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

장 필립 라모

미뉴엣♡ 2015. 7. 11. 07:52
♡ Jean Phillippe Rameau ♡    2009/07/1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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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vor Abraham(1935) - Flower Garden 1970 ●

 

 

               ●★ 장 필립 라모(Jean Phillippe Rameau 1683-1764) ★●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음악가 '장 필립 라모'(Jean Phillippe Rameau 1683-1764)는 역사상의 다른 훌륭한 작곡가와는 구별되는 경력을 가졌다. 실제로 40세가 되기까진 무명으로 있었던 그는 처음에는 이론가로서 그리고 그 이후에 작곡가로 주목을 끌었다. 그의 명성을 떨치게해 준 대부분의 음악 작품들은 50-56세 사이에 작곡된 작품들로 당시에 그는 개혁자로 공격을 받았는데 20년이 흐른뒤에는 반동주의자라고 한층 더 심한 비난을 받았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궁정의 호의로 꽤 풍요로운 삶을 누렸으면서도 그는 늘 고독하고 입씨름을 좋아하고 비사교적인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실하고 지성을 갖춘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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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an Phillippe Rameau(1683-1764) ●

 

 

라모는 디종의 오르간 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처음 레슨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이 그가 받은 정식음악교육의 전부인듯하다. 1701년 이탈리아에 잠시 다녀온 후 크레르몽 - 페랑에서 오르간주자로 있었으며 그후 파리로가서 1706년에는 클라브생 곡집을 출판하였다. 1709년 그는 디종에있는 노트르담 성당 오르간주자의 자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1713년에는 리옹에서 오르간 주자로활동하였다. 1715년 다시 클레르몽 - 페랑으로 돌아와 오르간 주자로서 그의 유명한 「화성론-Traite de l'harmonie」을 썼으며 이 책은 1722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1723년 라모는 파리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문화생활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와는 달리 이 한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떠한 성공과 명성도 수도원에서 얻어진것이 아니면 인정을 받지못했다. 그리고 작곡가로서 확실한 성공에 이르는 길, 실제로 명성을 얻을수있는 유일한 길은 오페라였다. 그러나 라모에게는 기대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재력도 영향력있는 친지도 없었으며 그에게는 궁정 신하로서의 기질도 주어지지 않았다. 더욱 안좋은것은 이론가로서의 명성이 더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학자(savant) 철학자(philosophe)로서 알려져있었다. 사람들은 음정, 음계, 화음에 관해서 그토록 박식한 지식인으로, 누구나 들어서 즐거워 할 음악을 자곡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있던 라모 자신도 1727년 한 편지에서 자신은 작곡을 하면서 '자연을 연구하고' 적절한 음악언어로 자연의 '색채와 뉘앙스'를 재생하는 것을 배웠다고 강조함으로서 이러한 이러한 약점을 알고있었다. 보다 좋은 기회를 가지지 못햇던 그는 서너개의 소규모 음악 희극에 사용되는 에어(air)와 무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칸타타 몇 곡(1728) 클라브생곡집 3권(1724, 1728, 1741)이상 출판하였다. 교사와 오르간 주자로서 그의 명성을 제자들을 끌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1731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프랑스 제일가는 음악후원자 라푸플리니에르의 후원을 받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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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ean Phillippe Rameau-Selections of Keyboard Jewels ●

  

 

                    ■ 라 푸플리니에르(la Poupliniere 1693-1762) ■

 

 

고대 프랑스 귀족의 후손인 알레상드르 장 조세프 르 리쉬 드 라 프프리니에르(Alexandre Jean Joseph Le Riche de la Poupliniere 1693-1762)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여기에 투기와 1721년부터 1738년까지 루이 15세 치하에서 맡고있던 세무장관(fermier general)이라는 좋은 직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더욱더 재산가에 이른다. 그의 살롱은 귀족과 문인(볼테르, 루소), 화가(반 로와 라 투르), 모험가(카사노바) 그리고 특히 음악가등 다양한 사교계 사람들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특히 새로운것을 좋아하는 라 푸플리니에르는 장래성이 있으면서 아직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후원자로서 즐거움을 갖는다. 그는 파리근교 파시에 있는 그의 성에 경우네따라서는 외부연주자드롤 증원되기도 하는 14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었으며 매주 갤러리에서 진행되는 '대음악회', '토요음악회'등 여러 음악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라모는 1731-1753년까지 '라 푸플리니에르'의 오르간 주자 지휘자 그리고 상임작곡가로 재직했다.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얻고자했던 라모의 야심은 라 푸플리니에르의 손에 닿자 곧 실현되었다. 볼테르가 쓴 대본으로 오페라를 작곡하려했던 계획은 완서하지 못했고 그후 라모는 당시 인기 대본작가인 시몽 조셉 펠르그랭 신부의 시에 곡을 붙인 《이포리트와 아리시-Hipolyte et Aricie》를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1733년 파리에서 상연되었고 그때 자곡가의 나이는 50세였다. 보다 눈부신 성공은 1735년 오페라-발레(opera-ballet)인《화려한 인도-Les Indes galantes》로 이루어졌다. 그 2년 뒤에는 라모의 걸작으로 여겨지는《카스토르와 폴뤽스-Castor et Pollux》가 발표되었다. 1739년 그는 오페라-발레《예배의 축제-Les Fete ou les Talents lyriques》와 오페라 다르다누스-Dardanus》의 새로운 작품 두 편을 썼다. 처음부터 라모의 오페라는  비판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항상 언쟁을 좋아하는 파리의 지식층 소란스런 두 파로 나뉘어져 한 파는 라모에게 호의적이었으나 한 파는 라모를 륄리로부터 내려오는 프랑스 오페라의 훌륭한 옛 전통을 뒤엎는 자로 공격하였다. 륄리주의자들은 라모의 음악이 난해하고 어려우며 억지스럽고 기괴적인데다가 둔탁하고 기계적이며 부자연스럽다고 주장하였다. 라모가《화려한 인도》의 서문에서 자신은 "비굴한 모방자로서가 아니라 륄리처럼 자연 그 자체 - 그토록 아름답고 그토록 소박한 - 를 모데로 취함으로서 륄리를 모방하려고 애썼다". 고 항변하지만 소용없었다. 륄리 지지자들과 라모 지지자들과의 싸움이 치열해짐에 따라 라모의 인기는 점차로 증대되어 갔는데 이는 파리의 여러극장들에서 보여졌던 그의 오페라의 페러디들의 숫자가 증명해주고있다. 그 당시 페러디는 희화한것이나 풍자한것만을 반드시 뜻한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원본을 가볍고 친근한 스타일로 모방하거나 각색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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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an Miro - Portrait of Mrs Mill ●

  

 

1745년 라모는 황태자와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결혼 축하를 위해 베르사유에서 공연한 코미디발레인《나바르공주-La Princess de Navarre》로 큰 성공을 거두고 왕은 출판비용, 왕실 실내음악 작곡가라는 영예와 포상을 내린다.그럼에도 라모의 작품은 작품성면에서 다소 떨어지는 평가를 받는경향이 있었다. 특히 그때그때 행사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진다.  

1750년대 라모는 그 자신의 어떤 활동에 의해서가 아닌 또 하나의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은 프랑스 음악과 이탈리아 음악의 우열에 관한것이 그 주제였다. 후에 부퐁전쟁(guerre des bouffons)으로 부르게 된 이 유명한 논쟁에 대해서는 프랑스 문학사적으로도 예민한 주제가 되고있다. 어쨋든 당시 가장 유명한 생존 프랑스 작곡가로서 라모가 한 쪽파에 의해 프랑스 음악의 대표자로 높이 평가되고 20년 전만 하더라도 륄리처럼 곡을 쓰지 않았다해서 그를 비난했던 바로 그 일파의 우상이 되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탈리아의 우두머리는 루소로서 그는 디드로의「백과사전-Encyclopedie」에서 음악에 관한 글을 썼던 일련의 다른 철학자들과 함께 항시 프랑스 음악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장 필립 라모는 말년에 이르러서 주로 논쟁적인 글과 이론적인 평론을 쓰는데 전념하였다. 그는 1764년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항시 완벽주의자로서 마지막까지 그 무엇에도 굽히지 않는 성격이어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기에게 종부성사를 주기위해 찾아온 사제에게 노래를 서툴게 한다고 꾸짖을 정도였다고 한다..ㅎ

 

 

                                    ■ 라모의 이론적 업적들 ■

 

 

일생을 통하여 라모는 음악이론 혹은 당시 부르던대로 한다면 '음악과학'에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수많은 저작물을 통해서 라모는 음향학 법칙으로부터 기본적인 화성 원리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였고 그당시 음악의 실제를 분명히 밝혔을 뿐만아니라 그 후 200년에 걸쳐 음악이론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라모는 - 하나의 음도, 선율선이나 음정도 아닌 - 화음을 음악의 근본요소라고 여겼다. 그는 주3화음이 하나의 줄을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부분으로 등분을 했을때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후에 배음렬이 그의 주장을 뒷바침해 준다는것을 알았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가락단음계를 확립해놓긴 했어도 단3화음을 자연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설명하는데는 보다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느 화음이란 옥타브 안에서 3도음정을 쌓아올려 만드는 것이라고 단정하며 3화음을 7화음으로 확대시켰으며 하행 3도와 5도음정을 다시 9화음과 11화음을 만들어냈다. 라모가 어떤 하나의 화음은 아무리 자리바꿈을 하더라도 그 화음일수밖에 없다는 화음의 동일성을 인식해낸것은 중요한 통찰이며 이는 기초저음(basse fondamenteale), 즉 화음의 연속에 있어서 근음의 진행이라는 귀결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다 라모는 으뜸화음 딸림화음 버금딸림화음등의 세 3화음을 조성의 기둥으로 확립시키고 다른 화음을 이들 화음과의 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기능화성의 개념을 공식화하였다. 또한 그는 조바꿈이 한 화음의 기능변화에서 비롯될수있다는 개념(현대용어로 '공통화음-pivotchond')을 분명히했다. 여기에 비해서 모든 선율이 표면적이건 잠재적이건 화성에서 나온다는 그의 이론과 특정한 조성이 가지는 독자적인 성격에 관한 그의 견해는 덜 중요하다. 그 자신 화성이론을 수학적으로 합법화시켜주는것으로 믿었던 그의 수많은 추론과 유추는 라모이론의 요점만을 모은 개설서「라모의 원리에 입각한 음악이론과 실제 요소들-Elements de musique theorique et pratique suivant les principes de M.Rameau」(파리 1752)을 출판했던 백과전서학파 '장 르몽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같은 과학자들로 부터는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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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lgue Blanch sur fonde rouge et vert ●

 

  

                                    ■ 장 필립 라모의 음악양식 ■ 

 

 

륄리 이후 프랑스 오페라의 경향은 이미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있던 장식적인 요소들 - 묘사적인 오케스트라음악, 무곡, 합창 그리고 노래들을 동반하는 볼만한 장면(scenic spectacle)과 발레 -증가되는 추세였다. 점점 더많은 극이 심지어 서정비극(tragedies lyriques)이라고불리는 작품들까지도 중요성 및 작품의 질적인 면에서 수준이 떨어져있었고 결국 오페라 발레는 여러가지 장면들간에 가느다란 연결고리만 갖는 혹은 그런것조차 없는 대규모의 발레와 볼거리에 지나지않는다. 라모의 '영웅적 발레'《화려한 인도》는 오늘날 가장 즐겨 연주되는 그의 작품중 하나로서 오페라 발레의 한 예이다. 4개의 앙트레(entree), 혹은 막은 각각 독립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지구상의 다른지역을 무대로 함으로서 이국적인 정경과 이국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18세기초 프랑스 대중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여러가지 다양한 장식물들과 춤들을 제공할 기회를 주고있다. 각 앙트레는〈관대한 터키인 - 무대는 인도양의 한 섬이며 그 줄거리는 모차르트가 후에 그의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 사용한것과 비슷하다.〈페루의 잉카인〉〈꽃, 페르시아의 축제〉그리고〈야만인〉;(장소는 아메리카의 어느 숲속이며 줄거리에는 인디언 뿐만아니라스페인과 프랑스 사람들이 등장한다)등의 제목으로 되어있다. 라모의 음악 특히《페루의 잉카인》의 앙트레에서의 음악은 대본에서 기대할수있는 것보다 훨씬더 극적이다. 음악적 특징들로 볼때 라모의 그작품들은 분명히 라모의 것을 닮아있다. 두사람 모두 적절한 낭송과 레시터티브에 있어서의 정확한 기보의 세부적인 관심을 쏟았으며 보다 가락스럽고 형식면에서 잘 정돈된 에어(air), 합창 혹은 기악 간주곡들을 레시터티브와 섞어놓고있다. 그리고 라모의 초기 오페라에서는 서곡형식도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틀 안에서 라모는 많은 변화를 도입해놓아 실제로 그의 음악과 륄리 음악간의 유사성은 본질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피상적인 것이라고 할수 있다. 아마도 가장 주목 할 만한 대조는 선율선의 성격에 있을것이다. 작곡가 라모는 끊임없이 선율이 화성에 기초를 두고있다는 이론가 라모의 원칙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많은 선율 악구들은 주로 3화음이며 그것을 떠받쳐야하는 화성진행 대해 불확실의 여지를 남겨두고있지 않다. 게다가 딸림화음버금딸림화음 그리고 모듬 부3화음의 조바꿈을 갖는 장-단 조성체계의 질서정연한 관계들이 화성을 지배하고있다. 라모는 협화화음과 불협화화음, 자연스런진행과 부자연스런진행 모두 그리고 표현적 목적을 위한 전조등의 화려한 팔레트를 사용하여 그에 비하면 륄리의 양식이 빛이 바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라모의 화성은 대부분 온음계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반음계적 그리고 이명동음적 조바꿈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이폴리트와 아리시》의 2막 5장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의 트리오(예12.1)에서 하행의 반음계적 동형진행은 "가련한 사람이여 어디로 피하느냐? 두려워 떨고있구나! - Ou cours-tu, malheureux? Tremble, fremis d'effroi!" 라는 가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다섯마디 안에서 5개의 조성에 걸쳐 재빨리 전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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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ucio Fontana - Spatial Concep 1962. P i n k ●

  

 

전체적으로 볼때 라모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은 오페라의 기악부분인 서곡, 무곡 그리고 무대동작에서 수반되는 묘사적인 교향악등에서 이루어졌다 이모든 것들 안에서 그의 독창성은 지칠 줄 몰랐으며 주제, 리듬, 그리고 화성은 개성과 추종을 불허하는 회화적인 성격을 가지고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음악을 평가할때 특히 그것의 묘사적 힘에 가치를 두었으며 라모는 뛰어난 음화가(tone painter)였다. 그의 음악적 회화들은 우아한 세밀화에서부터 천둥 {《이포리트와 아리시-Hypolite et Aricie》1막},폭풍우{《사랑의 놀라움-Les Surprises de d'Amour》1757 제3막} 혹은 지진{《화려한 인도》2막}등의 대담한 재현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다. 그의 음악의 회화적 성격은 새로운 오케스트라 편성에 의해 한층더 돋보인다. 라모가 바순과 호른을 사용하고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목관악기들을 독립시킨것은 그당시 가장 진보적인 오케스트라 기법과 합치되는 것이다.

 

라모의 클라브생 곡들은 쿠프랭의 작품들처럼 섬세한 짜임새와 활발한 리듬에 세부적인 부분까지 품위와 재미 그리고 회화적이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곡집《새로운 클라브생 모음곡집-Nouvelles suites de pieces de clavcin 1741》에서 라모는 도메니코 스칼라티와 다소 같은 방식으로 기교적 효과를 시도하였다. 라모의 유일한 기악합주 출판물은《합주용 클라브생 소곡집-Pieces de clavcin en concerts 1741》이라는 제목이 붙은 트리오 소나타 모음집이었다. 여기에서 하프시코드는 단순히 반주악기로 다루어지지 않고 주제 재료를 제시하고 전개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다른 악기들과 동등하게 취급하고있다. 

 

 

                    ■ 장 필립 라모 : 『이폴리트와 아리시』 4막 1장 ■

                                ((Hypolit et Aricie : Ah! faut-il))

  

이폴리트는 이 독백 부분에서 자신의 추방과 자신이 계모를 범했다고 잘못 기소된 후 사랑하는 아리시와 헤어지게 된데 대한 하소연을 하고있다. 이 부분은 라모가 륄리의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기에서 이탈하고있는 들을 둘다 보여준다. 륄리의 유사한 장면들에서처럼 여기에는 레시터티브와 아리아풍의 반복구 Ah! faut-il en un jour, perdretout ce que j'aime? :(아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잃어야만 하는가?")는 두번 반복되는데 매우 가락스러우며 균형잡혀있다. 뒤따르는 부분은 말과 비스한(speechlike)것으로 음절에 보다 짧은 음가의 음들이 붙으며 박자가 수시로 변하며 형태를 잘 갖춘 선율적 특성이 부족하다. 라모는 륄리의 5성부 현악오케스트라 대신 플루트, 오보에 그리고 바순들이 보강된 4성부 현악오케스트라를 사용하고있다. 라모는 이폴리트의 근심을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화성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화성은 통주저음 화성에 나와있는 7, 9, 감5, 증4의 숫자와 연주해야하는 전타음 그리고 성부들에 기보된 다른 장식음들에서 분명히 볼수있듯이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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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y - Yellow Dancers - Unknown ●

 

 

 

라모의 업적은 다음 세가지 측면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의 초기 오페라의 오페라-발레의 웅장하고 장대한 양식으로 볼 때 그는 바흐와 헨델에 비견 할 만한 바로크 후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웅장한 특성들은 프랑스의 특징인 명쾌, 우아, 중용, 기품 그리고 회화적 표현을 지향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되거나 때로는 대체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그는 그의 동시대인 와토(Watteau)와 비교될 수 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나라처럼 작곡가인 동시에 철학자이며 창조자인 동시에 분석가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동시대의 볼테르와 비교될수있다. 라모의 업적을 완전히 이해하려 할 때 이러한 세가지 측면은 분리될 수 없다. 그는 18세기에 있어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아니라 가장 복잡한 음악적 인물중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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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S. Bach : English Suite No.6 in d minor BWV 811 ■

 

                                

 

                                                                   ● Prelude

                                                     ● Allemande

                                                     ● Courante

                                                     ● Sarabande

                                                     ● Double

                                                     ● Gavotte I

                                                     ● Gavotte II

                                                     ● Gavotte da capo

                                                     ● Giegue

 

                                     ((Plays the Harpsicord by Bob van Asp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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