교향곡 작곡의 중심지는 만하임, 빈, 그리고
베를린이었다.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57) 지도 아래 만하임 교향악단은 그 고도의 기교(버니는 이것을 장군들로
이루어진 군대라고 불렀다), 이제까지 알려져있지 않던 가장 부드러운 'pp'에서 가장 강력한 'ff'에 이르는 폭녋은 강약법, 그리고 피를
끓게하는 크레센도의 음향으로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세기 중엽에 크레센도와 디미누엔도의 사용이 증가한 것은 점진적 변화를 통해 한
악장 내에서 다양함을 얻고자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였다. 이것은 훨씬 이전 음악의 고른 다이내믹과 콘체르토의 날카로운 대조에서
벗어나있었다. 하프시코드 대신 결국 피아노 포르테를 사용하게 된것도 마찬가지로 음악적 효과의 유연성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슈타미츠는 역동적이고
정력적인 개시부와 대조되는, 때로는 서정적이고 때로는 우아하거나 혹은 경쾌한 주제를 딸림조 부분에 도입한 최초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다.
1740년대의 빈은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 작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곳이다. 게오르그 마티아스
몬(Georg Matias Monn, 1717-50)은 최초의 빈악파 자곡가들 중 한 사람이었으나 보다 중요한 인물로 푹스의 제자인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바겐자일(Georg Christoph Wagenseil 1715-77)이었다. 그의 음악에는 그 보다 나중에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플로리안 레오폴드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 1729-74)과 미하엘 하이든(Michel Haydn 1737-1806)의
음악에서처럼 모차르트양식에서 중요한 특징이 되고있는 유쾌하고 전형적인 빈적인 서정성과 훌륭한 유머가 있다. 비악파의 자곡가들은 대부분 대립되는
주제군을 소나타형식의 악장들에서 즐겨 사용하였다.
■ 요한 안톤벤젤 슈타미츠:Sinfornia a 8 in Eb ■
(la melodia Germanica) : Allegro Assai
1750년대 중엽에 적곡된 이 교향곡의 제1악장 알레그로 아사이는 다소 호전적이고 분주한 으뜸조 부분
다음에 즐거운 위안을 제공하는 조용하고 우아한 제2주제를 갖는다. 제1주제군은 실제로 세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져있다. 제1요소는 육중한 화음과
유니즌이 특징적이고 제2요소는 특징적인 '한숨짓는'(sighing)'휴지 이후에 시작되는 듣기좋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동기이며 제3 요소에서는
호른의 신호 음형이 울린다. 딸림음조의 전조는 반음계적인 현의 트레몰로로 되어있는 4마디에 걸쳐 'p'에서 'ff'까지가는 그 유명한 만하임
크레센도를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안단테로 된 느린 악장 외에도 미뉴에트와 프레스티시모를 포함하고 있음으로해서 이 교향곡은 대부분의 하이든
교향곡에서 펴준이 되었던 4악장 구조를 이루고있다. 베를린 혹은 북독일 악파의 주요 교향곡
작곡가들은 그 자신이 작곡가이기도했던 프리드리히 대제 주변에 많이 모여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요한 고틀리프 그라운(Johann
Gottlieb Graun 1703 - 71)과 에마누엘 바흐를 들 수 있다. 교향곡 3악장 구조를 부단히 고집하고 한 악장 안에서 날카롭게
대조되는 주제를 도입하기를 꺼려한다는 점에서 북독일인들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다이내믹하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니며 신중하고 준
극적인 양식으로 주제를 발전시키는 기법을 개발하고 동시에 대위법적인 요소로 교향곡의 구조를 풍요롭게 한것은 주로 그들이었다.
■ J.C. Bach
: Concerto(콘체르토) ■
J.C 바흐의 콘체르토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 1735-82)는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가장 초기의 콘체르토 몇곡으로 런던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실내악과
건반음악 오페라 뿐만아니라 교향곡에서도 중요한 작곡가였다. 아버지와 형 에마누엘 바흐에게 음악수업을 받은 요한 크리스티안은 20세에 밀라노로
건너가 이론가, 교사이자 작곡가인 그 유명한 볼로냐의 지암 바티스타 마르티니(Giambattista Martini 1706-84)신부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760년에는 밀라노 대성당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로마 카톨릭에 귀의해 있었다.. 나폴리에서 2곡의 오페라가
성공적으로 공연된 후 그는 1762년에 런던에 가서 그 곳에서 작곡가, 연주자, 교사, 그리고 연주회 경영자로서 오랜 경험을 쌓았다.
작품1(1763)에서 작품13(1777)에 이르는 40여곡의 건반악기 콘체르토들로 커다란 성공을 이룬 곳, 런던이었다. 1770년경에 쓰여진
Op.7은《Sei concertiper il cembalo o piano e forte》라는 제목을 갖고있다. 제목에 피아노 포르테를 포함해
놓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 이유는 바흐가 공적인 연주를 위해서 그 악기를 채택한 최초의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런던에 체류중이던
1764-65년에 J.C.Bach를 만났으며 그의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그는 바흐의 건반악기 소나타 3곡을 콘체르토(K.107/21b)로
편곡했으며 1773년 최초의 독자적으로 완성한 피아노 콘체르토 K.175 D장조를 썼을때 그는 틀림없이 바흐의 모델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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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바이올린 - 2플루트 - 첼로 반주로 '콘체르토' 연주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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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Bach:Concerto for harpsicord(Piano) & ■
String in Eb. Op. 7 No.5 Allegro di
molto
이 콘체르토의 제1악장은 모차르트의 관심을 끌었던 이 당시의 콘체르토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많이
보여주고있다. 악장은 부드러운 개시부 주제가 경과부의 총주로 나아가는 관현악적인 제시부로 시작한다.(마디12) 그 다음으로 오케스트라는 경쾌하고
다소 종지적인 주제를 연주하고 그 뒤를 이어 종결 총주가 나오는데 이 모두는 으뜸조로 되어있다(마디 24-34) 이따금 오케스트라가
합류하기도하는 독주자는 이제 소재를(마디 44-58) 반복한 후 일련의 빠른 음형들과 돈꾸밈음으로 경과부의 총주(마디 59-71)를 장식하고
딸림조에서 새로운 주제를 제2 주제로 소개한다.(마디 71) 관현악 제시부의 가벼운 종지적 주제(마디 25)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종결부의 동기로 사용되며(마디 85-105) 앞에 나왔던 종결 총주는 여기에 최종적인 구두점을 덧붙인다. (마디 106-114) 바흐는
여기에서 이런 악상들을 발전시키는 대신에 피아노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악상을 상이한 조성적 상황들을 거쳐나가도록 한다. 피아노가 주도하는
재현부(마디 146)는 제2주제를 생략하고 이미 친숙한 경과부 총주에서 직접 우아한 종결 주제로 진행한다(마디 171) 이것은 카덴차를 알리는
6/4화음에 도달하도록 세련되게 확장된것으로(마디 191), 카덴차가 끝난후 종결 총주는 정렬적으로 이 악장을 끝맺는다. 이 악장과 모차르트의
K.488사이의 유사성은 주목할 만 하다. 그러나 1770년경에 이르러서는 독주 콘체르토의 제1악장 형식의 주요 윤곽이 이어 잘 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그리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이 당시의 독주 콘체르토는 바로크 시기의
리토르넬로 구조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소나타의 특징인 조성과 주제적 소재의 대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진행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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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관현악곡 ■
프랑스의 관현악곡 : 18세기 중기에 접어들어 파리는 출판과 작곡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파리
출판업자의 출판물 속에서 종종 'symphonies periodiques' 혹은 '이 달의 교향곡들' 이라고 불리는 교향곡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나왔다. 그 곳에 모여든 많은 외국 작곡가들 중에는 사마르티니, 슈타미츠,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인 바겐자일과 이그나츠
홀츠바우어(Ignaz Holtzbauer 1711-83), 그리고 체코의 안톤 필츠(Anton Filtz 1730-60)가있었다. 벨기에의
프랑수아 조제프 고세크(Fransois Joseph Gossec 1734-1829)는 1751년에 파리에 와서 라모의 뒤를 이어 라
프플리니에르(La Poupliniere)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고세크는 1754년 그의 교향곡집을 처음으로 출판하였고 1759년에는 그의
첫 현악4중주 곡집을 출판하였다. 후에 그는 코믹오페라 작곡가로 전향하였으며 혁명 시기에는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중 한 사람으로 파리 콘서바토리의
첫번째 원장을 지낸바있다. 그의 작품중에서 특히 중요한것은 새로운 공화국의 공공의식을 위해 여러편의 행진곡과 칸타타로 그러한 작품중의 하나가
그의《비통 행진곡-Marche lugbre》이다 이곡은 낭시에서의 반란에 맞서서 새로운 체제를 수호한것을 기념하고자 1790년 9월 20일의
경축 행사용으로 씌여진것으로 1791년 4월4일 판테온까지 미라보의 시신을 운구하는 엄숙한(장례)행렬에도 사용되었다. 베토벤이 제3번
교향곡(Eroica-영웅)의 장송 행진곡을 작곡할때는 이와같은 작품들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과들로프(Guadelope)출신의 조제프 볼론 생 조르주(Joseph Boulogue saint-Georges 1739-99)는 합주
교향곡(symphonie concertanto) 즉, 보통의 오케스트라 외에 2개 내지 그 이상의 독주악기를 사용하는 교향악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합주 교향곡을 쓴 작곡가 중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탈리아인 조반니 주제페 캄비니(Giovanni Giuseppe
Cambini 1746-1825)도 포함되어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수많은 작곡가들 또한 이런 형태의 악곡들 작곡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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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악단(Symphony Orchestra) ■
교향악단 : 18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교향곡과 그 밖의 합주형식의 음악은 선율악기가 주요 성부들을
모두 맡음으로해서 점차적으로 통주저음을 사용하지않게 되었다. 당세기말에 이르러 하프시코드가 교향악단에서 마침내 사라지게 되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책임은 바이올린의 수석 주자가 맡게되었다. 18세기의 교향악단은 오늘날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작았다. 1756년 만하임 관현악단이
20개의 바이올린 그리고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가 각각 4개 플루트, 오보에, 바순이 각각 2개 호른이 4개 트럼펫이 1개 그리고 2개의
큰북으로 편성되었지만 이것은 예외적으로 규모가 큰 관현악단이었다. 현악기들은 현악기 오보에 2개 바순 2개 호른 2개 하프시코드 1개로
이루어져있고 경우에 따라서 트럼펫과 큰북이 추가되었던 1760년에서 1785년까지의 하이든 관현악단의 경우 연주자의 수가 25명을 넘는 예가
드물었다. 1790년대에 이르러서도 빈 교향악단은 보통 연주자 수가 35명을 넘는 예는 없었다. 이 시기의 일반적인 교향악 관현악법은 모든
주요한 음악적 소재를 현악기에 맡기고있으며 관악기는 성부의 중복이나 강화 또는 화성을 채우는데 주로 사용하였다. 때때로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들은
작곡가가 그것들을 위해 따로 성부를 마련해 놓지않는 경우에도 연주시 오케스트라에 추가될 수 있었다. 18세기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악기들 보다
중요하고 독립적인 음악을 맡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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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in de St Aubin(1736-1807)이 마련한 연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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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음악(Chamber Music) ■
실내음악 : 1770년대와 1780년대 실내악에는 클라비어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 바이올린은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악4중주가 주된 매체가 되었다. 실내악작곡가로 유명했던 사람은
주로 마드리드에서 활동했던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140여곡의 현악 5중주곡
100여곡의 현악4중주 그리고 63곡의 현악3중주곡이 있으며 그 외의 실내악과 관현악곡이 다수있다. 또 다른 형태의 음악으로 주로 야외나
비공식적인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빈풍의 세레나데가 있는데 이것은 디메르티멘토(divertimento), 카사치온(casation),
노투루노(notruno)와 마찬가지로 바로크의 관현악 모음곡과 고전파 교향곡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음악이었다. 이것은 5개나 그 이상의 악장들로
구성되는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악장중에는 무곡 리듬으로 되어있는것이 많고 배열순서에 있어서는 자유로웠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악기나 현악기만을 위해서
혹은 이들의 결합된 형태를 위해서 작곡되었으며 선율과 리듬에는 어느정도 대중적인 풍취가 들어있었다. 이 악곡들은 빈 고전주의 양식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 역사적으로 볼때 이 악곡들은 작곡가들로 하여금 통주저음이 없는 합주음악의 음향에 익숙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통주저음의 제거는 고전주의 현악4중주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하이든보다 앞선 작곡가로 프란츠 자베르 리히터(Franz
Xaver Richter,1709-89)는 진정한 현악4중주 양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4개의 현악 성부들의 독자성을 강화시키는데 이러한 경향은
대략 1757년 이전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판은 1768년 런던에서 작곡된 Op.5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디터스도로프(Karl Ditters von Dittersdorof 1739-99)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 무렵에 있었던 리히터의 현악4중주 연주에
디음과 같이 기술하고있다. "우리는 슈바이처가 받은 리히터의 새로운 6곡의 형악4중주곡에 몰두했다 그는 첼로를 난 제1바이올린, 내 형은
제2바이올린, 내 남동생은 비올라를 연주했다. 연주 도중에 우리는 값비싼 커피를 마셨고 커피알을 볶기 위해 가장 좋은 커피통을 불에 구웠다.
우리는 내내 아주 즐거웠다."
■ 프란츠 자베르
리히터:String Quartet in Bb Op.5 No.2 Fugato Presto ■
이 현악4중주의 제 4악장에서는 엄격한 후가가 소노타 형식과 융합되어있다. 대주제를 지닌 주제의
제시부가 제1으뜸조로 진행되고(마디 1-33) 이들 모두에서 이끌어낸 에피소드가 딸림조로의 경과구로 사용되며 푸가는 제2주제(마디 50) 즉,
비 후가적인 주제를 도입하고자 유니즌 종지에서 중단되어 버린다. 종결부는 종지형으로 통합되기 전에 잠시 푸가 양식이 되돌아온다.(마디
64-79) 전개부(마디 80-151)는 매우 대위법적이긴 하지만 엄격한 후가부분은 단지 몇 부분에만 나타날 뿐이다. 재현부(마디
151-75)는 제2주제로 시작해서 코다풍의 종결리 있을 경우에만 후가 주제로 돌아오는데(마디 175-92), 그곳에서는 2성부
스트레토(stretto)가 딸림조 페달 위에서 펼쳐진다. 현악4중주는 리히터의 이 훌륭한 작품으로 초기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 오페라 -
가곡 - 교회음악 ■
소나타와 교향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페라에 있어서도 18세기의 첫 4반세기에 새로운 장르와 양식이
생겨나서 서서히 그 이전 장르의 양식을 대신해 가고있었다. 이 시기지에는 프랑스 비극음악(French tregedie lyrique)이 변화에
저항하는 합창이었고 독일에서는 베네치아 오페라의 일반적인 양식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변화의 조류가 이탈이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18세기 유럽 무대를 지배하게 되었던 새로운 이탈리아 오페라는 계몽주의시대 다른 모든 음악장르를 변혁시키고있던 바로 그 힘의
산물이었다. 이것이 목표로 하는것은 간단 명료하고 자연에 충실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호서력을 가지며 청중들에게 불필요한 정신적 피로를 주지않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곧 인위적인 기교에 빠져 이로 인해 당세기 후반들어 평론가들에게 큰 비난을 받게되었지만 그것은
한편 지난시대의 한물간 전통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한 부산물이었을 따름이다.
■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 :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정가극)는 이탈리아의 시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 1698-1782)에 의하여 그 표준적인 형식이 완성되었다. 18세기의 그의 희곡은
작곡가들(모차르트를 포함)에 의해 수백 차레나 음악에 붙여졌다. 이러한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나 라틴 작가들이 써놓은 일련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한
줄거리로 인간적인 감정의 갈등을 묘사해 놓았으며 전통적인 한 쌍의 연인과 주변 인물들을 사용하였다. 18세기에 즐겨 사용했던 인물 '도량이 넓은
군주' 또한 매우 자주 등장하였다. 줄거리가 진행됨에 따라 전원이나 전장 엄숙한 의식장면 등 갖가지 장면들이 도입되며 극은 주역 중 영웅적인
행위나 숭고한 자기 희생을 함으로서 결말지어지곤 하였다. 극은 3막으로 되어있으며 거의 변화없는 레시타티브와 아리아가 교체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줄거리는 대화형식의 레시타티브로 전개되며 한편 각 아리아는 극적 독백이라 할수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때 앞 장면의 주역이 그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논평달거나 혹은 적절한 감정 표현을 하기도한다. 때에 따라서 이중창이 나타나곤햇지만 더 큰편성의 중창은 거의 없었으며
소수의 극히 단순한 합창만이 있었다. 서곡을 제외하면 관현악은 가수들의 반주 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못했다. 보통의 레시타티브는 음악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며 하프시코드와 지속 저음 악기만으로 반주되었다. 가장 중요한 극적 상황에서 사용되는 반주 붙은 혹은 오블리가토 레시타티브는
육성과 관현악을 자유롭게 교대시켜가면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것을 제외하면 이탈리아 오페라가 지니는 음악적인 흥미는 이리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18세기의 작곡가들은 놀랄만큼 다양한 아리아를 수없이 작곡하였다.
아리아 : 18세기 초반에 가장 널리 쓰이던 형식은 다카포 아리아(알렉산드로 스카르라티의
그리젤다-Griselda에 붙여진)로서 이것은 세부적으로 무한한 변형이 가능한 기본 틀이었다. 당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보통 다카포 아리아의 처음
부분을 확대시킨 형태로 소나타와 같은 조성구조로 콘체르토와 같은 오케스트라 리토르넬로를 지니는 단일 악장의 아리아가 한층 더 일반화되었다.
오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이리아에 전력을 쏟는 것이 곧 남용의 길을 열어놓게 되었다.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를 규칙적으로
교대하는 구조가 너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카스트라토(castrato:남성소프라노와 알토)를 포함하여 가수들은 극 혹은 음악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채 임의로 아리아를 변형, 추가, 혹은 다른 것으로 대체해 줄것을 시인과 작곡가들에게 강요하였다. 더욱이 가수들이 임의로
추가한 선율의 장식과 카덴차는 아무런 묘미도 없는 저급한 성악적 곡예의 과시에 지나지 않았다. 오페라와 이에 관련되어있는 모든것을 풍자한 글이
1720년「유행의 극장-Il Teatro alla moda」이라는 제목으로 익명 출판되었다.(이것은 베네테토 마르첼로가 쓴 것) 그러나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중요한 개혁을 꾀한것은 1745년 무렵이었다. 오페라 개혁의 시작은 감정과다 양식의 발생과 때를 같이하였으며 감정과다 양식과
마찬가지로 당세기 초의 협소한 귀족적 규범에 기친 중산층 계급사상의 영향이 커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였다.
● Giovanni Battista Pergolesi ●
● G.B.Pergolesi : Stabat Mater ●
새로운 양식으로 곡을 쓴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 중 한사람이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였다. 그는 오늘날 희극적인 인터메초(comic intermezzo)로 가장 잘 알려져있지만 중요한 오페라
세리아를쓴 작곡가 이기도하다. 페르골레지의 다카포 아리아는 보통 단일 동기의 전개를 통해 단일 감정을 나타내는 18세기 초기의 아리아들 과는
달리 그 성격이 희극적인것에서 심각한것 까지 다양한 음악적 소재를 써서 계속 바뀌는 분위기를 표현한다. 종종 첫악구에서 대조되는 두 조성이
나오며 그중 두번째 조의 음악소재가 다카포된 반복된 첫악구의 끝부분에 주조로 다시 나온다. 아리아의 리토르넬로는 나중위 주조나 제2의 조로
나오는 음악적 소재를 도입하기도하는데 이는 마치 콘체르토의 제시부와 흡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악음악은 18세기 전체를 통해 인정받아온
소나타나 콘체르토같은 기악음악의 구조적 방식들을 흡수해간다.다른 한편으로 성악선율의 음악을 지배하고 진행시킨다. 오케스트라는 독립적인 대위법
성부들을 추가시키는 대신 가수들을 화성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맡고있다. 선율들은 보통 처음 2마디가 선행 악구를 이루고 다음 2마디가 후행
악구를 이루는 4마디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작곡가가 이러한 공식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의식적으로 불균형의 효과를 노린 까닭이다. 이런 어법으로
곡을 쓴 그밖의 작곡가들로는《알치나》,《세르세》와 같은 후기 오페라에서의 헨델, 조반니 보논치니(Giovanni Bonnoncini),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Karl Heinrich Graun 1704-59),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활동한 스페인의 도밍고
테라델라스(Domingo Teradellas 1713-51), 니콜라 포르포라(Nicolo Porpra 1688-1783), 그리고 독일인 요한
아돌프 하세(Johan Adolph Hasse 1699-1783)등이 있다. 하세는 드레스덴의 작센 선제후 궁에서 오페라및 음악감독으로 생애
대부분을 보내긴 했지만 이탈리아에 수년간 머물렀고 이탈리아인 아내(유명 소프라노)를 맞아들였으며 음악양식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이탈리아적이었다.
그의 음악은 메타스타지오의 대본에 의한 것이며 그 중에는 하나의 대본에 두번, 세번까지 곡을 붙인것도 있다. 그는 당세기 중엽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고 성공을 거둔 오페라 작곡가로 그의 음악에 관해 언급한 버니의 기록은 어떠한 특성들로 인해 그가 전문가들이 호평을 받게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현존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고 총명한 성악음악 작곡가이다. 시와 목소리에 능통해있기 때문에 가수에게 부르도록하는 감미롭고
우아한 선율에 반주를 붙이는것 뿐만아니라 가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풍부한 판단력과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그는 극장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것이 목소리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있기 때문에 악기와 주제를 중복시키는 복잡한 특수기법으로 목소리를 질식시키는 일은 결코 하지않는다. 그는
화가가 작품의 중심인물에 가장 강렬한 빛을 투사하듯이 주의깊게 소리의 중요성을 간직한다."
■
오페라 개혁의 시작 ■
오페라 개혁의 시작 : 몇몇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음악과 극의 변화하는 이상에 오페라를 조화시키려고
시중하게 노력했을때 그들의 노력은 전체 구도를 보다 '자연스럽게' 만들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구조를 더 유연하게하고 내용에 더
깊이있는 표현력을 부여하며 콜로라투라를 존 더 줄이고 다른 음악 요소들을 보다 다양하게 만들어놓았다. 다카포 아리아가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수정이
가해졌으며 다른 형식들도 병용되었다. 줄거리를 더 신속하게 사실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아리아의
레시타티브가 보다 더 융통성있게 교체되었다. 오블리가토 레시타티브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관현악은 그 자체로서 뿐만아니라 반주에 화성적
깊이를 더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지않았던 합창이 부활되고 독창자들의 임의적인 요구에 대한
저항이 강화되었다. 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니콜로 욤멜리(Nicilo Jommelli)와 토마소 트라에타(Tommaso
Traetta 1727-79) 두사람이 있었다. 이 두사람 이탈리아 작곡가 모두 프랑스적인 취향이 지배적인 궁정 - 욤멜리는 슈트트가르에서,
트라에타는 파르마에서 - 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자연히 그들로 하여금 국제적인 성격의 오페라를 지향하게끔 했다. 보다 순수하게 이탈리아 전통을
따르는 작품으로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오페라 12곡이 있으며 이중엔 메티스타지오 대본에 의한 《인도의 알렉산더-Alessandro nell
Indie》(나폴리 1762,)《오리오네 - Orione》런던 1763, 《스키피오의 자비-La clemenza di Scipione》런던
1778, 등이 포함되어 있다.
■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1714-1787) ■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1714-87) : 프랑스외 이탈리아 오페라를 통합시킴으로서 그 시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글루크는 이탈리아에서 사마르티니에게 음악수업을 받았다. 런던을 방문하였고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독일을 순회했던
그는 빈에서는 황제의 궁정 작곡가로 재직했으며 파리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후원아래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양식으로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으나 1750년대 개혁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당시에 보다 급진적인 사상에 자극을 받은 그는 시인 라니에로
칼차비지(Raniero Calzabigi 1714-95)와 합작하여《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yridice》1762,
와《알체스테-Alceste》1767, 을 빈에서 상연하였다.《알체스테 》의 헌사에서 글루크는 자신의 결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즉,
이탈리아 오페라를 손상시켰던 이제까지의 악제를 제거하고 다카포 아리아의 낡아빠진 인습이나 장식적 변주로 기교를 자랑해 보이려는 가수의 욕망을
떠나서 "표현이나 즐거리 상황을 위해 시에 봉사하는 본연의 기능에 음악을 한정시킬것" 더 나아가서 서곡을 오페라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극의 요구에 맞추며 아리아와 레시터티브 사이의 대조를 줄인다는 것이 그 내용으로 되어있다. 글루크 자신이 추구한다고 공언한 아름다운
단순성은〈오르페오〉의 유명한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할까(Che faro senza Euridice?)' 와 역시 같은 작품에 있는 그
밖의 아리아와 합창, 그리고 무곡들에 잘 드러나있다.《알체스테》는《오르페오》의 전원적이고 비가적인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보다 위풍당당한
오페라이다. 두 작품 모두에서 음악은 레시터티브, 아리아, 합창이 한데 어울려 규모가 크고 통일된 장면을 이루어 극에 적합하도록 유연하게
만들어졌다. 글루크는 이탈리아에서 오랜동안 그 인기가 시들해있던 합창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였다(1750년대 초 자신의 빈 오페라들에서 마지막
합창을 사용했던 욤멜리의 뒤를 따랐다) 글루크는 이탈리아 오페라 선율의 우아함, 독일의 진중함, 그리고 프랑스의 비극음악(tregedie
lyrique)의 품위있는 장엄함을 흡수하여 《오르페오》와《알체스테》에서 그의 원숙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의 경력의 절정으로
치닫고있었는데 그것은 마침내 1774년 파리에서 상연된《아울리드와 이피게니-Iphigenie en Aulide》로
도달되었다.
■ 오페라 개혁에 대한
글루크의 생각 ■
나는 음악을 무익하고 불필요한 장식들로 줄거리를 방해하고 찬물을 끼얹는일 없이 이야기의 상황들과 감정을
표현함으로서 시에 봉사하는 진정한 기능에 한정시키려고 해왔다. 나는 생생한 색채와 잘 배치된 빛과 그림자가 그 윤곽을 바꾸지 않으면서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만들어 바르게 잘 만들어진 구도에 공헌하는것을 음악이 시에 가져다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서 보다 중요한 나의 임무는
아름다운 단순성을 찾는것 이라고 믿었으며 명확함을 희생하면서 어려움을 내보이는 일을 피해왔다. 그것이 장면과 표현에 의해 자연스럽게 암시되지
않는 한 어떠한 새로운 발견에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효과를 위해서는 어떠한 법칙의 희생도 기꺼히 감수했다.
이탈리아어로 된 글루크의 알체스테 헌사 중에서 <빈 1789> C. 펠리스카 역 영인본은
New Glove Dictionary 7:466 참조
프랑스 수도의 음악적 분위기는 이 공연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프랑스의
국가 보조를 받은 구식 오페라에 대한 비판이 오랜동안 비등해있다가 마침네 1752년 '부퐁논쟁(guerre des bouffons)'으로
알려져있는 설전으로 폭발했었다. 이 명칭은 이탈리아의 오페라단이 파리에 와서 이탈리아의 코믹 오페라(오페라 부파-opera buffa)를
상연하여 두시즌 동안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둔데서 유래되었다. 실제로 사이비 지식인들이 논쟁에 참가했는데 한편은 이탈리아 오페라편이고, 다른
한편은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자를 이끌고있는 지도자중 한사람인 루소는 논평을 발표하여 "프랑스어는 본질적으로 노래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하였으며 프랑스인들에게 음악은 없으며 가질수도 없다. 혹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그 만큼 그들에게 해를 줄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루소와 그 일파는 논쟁에 온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간간히 어리석은 극단론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진보적인 의견을
반영하고있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륄리와 라모의 전통적인 프랑스 오페라는 곧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글루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대체할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글루크와 그의 후원자들은 대단히 현명하게도 프랑스어로 좋은 오페라를 쓸수있다는 것을 입증하길 원한다는 의지로
글루크 자신을 부각시켰다. 그는 고귀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연스러운 선율을 ...이제까지 어리석은 국가적인 양식들간의 구분을 없앨수있도록 모든
나라들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루소의 도움을 받고싶다고 천명하였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 대중의 애국심과 호기심 양쪽을 자극하였다. 라신의
비극을 번역한 대본으로 만든《아울리드의 이피게니》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오르페오》와 《알체스테》(두 작품 모두 프랑스어 가사가 붙여졌다)의
개정판이 계속해서 줄을 이었다. 나폴리의 인기작고가 니콜로 피치니(Nicoli Piccini 1728-1800)와의 해로운 경쟁에 휘말려
글루크는 륄리가 1868년 곡을 붙인바있는 똑같은 퀴노(Quinault)의 대본으로 5막 오페라《아르미드-Armide》를 1777년에
작곡하였다. 글루크의 다음 걸작 《타우리드의 이피게니-Iphigenie en Tauride》는 17779년에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극적 흥미와
음악적 흥미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비극적 장대함의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관현악, 발레, 독창, 합창등 오페라의
모든 요소들을 이용하고있는 매우 규모가 큰 작품이다. 글루크의 오페라는 파리에서 활동하던 바로 뒤를이은 후계자들의 작품 모델이 되었으며 오페라의
형식과 정신까친 그의 영향은 이전의 경쟁자였던 피치니, 루이지 케루비니(Lugi Cherubini 1760-1842), 가스파로
스폰티니(gasparo Spontini 1774-1851), 그리고 《트로이인-Les Troyens》에서의 에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69)같은 작곡가들을 통하여 19세기로 전해졌다.
■ 코믹
오페라(Comic Opera) ■
코믹 오페라 : 희가극(comic opera)이라는 용어는 정가그에 비해 양식면에서부다 가벼운 작품들을
지칭한다. 작품들은 영웅적 혹은 신화적인 소재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장면과 인물을 보여주며 비교적 평범한 공연 기법을 요구한다. 희가극은
나라마다 그 형식을 달리했지만 정가극, 즉, '진지하거나' 비극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예술적 반항심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희가극의 대본은 항상 그 나라의 말로 되어있으며 음악 역시 민족적인 음악 어법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잘것 없이 시작된
희가극은 1760년이 지나면서 점차로 그 중요성이 커져갔으며 당세기가 끝나기 전에는 그 중요한 특징들이 오페라 작곡의 주류로 많이 흡수되었다.
역사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18세기 후반 자연스러움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에 이것이 부흥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낭만주의 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음악적 민족주의를 향한 운동에 중요한 시발점이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 중요한 이탈리아 희가극 형태는 인테르메초(intermezzo)로 이 용어는정가극의 막간에
길아기 짧은 희극적인 짧은 음악 막간극을 보여주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초기의 거장으로 페르골레지가 있었으며 그의《마님이 된 하녀》는 게나로
안토니오(Genaro Antonio federico)의 대본으로 1733년 9월5일 나폴리에서 페르골레지 자신의《Il prigioner
superbo》와 함께 상연되었다. 1752년 파리에서의 공연은 '부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현악 오케스트라 반주와 베이스, 소프라노만을
위하여(말없는 제3의 인물이 있다) 작곡된 음악은 민첩하고 활기를 띤 희극 양식의 전형으로 이점에 있어서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다른 모든나라
작곡가들을 압도했다. 이탈리아 희가극의 업적 중 하나는 순수한 희극 혹은 그 밖의 양식의 풍자극등에서 베이스 성부의 가능성을 개발했다는것에
있다. 니콜라 로그로시노(Nicola Logroscino 1698-1765)와 발다사레 갈루피(Baldassare Galuppi)의 희가극에는
앙상블 피날레(ensemble finale)라는 도 하나의 특색이 나타나고있다. 이것은 막이 끝날 때 등장인물 전원이 무대에 나타나고 그러면서
줄거리는 계속 활기를 띠고 진행되어 마침내 가수 전원이 참여하는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앙상블 피날레는 정가극의 그 어느것과도 같지 않으며
작곡가들은 이것을 작곡할 때 음악형식의 통일성을 잃지 않으면서 신속하게 변해가는 장면 전개를 따라가야만 했다. 여기에 잘 대처했던 이들은 두
사람의 나폴리 작곡가 피치니와 조반니 파이지엘로(1740-1816)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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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극의 막간에 상연되는 인테르메조(intermezzo) 장면 ●
프랑스 : 프랑스형의 가벼운 오페라는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1710년경 교구 행사에 인기있는 오락물의 미천한 형식으로 시작되어 당세기 중기까지 그 음악은 거의 전적으로 유행가
선율(보드빌-vaudeville), 혹은 그러한 곡조를 모방한 간단한 선율에 의존하고 있었다. 1752년 이탈리아의 희극 배우들이 파리를 방문한 것이 오페라 코미크의 작곡에 자극이 되어주었는데 이제 오페라
코미크에는 이전의 보드빌과 함께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식이 혼합되어있는 독자적인 아리아(아리에트{ariettes}라고 불렀다)가 도입되었다. 점차
아리에트가 보드빌 대신 사용되고 1760년대 말에 가서는 보드빌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모든 음악이 새롭게 작곡되었다.. 10년에
걸친 이러한 과도기에서 활약한 작곡가 중 한 사람이 글루크였다. 그는 빈 궁정의 오락을 위해
수많은 오페라 코미크를 편곡하고 작곡하였다. 일찌기 프랑스 사람들은 어떤 음악도 가질 수 없다 라고 공언했던 루소는 1752년 아리아와
레시터티브가 있는《마음의 예언자-Le Devin du village》라고 불리는 매력적인 작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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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o Fontana - S p a t i a l C o n c e p t (1962) ●
■ Bach:Brandenbrug Concerto No.6 BWV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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