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age to You ♡ 2012/11/11 0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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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AGE to You 당신에게 경의를..★●
작가가 꿈이었던 소녀는 어쩌다 보니 문학이 아닌 예술로 밀려났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눈으로 집어/찍어 삼키는 탐욕적인 독자가 되어 세우지 못한 꿈 가까이 거처를 정했다. 그녀는 읽는자들의 애독자인 소설, 시, 철학서 말고도 신문, 대중가요의 가사, 법전도 읽는다. 그녀에게 법전은 시취(尸臭)를 풍기는 삶이 불가능한 글자들의 연옥이다. 마치 그녀는 삶의 비극, 희극의 비옥함 이면에 도사린 불모의 질서를 잊지 않으려는 듯 법전을 읽는다. 감정입된 글자들, 숭배되는 글자들, 공포의 글자들에 대해 그녀는 동등한 태도를 취한다. 그녀는 취향이나 감수성을 위해 읽는게 아니다. 그녀는 싫은 것과 좋은 것을 가르는 이의 쾌락이나 욕망을 좇지않는다.그녀는 거의 읽을 수 없는 것들까지 인간이 독자일 수 없는 것까지도 읽는다. 그녀의 일상적인 '에티튜드'는 문자에의 집요함(insistence to the letter)이다. 그녀는 다른 곳을 주억거리는 이들의 '여행', 다른 삶을 운운하는 이들의 '만남'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녀의 여행, 그녀의 만남은 종이에 빼곡히 정렬한 글자들이 연출하는 떠남 - 그/그녀는, 그녀/그를 떠난다-이나 중얼거림-너 나에게 오ㅐ 그래/-혹은 침묵에 멈춘다. 그녀의 일상은 읽는자의 주이상스에 오롯이 바쳐진다. 그녀는 거의 먹지 않으며 거의 사지 않으며 거의 살지 않는다. 궁핍과 결핍뿐인 시절이 그녀에게 길었고 혹독했다. 그녀는 차마 말도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세상의 밑바닥에 오래 체류했었고 그 와중에 최소한으로 사는 법을 체득했다. 멀리 떠나는 자, 누구를 만나는 자들도물론 세상을 읽는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읽는데 별로 많은 도구나 장치, 변화를 요하지 않는 방법에 익숙해져야했고 그렇게 몸의 확장보다는 몸을 둥글게 안으로 말려 부피를 최소화하는 방법에 '대가'가 되었다. 읽는 자들을 위한 물리적 세계는 딱딱한 나무의자나 작은 테이블, 등을 기댈 수 있는 벽 한 구퉁이로 족하다. 세상에 앉기만 해도 세상이 팬 아래로 몰려와 정렬하는 작가들처럼 책만 펼치면 세상이 그 깊은 신음과 감탄과 고막을 찢을 듯 절규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이의 고요가 그녀의 일상이다. 그녀는 걷기에 부적합한 다리에 보기에 부적합한 눈과 말하는데 부적합한 머리와 느끼는데 충분한 신체적 결함과 고통에 바쳐진 삶의 기록을 갖고있다. 그녀는 세계를 최소로 접을 때 가능한 여행에 굴종함으로써 자신의 결핍과 무능을 환대했다.나는 아주 어린 소녀가 해질 무렵 신작로를 바라보다가 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둘러본 세상의 불운한 느낌에, 아뭏든 아이의 눈물이 헤아릴 수 없는 장면에서 울었다는 이야기나 극심한 불면증에 벽장에 들어가 몸을 접고서 잔 날이 깃털같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왜 듣고 있었는지... 이글은 결국 소녀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벽장에 들어가 먼 곳을 바라보며 수십년 째 울고 있는 그녀의 겨우 살아가는 몸에 대한 것이다.
● <<민사소송법 903~911p.>>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
세계에 대한 비문자적 체험을 열망하는 자가 예술가라면 문자에 오염되고 문자에 포획된 세계를 그림으로 재배열하는 중에 미분된(differentiated) 세계를 전체(holism)로 체험하는 이가 예술가라면 세계가 시각중심의 체제로 조직화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회화적 이미지에 할당된 위반의 힘이 거의 소멸된 상황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성이 밖을 향한 문을 거의 닫고 있는 시대에, 그녀는 세계를 일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가들의 문자적 상상력을 경험하는데 예술가로서 자신의 소명, 결기를 우선 '할애'한다. 닥치는대로 읽으려는 욕망을 지속하는 중에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완독한 텍스트의 일부분을 자신의 '이미지'로 선택한다. 읽는 부분을 본 부분으로 번역하는 중에 그녀의 예술가적 상상력 에너지는 종이와 여백,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세계를 살되 경험의 '잔여'를 이미지로 보존하는 게 예술가의 운명이라면 그녀는 자기를 관통한 삶과 다른 이들이 '글자'에 박은 삶을 섞는 중에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개성을 유지한다.
● <<달에 울다-마루야 마겐지 작 123~135p.)>>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
●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아고타 크리스토프 - 50년간의 고독, 113~138p.)>> ●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글자들로 된, 문장들로 된, 책을 덮은 뒤 그녀는 작업실 테이블에 앉는다. 작고 닥딱한 나무 의자와 마트에서 구입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그녀의 작업실 메인 풍경이다. 그녀의 작업도구는 아크릴물감을 100번 가량 덧칠한 나무 패널, 그 위에 부착된 모눈종이, 직각자, 4밀리 인공진주가 담긴 플라스틱 그릇, 글루건 핀센트이다. 작업은 아주 단순하다. 읽은 책의 일부분, 자신에게 결정적인 인상을 남김 부분을 그녀는 필사(筆寫)하기 시작한다. 페널의 크기와 진주가 대체할 글자의 수를 조정하는데 있어서 그녀는 전문가 급의 감각을 갖췄다. 모눈종이와 직각자의 정확성을 통해 여백을 이룰 패널의 외곽을 조정하고 몇줄로 필사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과학자적 엄격함을 따른다. 물론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배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시각적 조형성이나 심미성이다. 그녀는 모던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글루건으로 패널에 글루를 찍고 왼손이 집은 진주를 핀센트를 쥔 오른손이 넘겨받아 글루 위에 붙이는 규칙적 움직임이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필사, 그녀의 진주 붙이기는 글자의 수와 글자들 사이의 간격을 기준으로 진행된다. 문장의 의미론적 맥락이 사라지고 대신에 형태론적 시각적 조형성이 나타난다.
● <<인생사용법 1부 15~14p. 조르주 페렉>>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
복제, 필사, 반복, 대체, 원본과의 비교, 대조처럼 그녀의 작업을 관통하는 단어들은 흔히 포스트모던란 차용(appropriation)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원본을 있는그대로 반복하는 차용의 실천가들은 주지하다시피 원본/원작의 권위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개념 미술가들이다. 차용에 근거한 작가들은 창조, 표현, 여감, 작가성과 같은 근대적인 작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의 권위와 예술의 환상을 제거하는 중에 예술이 복제 가능한 상품이 된 사회에서 예술이 어떻게 자신의 신화적 위상을 통해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은폐하는지를 묻는다. 고산금의 작업이 일견 차용의 맥락에 근거한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의 작업이 인쇄술의 발명 이후 등장한 작가의(문자적 상상력)의 신화적 지위엔 대한 비판적 전유로 읽힐 수 있는 여지/과잉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업은 예술에 대한 생각, 성찰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미적 전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예술가들의 작업을 설명해온 심리주의나 표현주의가 부재하는 그녀의 화면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비판이 아니라 명상을 요구한다. 건강한 이들은 지각하지못하는 내장의 위치를 통증이 드러내듯이 그때 나의 일관성이 무너지고 의식이 불안을 겪듯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슬쩍 제자리에서 벗어나 산란하기 시작한다. 있음과 없음, 부재와 현존, 침묵과 소란 사이에서..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예술가의 전 과정 중 말하자면 결론, 마침표와 같은 것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수 없기에 우리는
안다고 기만하거나 모르기에 '예술가'를 숭배한다. 고산금의 작업은 작업의 방식, 작업에 사용된 오브제나 기법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작가의 과정에 대한 '신비'를 유발하지 않는다. 신묘한 기법도 기발한 배치도 놀라운 도약도 공정의 비의도 없다. 대신에 그녀의
작업은 왜 노동자처럼 지루하고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계속하는가를 묻게 한다. 그녀는 게으른가/ 단지 읽는 사람이라면 일상적 사실을
기록하려는 것인가? 그녀는 미학적 조형적 새로움을 통해 자신을 배반해야하는 작가의 운명을 외면하고 대신에 진주 작가라는 아이콘, 닉네임에
만족한것인가? 책을 읽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고 일상의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진주 붙이기에 천작하는 작가의 집요함은 어떤 미학적 논리를
따르는 것인가? 그녀는 계속 뭔가를 숨기려한다. 언어가 가리키는 세계 문장의 지시체를 진주라는 동일한 오브제로 대체하고 자신이 읽으면서 본것을 읽힌 것의 자리로 대체하면서 결국 자신이 '본'것을 감추려한다. 우리는 그녀가 본 것이 무엇이지를 그녀가 읽은 것의 형식적 수열성, 순차성을 놓고 추측해야한다. 캡션으로 명기된 원전의 그 부분을 읽은 들 우리는 그녀가 본 것,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지표(index)로서의 진주, 그녀는 진실, 증거, 사실, 봄, 확인과 같은 눈의 작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법(전)의 존재론, 사람들의 관계가 강화되거나 훼손되는 인식의 구조에 대해 자신의 읽기에 경험을 갖고 성찰한다. 마음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 증거를 통해 지속되는 삶의 형식 중 가장 취약하다. 마음은 법전에 기록될 수 없는 타자, 말하자면 법전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 이고 마음은 관계를 지속시키면서 훼손시키는사이이다. 그녀는 본 것의 정확성, 본 것의 우선성이 어떻게 관계를 망치게 되는지를, 본 것 전부를 망치고 본 것의 전부의 눈을 지우는 행위로 재연한다.
● <<인생사용법 2부 - 조르주 페렉 작 146~~279p.>> ●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이번 전시 제목으로 고산금은 <<오마주 투 유>>를 선택했다. 당신에 보내는 존경과 감사.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 읽히는 중에 사라지는 것들. 내손을 잡고 저 편으로 인도했던 당신. 거기에 있어서 내가 엉금엉금 기어가고있는 당신. 거기서 여기로 늘 오고있는 당신 만났으니 헤어지는 우리. 헤어질줄 알면서 만나는 우리 그러므로 비극을 기다리는 우리. '말' 로는 다 할수없는 당신의 역할은 맡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앉아서 시간을 세어가며 패널을 메우는 결기와 고요. 당신은 오지 않을 것이고 왔다한들 온것은 아닌게다. 왔고 갔다는 눈의 교란 확신, 착란일 뿐이다. 너는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너는 찾을수 없는 자리 너인줄 모르는 나의 심연, 내 안에 동그랗게 오므리도 있는 덩어리이다. 그러므로 삶의 찬란한 은유는 기다림, 오고간 것의 증거와 무관한 약속과 신의 기다림의 무위(無爲)까지 도달해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의 노동, 그저 빈곳을 메우는 중의 침묵을 재현한다. 이번 전시는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2부로 나누어 72개의 패널로 필사하는 '노동'을 기점으로 그녀의 작업에서 그녀도 모르게 이어난 변화가 세 점 포함되었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을 지나다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내 실화보다 더 실화같은 삶을 입혀준 페렉의 대작에 대한 그녀의 화답은 은둔한 이들이 찾아낸 고독, 고통, 희열, 슬픔에 대한 오마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 인생에 끌려가고 필자의 팔자에 사로잡힌 삶의 희극과 비극을 인생이란 메뉴얼의 사용방식의 차이로 번역한 페렉의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확인했다.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거해 자신의 삶을 반복 - 그리고 나누고 꿰맞추기 - 에 제한하려했던 '바틀부스'의 주체적 능동성이 종국에는 우연에 의해 실패하게 되듯이 고산금 역시 세계를 살아내기 보다는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구성, 조직하는데 더 많은 시간으로 보내는 중이다.
● <<운명애-amour fati>> -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
● <<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 pearl beads, acrylic on wooden penal 2012 ●
페렉의 <인생사용법>에 대한 필사까지는 지난번 전시와 같은 기법이 반복되었다. <운명애>, <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 <dispossessed>는 형식면에서 기존의 작업과 확연히 다르다. 캡션은 인용, 필사된 텍스트를 명기하고 있지만 이제 화면은 평면이 아니라 삼차원의 공간성을 갖추면서 '책'같은 패널 대신 허공을 채우는 박스들로 대체된다. 상자는 감춘것, 비밀의 존재를 가리키려는 그녀의 일관된 제스처를 더 증폭시키고 가시화한다. 안에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없다. 박스는 감춘것이 있다는 인식의 도식을 복기하게 함으로써 열어보려는 욕망을 자극한다. 비밀은 우리의 삶이 거기서 거기이듯이 이미 우리가 들었던 것, 알고 있는것에 불과하다. 비밀은 아무것도 아니고 심지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자를 열어보고 싶은 욕망은 비밀의 지위를 지속시키는 착란이다. 우리는 한번 더 알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중에 직전처럼, 지난 번처럼 망치고 붕괴된다. 그런데 작가는 상자를 재현하되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상자의 모습을 같은 화면에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 환영으로서의 이미지의 지위를 강조하고 있다. 같은 것이 움직임, 운동성으로 인해 달라질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상자인가, 상자가 방편이 된 움직임, 흐름, 운동인가? 심지어 허공을 장소로 정한 상자는 주사위로도 보인다. 인간의 손을 떠난 주사위의 어느 쪽이 위쪽이 되어 떨어질지는 오직 저 우연한 운동만이 결정할것이다. 그녀가 상자, 주사위, 우연, 착시, 운동성에 대한 집요한 명상을 시작할 때 선택한 텍스트가 [니체]였다는 것은 대단한 우연이고 기적이다. <짜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필사하는 중에 저 유명한 운명애(amour fati)에 대한 부분에서 그녀는 주사위 형상을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오래전 소녀였을 때부터 외로울 때면 종이에 끄적거렸다는 상자가 결국 니체의 운명애를 만나면서 튀어나와 제 형상, 목소리, 자리를 발견한 것일까?
■ Gallery
SunContemporary - 양 효 실(미학박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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